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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에서 만난 할아버지
게시물ID : panic_9939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JJSS
추천 : 19
조회수 : 230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8/10/04 17:3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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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랜 옛날 중부고속도로에서 8중 추돌사고가 났던 일이 있었다. 원인은 트럭 운전기사의 졸음운전이었다.
  
사고 현장이 꽤나 처참했기에 뉴스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는데 생존자는 단 한 명뿐인 대형 사고였다. 그렇다. 내가 그 현장의 유일한 생존자다.

젊은 시절의 난 부푼 꿈을 안고 서울로 상경한 촌놈이었다. 난 정말 잠자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열심히 일했다. 덕분에 작은 가게를 차릴 수 있을 정도의 돈을 모았다.
  
그날은 고향에 내려가 부모님을 뵐 생각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고속버스에 올라탄 나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깨어나 보니 난 어느 산속에 고립되어 있었다. 밤이라서 그런 건지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하늘에는 섬뜩한 느낌이 들 정도의 붉은 달이 떠 있었다.
  
난 도대체 내가 왜 여기 있는지를 생각하며 걸었다. 붉은 달빛으로 인해 주변을 간신히 식별할 수 있었다. 주변을 살펴보며 조금 걸으니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어떤 사람은 넋이 빠진 것처럼 멍하니 서 있었고, 어떤 사람은 울고불고 난리를 피우고 있었다. 사람들 앞에는 검은 도포를 입고 갓을 쓴 창백한 얼굴의 남자가 두 명 서있었다.
  
그들은 책자로 된 명단과 사람들을 번갈아가며 쳐다보고 있었다. 아마 숫자를 맞춰보고 있는 것 같았다. 갑자기 한 남자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한데. 숫자가 안 맞아. 한 명이 부족해.”
“누가 없는데?”
“이현배.”

그들의 입에서 내 이름이 나오자 난 온몸이 얼어붙었다. 그때, 아 저들이 바로 그 저승사자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설마 난 죽은 것인가? 두려움이 밀려왔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데. 드디어 돈을 모아 고향에 내려오게 됐는데. 이제야 좀 삶이 풀리고 있었는데. 난 그동안 놀지도 않고 뼈 빠지게 일하며 돈을 모아온 지난날들이 떠올랐다. 이대로 끝내기엔 너무 억울했다.

“거기 누구냐!”

저승사자는 내가 있는 방향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그 목소리는 마치 천둥이 치는 것처럼 사방에서 울려왔다. 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뒤에선 도포를 펄럭거리며 쫓아오는 저승사자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어찌나 빠르게 쫓아오는지 그 소리는 점점 내게 가까워졌다. 난 이를 악물었다. 사방에 뻗친 나뭇가지에 온몸이 긁혔고, 여기저기 튀어나온 돌부리에 몇 번이고 걸려 넘어질 뻔했다.

숨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어느새 저승사자가 손을 뻗으면 닿을 만큼, 나와 저승사자의 거리가 좁혀진 것 같았다. 등 뒤에서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봐. 멈춰!"
  
등 뒤에서 저승사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땅이 쑥 꺼지는 것이 느껴졌다.

“으아아악!”

난 비명을 지르며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아래로 떨어지는 짧은 시간, 어째선지 자꾸 눈물이 났다. 날 기다리시는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쿵 소리와 함께 난 바닥에 들이박았다. 이상하게 몸에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난 내가 죽었음이 실감되었다.

난 나를 쫒아오는 저승사자에게 잡힐 것을 각오하고 고개를 들었다. 저승사자라면  저 절벽 따위는 손쉽게 내려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눈앞에는 있는 것은 저승사자가 아닌 마치 대궐 같은 커다란 기와집이었다.
  
집의 대문 앞에는 한 노인이 서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본 익숙한 얼굴이었다. 노인은 너무나도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 새끼. 이리 오너라.”

그 목소리를 듣자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노인은 돌아가신 내 할아버지였다.

“어이구 내 새끼.”

할아버지는 당신 먹을 것도 아껴가며 손주의 밥숟가락 위에 고기반찬을 올려주셨다. 손주 먹여야 한다며 먼 곳까지 나가 호빵을 사 오시던 할아버지였다.
  
그리운 할아버지가 눈앞에 있었다. 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난 할아버지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할아버지!”
“그래 내 새끼. 고생 많았다.”

난 어린아이처럼 할아버지의 품에 안겨 엉엉 울었다. 할아버지는 괜찮다는 듯 내 등을 토닥여주었다. 한참을 울고 나서야 할아버지의 얼굴을 쳐다봤다.
  
이십 년 만에 보는 할아버지의 얼굴이었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실 당시보다 더 젊어진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내게 미소 지었다.

“배고프지? 들어가자.”

나는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커다란 대궐집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의 마당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다. 여자들은 음식을 하느라 분주해 보였고, 남자들은 장작을 패고 마당을 청소하고 있었다. 그들의 생활방식은 언뜻 옛 우리의 생활방식과 닮아 있었다.

그들은 모두 조금씩 나나 아버지를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나를 보고는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 눈빛은 마치 네가 왜 여기 왔냐고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할아버지는 나를 집 안쪽의 사랑방으로 안내해 주셨다.

“여기서 잠깐 기다려라.”

할아버지는 잠시 어디론가 가시더니 잠시 후 잘 차려진 밥상을 가지고 들어오셨다. 상 위에는 육개장, 국수, 만두, 불고기 같은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올라가 있었다.
  
난 무척이나 배가 고팠지만 그것보다 걱정이 더 앞섰다. 고향에 남아계신 부모님을 생각하면 차마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 나 어떡하죠?”

할아버지는 날 안심시키려는 듯 말씀하셨다.

“밥부터 먹자. 배가 고프면 아무것도 못하는 법이다.”

할아버지는 옛날처럼 밥 위에 고기반찬을 올려주셨다. 난 음식을 천천히 입에 넣었다. 음식은 어린 시절의 향수가 떠오르는 맛있었다.
  
음식을 먹자 지쳐있던 몸에서 힘이 솟는 것이 느껴졌다. 거짓말처럼 내 몸에 생기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내가 죽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이보시오!”

밖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나를 쫓아오던 저승사자의 목소리였다. 분명 나를 찾아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난 이 짧은 휴식도 끝났음을 느꼈다.

“할아버지 고마워요. 저 이제 갈게요.”

나를 잘 대접해준 할아버지께 감사 인사를 했다. 이제 다 끝났다고 생각하니 목이 잠겨 말이 잘 나오질 않았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나와 달리 날 보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무슨 소리 하는 거냐. 넌 여기 있어라. 내가 나갔다 오마.”
“네? 할아버지. 무슨 말씀이세요?”

할아버지는 날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밖으로 나가버리셨다. 곧 할아버지는 집 밖에서 저승사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저승사자가 말했다.

“여기 이현배가 오지 않았소?”
“그런 사람은 오지 않았소.”

할아버지의 대답에 저승사자는 코웃음을 쳤다.

“거짓말하지 마시오. 이 안에 있는 거 다 알고 있소.”
“정말 오지 않았소.”
“이현배가 당신 손자인 거 내가 모르는 줄 아시오?”
“아 글쎄 오지 않았다니까!”

할아버지는 저승사자를 상대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으셨다. 할아버지의 기세에 눌린 건지 저승사자는 당황하는 것 같았다. 이윽고 대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더니 저승사자는 나에게 소리쳤다.

“이현배! 여기 있는 거 다 알고 있다! 어서 나오지 못해!”
“이게 무슨 짓인가! 아무리 저승사자라지만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가다니!”

할아버지와 저승사자가 실랑이를 벌이는 것 같았다. 우당탕하며 무언가 뒹구는 소리가 났다. 저승사자는 씩씩거리며 말했다.

“두고 보시오! 내 이대로 물러나지는 않을 거요!”

혹시 저승사자가 물러간 것일까? 할아버지는 문 밖에서 나를 부르셨다.

“이리 나오라. 이제 돌아가야 한다.”

난 할아버지의 말에 따라 마당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집 안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마중 나와 있었다. 그분들은 나를 보고는 마치 자신이 아끼던 막내아들을 보내는 것처럼 걱정과 뿌듯함이 뒤섞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내게 작은 호패를 쥐어주셨다. 그 호패에는 이현배라는 내 이름 석 자가 적혀 있었다.

“잘 들어라. 너는 아직 죽지 않았다. 이걸 지니고 가면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제가 아직 살아있다고요?”
“그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 아직 죽지 않았구나. 부모님을 뵐 수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정말 기뻤다. 하지만 그 말은 곧 할아버지와의 작별을 뜻하기도 했다.

“할아버지.”
“걱정하지 마라. 난 언제나 너를 지켜보고 있단다.”

할아버지는 다 안다는 듯 나를 안아 등을 토닥여 주셨다. 난 할아버지를 비롯해 모든 분들께 큰절을 올렸다.

“밖으로 나가면 산을 오르는 오솔길이 보일게다. 그 길을 따라 쭉 올라가면 빛이 보일 텐데 내가 준 호패를 지닌 채 그 빛 안으로 뛰어들면 돌아갈 수 있을게다. 알겠느냐?”
“네 할아버지.”
“이제 앞으로 나가면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마라.”
“네.”
“어서 가라.”

할아버지는 내 등을 떠미셨다. 대문 밖으로 나오자 주변 풍경이 연기처럼 일그러졌다. 혹시나 뒤에서 할아버지가 나를 지켜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할아버지와의 약속이었기 때문이다. 난 눈물을 훔치며 산길로 들어섰다.

“이현배!”

천둥처럼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저승사자였다. 그들은 내 뒤를 맹렬하게 쫓아왔다. 난 다시 정신없이 앞을 향해 내달렸다. 숨이 찼지만 아까 전에 먹은 음식 덕분인지 힘이 넘쳤다.

어느새 눈앞에는 할아버지가 말했던 빛이 보였다. 땀범벅이 된 손 틈 사이로 호패가 흘러내렸다. 호패는 딱딱 소리를 내며 튕기더니 어딘가로 굴러 내려갔다.

난 제자리에 멈춰 섰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호패를 찾으러 다시 내려가야 하나? 아니면 그냥 저 빛 속으로 뛰어들어야 하나?'
  
뒤를 돌아보니 저승사자는 내게 바짝 따라붙어 오고 있었다. 그들은 내게 일말의 시간도 주지 않았다.

“거기 서라!”

저승사자가 내게 손을 뻗었다. 뼛속까지 얼어붙을 것 같은 차가움이 느껴졌다. 난 반사적으로 그 손을 뿌리치고는 앞으로 내달렸다.
  
어쩔 수 없었다. 이판사판이라고 생각했다. 문득 날 기다리시는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눈앞에 눈부시도록 환한 빛이 나를 비추고 있었다.

***
  
내가 깨어난 곳은 병원이었다. 눈을 뜨니 하얀 천장이 보였다. 내가 깨어나자 엄마는 펑펑 울면서 나를 끌어안았다. 난 머리와 다리에 붕대를 둘둘 감고 있었다.
  
의사의 말에 따르면 사고 후 난 삼 일 동안 혼수상태였다고 한다. 내 손은 땀범벅이 되어 있었다. 손에선 방금까지 호패를 쥐고 있던 그 감촉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난 이후로 기적의 생존자라며 여러 신문에서 인터뷰 요청도 왔다. 하지만 전부 거절했다. 지금은 부모님도 모두 돌아가시고 내 자식들이 건강하게 자라나고 있다.
  
하지만 그때 내가 놓친 호패 때문이었을까. 요즘 들어 난 종종 정체불명의 검은 그림자를 목격하곤 한다. 도포에 갓을 쓴 검은 그림자를.
  
그 그림자는 지금 나를 따라다니고 있다. 아마 이제 갈 때가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직 갈 수는 없다. 적어도 자식들이 다 자랄 때까지 만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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