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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사랑해야만 할까요?
게시물ID : phil_1531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닉값하는천재
추천 : 2
조회수 : 474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7/04/18 15:44:29
 
 
 
 
인간애가 생득적 관념이 아니라는 전제를 깔고 논의를 시작해보겠습니다.
 
(태아는 인간애 같은 거 모르죠.)
 
 
 
사랑이란 것이 뭘까요?
 
어떤 개념을 단순히 사전적 정의로만 취급할 수도 있지만,
이른바 개념에 대한 '정의'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언어'의 형식으로 서술되어 있고,
이 '언어'는 후천적으로 습득된 것이기 때문에
언어 이전의, 비언어적인 사유 과정이 있을 것이고
언어는 그러한 비언어적인 인식 위에 덧씌워진 '기호'에 불과하다고 취급해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이라는 것은 도대체 어떠한 인식 위에 덧씌워졌는가?
여기서 "모든 인식은 그 지향하는 대상(객체)이 적어도 하나 이상 있다"라는 또 하나의 전제를 깔아보겠습니다.
 
이 '지향성'은, 현상학에서 후설이 이미 지적한 바가 있습니다.
인지과학적으로 말하면 '주의'에는 선택성, 방향성, 변동성이 있는데, 그 중 선택성과 연관성이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선택적 주의'라는 표현도 나오는 것이구요.
즉, 모든 사유에는 그 대상(객체)이 적어도 하나 이상 있다, 라는 식으로 대강 정리해보겠습니다.
 
이는 '문법'에서도 주어/목적어 등의 형태로 드러나죠.
가령 영문학자들이 문장들을 크게 1형식, 2형식, 3형식, 4형식, 5형식의 5가지로 구별할 때
어떤 형식이든지간에 기본적으로 Subject, 즉 주어를 구성요소로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고려해보면
적어도 앞서의 명제를 '예증'할 수는 있다고 봅니다.
 
 
 
 
 
물론 이것은 이를테면 [관찰자 - 관찰 대상] 혹은 [인지자 - 인지 대상/개념]이라는 암묵적인 해석틀을 기저에 깔지 않으면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객체'라고는 했지만, 문법에서는 '주어'로 변환되어 나타나기도 하기 때문이죠.
 
 
예시를 들자면,
'벚꽃이 예쁘게 폈네'라는 문장이 있을 때
'벚꽃'이라는 단어는 분명히 문장 내에서 '주어'로써 기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뜬금없이 제가 '객체'라는 표현을 썼는가?
 
이것은 단순히 문장의 구조/성분/요소/기능 등을 기준으로 부여한 규정이 아니라,
어떤 언어산출행위가 있을 때에는 반드시 그 발화자 또는 글쓴이, 즉 인식의 주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고려한 접근입니다.
여러분들이 그 '벚꽃을 관찰하는 사람'을 관찰하는 외부자의 입장을 가정한다면 좀 더 이해가 빠르리라고 봅니다.
문장에서는 이러한 사유 객체들이 종종 '주어'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 사실 '나는~'이라는 표현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사설이 좀 길어졌는데, 다시 사랑이란 무엇인가? 에 대한 논의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누군가가 '사랑'이라는 개념을 습득했다면, 반드시 '사랑'과 연관된 한 가지 이상의 '사건적 계기'가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 사건에서 '사랑'에 해당하는 '사유 객체'를 발견했을 것이기 때문이죠.
 
이 때 사유 객체가 반드시 어떤식으로든 물리적인 감각을 전달해주는 대상으로만 국한될 필요는 없습니다.
만약 마동석과 예정화의 열애설 기사를 접했다면, 그 사태나, 과정, 그리고 관계성(마동석과 예정화 사이의) 등등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사유의 객체가 될 수 있는 것이죠.
 
 
하여간에 요지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가?를 고민하다보면
결국 '사랑'이 무엇인지를 느끼게끔 만든 '계기'들이 있을 것이고,
그걸 추적하지 않으면 아마 '사랑'의 의미를 해독하기는 어려울 거라는 겁니다.
 
 
 
컴퓨터로 비유하면 더 쉽습니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출력되었다면, 그 이전의 정보처리과정이 있었을 것이고,
결국에는 처음에 입력된 데이터가 있었을 것입니다.
 
 
 
 
 
 
 
 
 
 
 
 
 
 
 
본론으로 가서,
 
보통, 인간애를 보편적인 도덕의 잣대로 내세우는 분들은
성장과정에서 '사랑'이라는 개념과 연관된 여러 '사건적 계기'들을 통해서
긍정적인 체험을 많이 하신 분들일 거라고 추정해보겠습니다.
반대로 '혐오'라는 개념과 연관된 사건들을 통해서는
부정적인 체험을 많이 하셨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그래서 그런 분들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안정적이고, 편안하고, 달콤하고, 희망적이고, 설레이는 느낌이 봄바람처럼 불어오는
그런 감정을 느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걸 방어라는 관점에서 해석해볼 때 상당히 흥미를 느끼게 되는데,
인간은 결국 어떤 태도를 취함으로써, 자아가 상처입는 것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을 때 그 태도를 유지해야 하는 명분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때의 태도가 전략적인 선택이라는 점에 주목합니다.
 
따라서, 그 전략적 입장으로써의 태도가 먹히느냐, 먹히지 않느냐가, 그 태도를 대하는 인간의 사고패턴을 결정하지,
아직 시도해보기 전에는 태도 자체에는 아무런 가치평가가 개입되지 않은 것이죠.
 
 
 
 
 
 
 
예를 들기 위해서
어떤 불량배 학생이, 평범한 동급생을 괴롭히는 상황을 가정해보겠습니다.
 
이 때 평범한 학생은 크게 2가지 선택을 할 수 있겠죠.
 
1. 뭐야? 너 갑자기 미쳤냐? (대항)
2. 내가 뭐 잘못한 거 있니...미안하다. (굴복)
(무시하고 아무 반응도 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논의의 편의상 제외하겠습니다. 쿨럭.)
 
이 때 '굴복'의 한 유형으로써, '나는 널 미워하지 않는데 넌 왜 나를 괴롭히니..?'라는 식으로 말을 했다고 쳐보겠습니다.
 
그러면 불량배 학생은 그 태도에 대해 크게 2가지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어...그래? 미안하게 됐다. 사과할게. (수용)
2. 니가 아직 혼이 덜 났구나? (배척)
 
 
 
이 때 평범한 학생의 입장에서 수용적 태도가 돌아온다면,
그 학생은 자신이 위기상황에 올바르게 대처했다고 생각하기 쉽고,
그런 식으로 사고회로가 잡혀버리면
유사한 상황에 처하면 또다시 굴복하는 태도를 보일 가능성이 높겠죠.
 
그런데 만약 다시 배척을 당했다고 쳐봅시다.
그리고 다음에도 계속 린치를 당하자, 화가 나서 무섭게 대항을 하게 되었고, 주먹다짐으로까지 번졌는데
불량배 학생이 싸움에서 졌고, 그 이후로는 쫄아서 공격을 멈추게 되었다고 해보면
역시 이번에는 사고회로가 반대로 잡혀서,
유사한 상황에 처하면 대항하는 태도를 보일 가능성이 높을 겁니다.
 
 
 
 
 
 
 
 
 
 
 
 
 
그런데 위와 같은 방어기제의 전형적 발달과정을 '인간애' 정신을 강조하시는 분들에게 유추적용해보니,
저는 아 저 분들은 타인을 사랑할 때 기쁨을 느꼈고, 좋은 일들이 더 많이 생겼나 보구나 정도로 생각하지,
절대적 진리로 간주하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저는 보통, 평범한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복합적이지만,
가장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는 제가 아무리 누군가에게 다정하고 친절하게 대해줘도, 
처음의 예상이나 기대와는 달리 이상하다는 듯한 시선을 보내오거나, 냉담하고 싸늘한 반응으로 돌아온 경험이 많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오히려 저는 제가 약간 재수없게 굴고, 할 말 다 했을 때, (제 외모에 저런 태도가 더 잘 어울리나 봅니다...ㅋㅋ)
사람들이 대리만족을 느끼고 좋아해준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다소 냉소적인 방어기제를 발달시켜온 것이죠.
 
 
 
 
 
 
 
 
 
 
 
 
 
 
 
 
 
 
 
 
 
 
제 솔직한 심정을 더 직설적으로 말씀드려보자면,
인간을 반드시 사랑해야만 하는가?
 
 
 
라고 했을 때
 
'당연한 거 아니냐?'고 말씀하시는 분들은,
주변 사람들을 사랑했을 때,
하여간에 '본인이' 좋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라고 봅니다.
 
 
만약 아무리 누군가를 사랑해도 늘 차가운 소외만이 돌아온 사람에게까지
무조건적인 사랑만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 강압적인 처사 아닌가? 라는 생각마저 들고요.
 
대개 히키코모리들을 상담하시는 분들이 마음의 문을 조금씩 여는 것만이 해결책이라고 조언하는 경우가 있는데
저도 대체로는 그런 처사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만,
예외적인 케이스가 있을수도 있다고 봅니다.
(상상력을 발휘해보면, 금방 떠올릴 수 있죠.)
 
 
 
몇 년 전 베스트셀러 목록에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이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저는 미움받을 용기 뿐만 아니라 '미워할 용기' '미워할 자유'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만 미움을 갖고 있는 것으로 그쳐야지,
그게 폭력적인 사태로 번지는 것은 막아야겠죠.
(이런 논리도, 저의 방어기제죠. 따지고 보면. 그러나 많은 분들이 동의할 겁니다. 폭력은 유쾌하지 않으니까요.)
 
 
 
 
 
 
덧붙이자면
이 글에서는 단순히 '인간애'를 예시로 들어 논했지만,
사회문화적 영역, 정치시사적 영역, 법적 영역이든 뭐든 이런 메커니즘이 기저에서 작동해왔다고 봅니다.
 
 
 
 
 
최근 부천?이었는지 정확히는 기억이 잘 안나지만
17세 여고생이 8세 초등생을 살해한 사건에서
'조현병이 있었으니까 참작해줘야 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이런 사람 아직 못봤습니다. 다만 제가 가정을 해보는 것이죠.)
'무슨 개소리야? 그딴 게 감형사유가 되니???'
따위의 주장들이 충돌할 수가 있는데
저는 이것이 '진리'의 영역이 아니라 '가치'의 영역이며,
그 '가치'라는 것마저도, 그 계기와 기원을 추적해보면
결국, 순전히 개인의 '감정적 반응'에서 결정이 되는 게 아닌가 하는 판단이 듭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회적으로 확산시키려고 하고요.
그러면 또 반대파들이 있고
이들이 부딪히게 되면,
정치판에서의 '선동'과 '네거티브'에 비유할 수 있는 사회적 충돌이 종종 벌어지죠.
 
(저는 그런 걸 상당히 흥미롭게 바라보는데 다른 분들은 어떠신지 잘 모르겠네요.)
 
 
 
 
 
 
물론, 애초에 그 '감정적 반응'을 보이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을 고려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이기적인 경우만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나는 A에 대해서 혐오감을 느끼지 않지만,
A에 대해 혐오감을 느끼는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A에 반대하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어쨌거나 요지는 이런 사회적 대립이 발생할 때, 어떤 쪽에서든지 주장의 객관성을 찾기는 굉장히 어렵다는 겁니다.
(물론 99 : 1 수준으로 대립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객관성을 대체하기 위해, 상호주관성을 선택하죠.
달리 말해서, 너와 내가 맞다고 합의하면, 일단은 그렇다고 치자, 라는 건데
이런 점을 반영해서 다수결의 원리가 채택된 것이구요.
 
 
'최소한의 도덕'이라고들 하는 법이라는 것도,
입법과정에서 표결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사실은 다수결의 원리에 입각해서 채택된 것이죠.
(다만 그 상호주관성이 상당히 큰 것들이 대다수고요.)
 
 
 
 
 
 
 
물론 저라고 해서 무질서를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사례들이 다분히 정치적인 행태를 보인다라는 것을 짚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서로 싸우고 화해하고 또 싸우며 살아가나 봅니다.
 
 
 
 
표면적으로는 도덕 싸움이지만, 깊이 해체해보면 성향 싸움인 것 같아요.
그 성향의 차이를 서로 인정해줄 수 있는 부분도 있고, 이것만큼은 양보 못한다 하는 부분들도 있겠죠.
 
 
아무튼 도덕이라는 말을 쓸 때는 누구든지 상당히 신중하게 써야 할 것 같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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