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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머리공포 23 <소설6월10일>
게시물ID : panic_9864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빛나는길
추천 : 2
조회수 : 46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8/06/11 14:5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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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퇴로 없이 벌어진 가두시위
 
 

대학가는 여름방학에 들어갔다. 학생들은 방학을 맞아 산과 바다로 피서를 떠나지만, 학생 운동세력들은 농촌 봉사활동을 가거나 아니면 학교에 남아 전두환 파쇼 정권과의 싸움을 준비하고 있다. 명동거리 롯데백화점 근처 민소매를 입은 여자들의 모습이 많이 보인다. 무더위에 노인네들은 연신 부채질을 하고 있고 쇼핑하려는 사람들로 백화점 앞은 혼잡하다. 여름방학을 맞아 대학가 교내 시위가 뜸하지만, 이정훈은 815일 해방절에 맞춰 종각역 가두시위 택을 짰다.
지하철을 타고 종각 역에 내리면 검문당할 위험이 크기 때문에 시위대는 종각역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명동에서부터 걸어가고 있었다. 종각역은 광화문으로 이어지는 서울 시내 주요 지점이기 때문에 전투경찰 버스가 길가에 다섯 대 줄지어 서 있다. 시위 진압복을 입고 있는 전투 경찰들은 뜨겁게 작열하는 태양열에 헉헉 숨을 내쉬고 있다. 전경과 사복 체포조들의 신경이 곤두서있다. 전경수송 차량 안에는 선풍기 몇 대만 힘없이 털털거리며 돌아가고 있다.
김영철과 동료들이 명동에서 종각 방향으로 걷다가 앞쪽에 진을 치고 있는 전투경찰을 보니 왠지 건널목을 건너면 연행될 분위기다. 이 상황에서 옆에 있는 동료가 다급히 말한다.
검문이 심해서 종각역 접근이 어려운데, 여기서 치고 나가면 어때?”
그러지 마! 여기 롯데 백화점 앞은 빠져나갈 골목이 없어. 퇴로가 없다고.”
김영철이 동료를 말린다.
우리가 치안본부도 박살 냈잖아, 오늘 애들도 많이 모였는데 그냥 *나가리 내기에는 아까워. 그냥 밀어붙이자.
 

* 나가리 : 시위를 취소한다는 뜻
김영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동료가 와서 모여 함께 하나가 되자노래를 부르며 차도로 뛰어나가 주위에 있는 학생들을 모은다. 김영철도 어쩔 수 없이 대열에 합류하고 많은 학생이 차도를 점거하며 스크럼을 짜는데, 비 한 방울 내릴 거 같지 않은 마른하늘에 천둥 번개 같은 소리가 들린다. 전경들이 최루탄 수십 발을 기다렸다는 듯이 시위대 머리 위로 발사하여 최루가스가 쏟아져 내린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날씨에 최루가스를 뒤집어쓴 시위대는 눈도 못 뜨고 콧물 재채기를 해댄다. 이때를 이용해 사복 체포조들이 달려온다. 무더위 불쾌지수가 최고를 기록한 오늘, 왠지 사복 체포조들이 살벌한 기세에 서늘한 기운마저 느껴진다.
시위가 발생하자 롯데 백화점은 아예 출입문을 잠가버린다. 시위대가 백화점 안으로 못 들어오게 하는 것이다. 뒤로 물러가는 시위대가 롯데 백화점 쪽으로 도망칠 곳이 보이지 않자 반대 차선으로 넘어간다. 음식점들이 있는 골목 안으로 수십 명의 시위대가 도망치는데 막다른 골목이다. 사복 체포조들도 쫓아 들어왔다가 막다른 골목이란 걸 알고 당황한다. 도망갈 길이 없는 시위대는 사복 체포조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부상을 당한 학생들이 속출한다. 사복 체포조의 부상도 눈에 띈다. 거리에는 도망가다 벗겨진 학생들의 짝 잃은 신발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머리에서 피가 흐르는 학생, , 다리가 부러진 학생들을 전경들이 연행하다가 슬그머니 도로에 내려놓고 간다. 부상당한 사복 체포조들은 경찰병원 구급차가 와서 싣고 간다. 최성식이 전쟁터 부상 병동을 방불케 하는 장면을 보고 어이없어한다.
어떤 미친 새끼가 퇴로도 없는 데서 이 지랄을 친 거야.”
종각역 시위는 학생들의 큰 피해만 남긴 채 끝났다.
이로부터 약 2시간 후, 잠실 근처 비밀 아지트에 이정훈과 김영철 그리고 오늘 롯데 백화점 앞 시위를 무모하게 이끌었던 후배가 있다. 그 후배를 이정훈이 나무라고 있다.
기분대로 하는 게 운동이 아니잖아.”
죄송합니다.”
롯데 백화점 앞과 같이 퇴로가 없는 자살 택은 죽을 일 아니면 피해야지.”
이정훈이 후배들에게 화내는 일이 거의 없는데 오늘은 달랐다. 시위가 제대로 안 된 건 둘째 치고 많은 수의 학생이 연행됐고 부상자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정훈이 김영철만 데리고 집 밖으로 나간다.
영철아, 지금 니 몸에서 땀 냄새에 최루가스까지 섞여 있다. 너는 세수도 안 하냐?
세수요? 해야죠.”
그러면 나도 목욕한 지 꽤 됐는데 목욕 가자.”
둘이 근처 대중목욕탕으로 들어간다. 이정훈은 온 몸에 비누칠하고 샤워를 하는데 김영철은 샤워기 물에 손만 살짝 갖다 대며 얼굴을 씻고 있다. 비누기를 다 씻어낸 이정훈이 얘기를 꺼낸다.
내년 87년은 굉장히 중요한 시기이니깐 우리가 전두환 정권의 반민중성과 이 정권을 지원하는 미 제국주의에 대한 폭로를 제대로 해내야 해.”
그래서 어떤 형태의 택을 생각하세요?”
점거 농성.”
점거할 장소는요?”
아직 생각 중인데 전두환 정권과 미 제국주의의 연결고리에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곳이겠지. 이 택은 코카콜라 이글(Coca Cola Eagle)작전이라고 하자.”
미국을 상징하네요.”
은밀한 대화를 마친 둘은 샤워기의 물을 잠근다.
영철아, 우리 *오르그에서 운전할 줄 아는 애 있을까?”
 

* 오르그(Organization) : 조직을 의미하는 은어
글쎄요, 없을 거 같은데요. 저라도 배워볼까요?”
니가 어느 세월에…… 탕에나 들어가자.”
이정훈이 개구쟁이처럼 탕에 풍덩 들어가 잠수까지 한다. 그걸 김영철은 보고만 있고 탕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왜 안 들어와?”
사실 제가 어릴 때 저수지 물에 빠진 이후로 세숫물에 얼굴도 못 담궈요.
김영철의 그런 과거 사실에 이정훈이 놀라는 동작을 과하게 취한다.
우와~ 우리 투사 김영철이 물은 엄청 두려워하네.”
이정훈이 김영철에게 물을 살짝 튀긴다. 그 물에도 김영철은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난다.
, 저는 먼저 나갈게요.”
김영철이 나가고 그 뒤를 이정훈도 곧바로 따라 나간다.
수건으로 몸의 물기를 닦으며 옷을 입고 있는데 김영철이 이정훈에게 봉투를 내민다.
, 이거 받으세요.법학과 조교 형이 준 돈이에요. 과외한 돈이래요.”
너희들 써.
형이 돈 없어서 사람들 만날 때 웬만하면 걸어 다니는 거 다 알아요. 이 돈은 형한테 더 필요한 거예요.”
그래 고맙다. 조교 형은 잘 지내고 있지?”
얘기 들어보니 내년에 박사과정 들어간대요.”
그래, 그 형처럼 우리 운동에 동조하는 세력들 중에 박사도 있고 교수도 있어야겠지. 참 고마운 형이야. 우리 서클 선배로 *강집 갔다 와서 운동 포기한 케이스잖아. 그리고 영철아, 이번 주말에 나랑 가리봉동에 좀 가자.”
 

* 강집 : 군대 강제징집
 

, 알겠습니다.”
뭐하러 가는지 안 물어?”
조직의 대장이 그냥 가자면 가야죠.”
그런 김영철의 모습에 이정훈은 동지로서 굳건한 신뢰감을 느낀다.
 
* ‘대머리단어는 1980년대 파쇼정권의 전두환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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