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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고찰 -니체 철학에서의 니힐리즘의 의미
게시물ID : phil_1145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uly89
추천 : 7
조회수 : 1220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5/05/25 08: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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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이 글은 2015년 5월 15일 제가 오유 철게에 작성했던 우스꽝스러운 졸문인 <니체가 철학계의 아이돌이자 현대철학의 킹왕짱인 이유>의 댓글에서 nagarjuna님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작성하는 글입니다. 

 원래는 니체의 중기 철학을 대표하는 세 권의 텍스트를 정리해서 체계적으로 그의 사상을 개괄하고 위 글에서 제시하지 못한 그의 전통적 형이상학에 대한 반박과 새로운 도덕철학을 비판적으로 살펴보는 기획을 6월 말까지 쓰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최근 개인적으로 여러 일이 겹쳐 바빠지고 말아서 애초의 기획은 실현하지 못할 것 같았고 그렇다고 니체에 대한 글을 올린다는 약속을 어기고 싶지는 않아 제가 가장 최근에 쓴 니체에 대한짧은 글로 대신하려고 합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어떠한 문헌도 참고하지 않고 오롯이 니체 텍스트와 제가 씨름해서 내린 결론이자 저만의 해석이므로 다소 주관적일 수는 있지만 독창적이라고 자부합니다.

 이하 글의 주제는 니체의 니힐리즘(허무주의)이 그의 사상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또 그의 위버멘쉬(초인)에 대한 아이디어로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실은 무의미한 것이라는 사실, 즉 허무하다는 사실, 의미는 전적으로 자의적인 것에 불과하며 가변적이고 언제든지 해체되고 다시 생성될 수도 있다는 사실, 때로는 그렇게 잘못 형성된 의미가 우리의 삶을 파괴하고 몰락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 세상은 오직 우연에 기반하고 우리가 필연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의 의식이 질서에 반응하여 만들어낸 착각에 불과하다는 사실, 즉 우리의 삶에는 실은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없으며 우리는 그저 이 세상에 내던져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위와 같이 허무에 도달하는 길은 단순한 의식적 반성에 의해서는 실현되지 않는다. “아 세상은 무의미해. 그리고 어떠한 가치도 절대적인 건 없어.” 이렇게 되뇌어봐야 내 머리 속에서 생성하는 의미, 의식의 자연스러운 목적론적 사고, 그리고 사회화된 자아가 주장하는 질서에 대한 강박을 결코 뿌리칠 수 없을 것이다. 의미는 결국 이익에서 오며 우리는 이익을 얻기 위해서 자신이 가진 의미가 타인의 의미보다 더 우월하다고 정당화한다. 그리고 이는 한 공동체 내에서 거부할 수 없는 정언명령으로 체계화된다. 우리는 라캉의 비유를 빌리자면 ‘아버지의 법’ 아래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법은 내재화된 선천성에 가까운 것이라서 우리는 이를 뿌리치기가 대단히 어렵다.  

 그 때문에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단순한 사태의 분석과 체계화를 넘어선 계보학자의 작업을 제안한다. 그에게는 기존의 철학이 특정 시대에 매몰된 것이며 자기 시대의 한계를 넘어서기를 거부하는 유치한 것, 독단론자들의 만행으로 보였다. 오직 수많은 사상들의 흐름과 역사를 추적하여 아이디어의 기원을 파헤칠 수 있는 계보학자만이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  그 치밀하고 엄밀하면서도, 자유롭고 무한한 상상력을 가진 정신의 지질학자이며 지층의 탐사자인 그 사람만이 각각의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고유한 에피스테메들을 넘나들며 인생의 무의미를 충분히 논증할 수 있는 것이다.  즉 허무주의는 계보학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계보학에 의해서만 완성된다. 그리고 진정한 허무주의가 도래했을 때, 완성된 허무주의가 태동했을 때만이 비로소 초인의 시대도 가능하다. 충분하지 못한 허무주의, 반쯤 완성된 허무주의는 결국 종말의 인간─모든 가치를 부정하는 척 하면서 제 입맛대로 골라먹고 자신의 주장만이 객관적인 것인 양 적당히 포장하면서 타인을 심판하려고 하는 자들─들의 세상을 불러올 뿐이다. 그런 점에서 허무주의는 충분히 완성되지 않으면 인류를 절망으로 몰고 갈 그 어떤 것이다.(물론 <멋진 신세계>라는 색다른 대안이 있기는 하다.)  

 그리고 완전한 허무의 긍정에 대한 깨달음에 도달해서야 비로소 우리는 이 세상 모든 것은 서로가 각자의 힘을 뽐내며 길항하는 무대이며, 존재하는 것은 오직 생명체가 자신을 보존하고 실현하라는 힘(스피노자에 따르면 ‘코나투스Conatus’,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생의 맹목적 의지’)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힘은 스피노자에 의하면 너무나 자연스럽게 인식되어서 굳이 논증할 필요도 없는 필연적인 것이고,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허무한 우리의 인생을 자꾸만 내달리게 하며 핍박하는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니체에게는 위의 두 가지 모두 아니다. 니체에게 힘은 필연적인 것이기 이전에 생성하는 것이고 괴로운 것이기 이전에 즐거운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남성에게 바라는 것은 오직 그가 훌륭한 군인일 것, 내가 여성에게 바라는 것은 그녀가 오직 아이를 잘 낳는 것, 그리고 그들 모두에게 바라는 것은 그들이 춤추는 법을 배우는 것.” 이 비유는 굉장히 의미심장하다. 우선 세상은 니체에 따르면 “화약 냄새 나지 않는 전쟁터”이다. 서로가 죽고 죽이기 위해서 힘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각자의 힘을 발휘하면서, 즉 자신만의 신념과 가능성을 가지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경쟁하면서 형성되는 것이다. 또한 그 과정에서 타자에 의해서 내재화되지 않은, 자신 만의 가치를 발굴하고 형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니체에게 그 작업은 출산에 비유된다. 그리고 니체에 따르면, 이렇게 힘을 발휘하며 경쟁하고 ‘가치의 입법자’가 되는 것은 말할 수 없이 즐거운 일이다. 그것은 인생의 허무라는 중력의 무게에 맞서서 자유로운 발걸음으로 춤추는 일에 비유된다.  

 이렇게 ‘춤추는 법’을 배우는 것은, 반성적 사유작용에 의해서 어느 한 순간 일어난 각성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그 동안 우리는 다음과 같이 오해해왔다. 철학은 세계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고, 그 지식을 통해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선한 삶을 살 수 있는지에 대한 지혜를 얻을 수 있으리라고. 이러한 소크라테스와 칸트의 시각은 지난 이천년 간 인간의 사유를 지배해왔다. 그러나 니체는 이를 정면으로 거부한다. 그는 말한다. 지혜는 결코 반성과 사유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대지에 발 디딘 자만이 들을 수 있는 것이라고. 즉 온 몸으로 인생을 살고, 반쯤 완성된 향락적 허무주의를 주장하는 종말의 인간들과 투쟁하며, 자신을 자극하고 자신의 가치를 부정할 수도 있는, 심지어 ‘적’이라고 불릴만한 인물들을 친구로 삼는 것, 이를 통해서 스스로가 입법한 가치체계가 오류에 가득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늘 받아드리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가치체계를 실현하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해 삶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니체가 우리가 건너가야 할 ‘밧줄’로 부른 인간의 삶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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