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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내재적 한계와 가능성에 관하여
게시물ID : phil_1564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문명탐구자
추천 : 1
조회수 : 494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17/08/05 19: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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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는 고에서 해방되고 윤회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사성제, 팔정도를 말했다고 한다. 불교는 소수 종교 아닌 세계 4대 종교 중 하나이다. 부처가 깨달은 것이 정말 진리고, 부처가 진정 마왕 파순 이야기로 대변되는 가상 현실세계를 극복해 낸 <위대한 인간 승리자>라는 것이 거짓 아닌 사실이라면, 대체 왜 세상에는 우울증, 대인공포, 공황, 조현병 등 수 많은 정신질환이 존재하는가? 이는 모순이 아닌가? 


                                             <불교 내재적 한계와 그 가능성>


<불법>은 그 자체로 완전한 진리가 아니요, 인간이 마음의 평온에 이르는데 도움이 되는 하나의 길이요 기술 체계다. 달라이 라마는 "나 역시 과거 불교가 최고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의사가 사람에 따라 처방을 달리하듯 여러 종교가 필요합니다. 한쪽에 치우치지 않기 위해 종교뿐 아니라 과학에도 관심을 가졌습니다." 라고 자기 허물과 자정과정을 공공연히 밝힌 바 있다. 한국 불교에서도 법정, 현응, 도법, 법륜, 수불 등 불교 지도자가 <불교>의 한계에 대해 양심고백성 발언을 한 바 있다. 

 
우주를 대변하는 <하늘>, 지구를 대변하는 <땅>, 사람( 생명체로서의 생명 작용 뿐만 아니라 고도로 발달한 뇌를 갖고 있기에 구축되는 고도의 정신작용을 지닌 존재) 뿐만 아니라 사람이 있음으로 존재할 수 있는 법과 제도, 문명, 종교, 문화, 과학, 기술, 발명, 철학 등을 대변하는 <사람>. 이렇게 <하늘>, <땅>, <사람>으로 소박하게 단순화시키면 <진리와 깨달음> 이라는 하나의 주제를 통해 온갖 분야를 아우를 수 있다. 나는 이 <하늘>, <땅>, <사람>이야 말로 온갖 종교와 사상 등을 존재케 하는 가장 <근본적인 토대>요 <근원>이라고 본다. 이 <하늘>, <땅>, <사람>을 고금이래 부정할 수 없는 <절대적 세계>로 보면, <사람으로 대변되는 고도의 정신 작용을 지닌 존재의 내면에서 새롭게 창조되는 세계와 이를 통해 바라본 세계>는 이와 대비되는 <상대적 세계>로 볼 수 있다.

 
불교의 위대성과 가치는 바로 이 각자의 내면에서 늘 새롭게 창조되는 <상대적 세계>요 <가상현실 세계>인 <마음>이라는 길목을 지켜 <고>에서 해방되어 평온에 이르는 법칙과 가르침을 지난 2500년 동안 끊임없이 체험, 사유, 연구, 토론, 검증 등을 통해 체계화한 것에 있다.고 본다. <마음>의 주체는 <신>이나 <타인>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발견과 선언은 인류 역사를 신 중심의 역사에서 인간 중심의 역사로 전환하는데 혁명적 기여를 했다.고 본다. 이는 모두 <불교>가 이룬 역사적 쾌거요 성과다.

 
다만 이것으로 정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고통이 근본적으로 사라지고 온갖 구속과 억압에서 인류가 해방될 수 있는가? 나는 아니라고 본다. 위대한 성인인 석가가 인류 역사에 출현하고 그 길을 걸어갔다고 해도 <절대 세계>는 변하지 않았다. 이것이 가능할리가 없지 않은가? 석가와 <불교>의 출현은 <절대 세계> 중 <하늘>, <땅>과는 무관하고 <사람>에게는 어느 정도 유의미한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또 <상대적 세계>인 <마음>의 기준에서는 <불교>가 인류가 <고에서 해방되어 평온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고 입증해 왔으므로 하나의 큰 길을 열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불교>의 근본적 가능성과 한계다. 이것을 인정할 때 <불교>도 <불교계>도 겸허해 질 수 있다. 그리고 이 한계와 가능성을 통해 앞으로 펼쳐질 <인공 지능 시대>, <우주 시대>에 걸맞는 점진적 내지 혁명적 혁신을 이뤄나갈 수있다. 고 본다.

 
<불법>은 결코 만능이 아니다. <불법>은 하나의 길이요 체계요 가능성이지, 그 자체로 완벽한 <그 무엇>이 아니다. <불법>은 도깨비 방망이나 요술 방망이가 아니기에, <절대 세계>를 마음대로 뚝딱하고 변화시킬 수 없다. <상대적 세계>인 마음이 평온에 이르려고만 해도 <불법>을 제대로 이해하고 착실히 삶에 적용해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 삶을 통해 꾸준히 정진해 나갈 때 비로서 실현된다. 제아무리 <불법>을 깨치고 또 통한다 해도 하루 아침에는 자기 <마음> 하나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게 사람이다. 이렇게 <불법>은 분명한 한계가 있다. 이것을 겸허히 인정할 때 <불법> 만능주의, <마음> 만능주의 <불교> 만능주의 <수행> 만능주의 <특정한 방편> 만능주의 등 <극단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다.

 
배고픈 자는 먹어야 <고>에서 해방된다. 아픈 자는 치료받아야 <고>에서 해방된다. 약이 필요한 자는 약을 먹어야 <고>에서 해방된다. 추위에 떠는 자는 추위에서 벗어날 때 <고>에서 해방된다. 더위에 시름하는 자는 더위에서 벗어날 때 <고>에서 해방된다. 이와 같이 인류가 가진 기본 욕구는 그 욕구가 건강하게 해소될 때 인류는 비로소 관련 <고>에서 해방된다. 이는 절한다고 선정 삼매에 든다고 불경을 외고 암송한다고 설법을 듣는다고 즉각 해소되는 게 아니다. 인류의 기본 욕구를 <불법>만으로 해소하려는 것은 <불교>가 자기 모순에 빠지고 자기를 부정하는 지름길이 된다. 생명체로서 생존에 필수적인 기본 욕구가 충분히 해소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과하게 욕심을 부려 더 갖고자 하고 더 누리려 하는 정신 차원의 욕구와 갈등은 얼마든지 <불교>가 바른 길을 제시할 수 있다. <불교>가 자기 정체성을 잃고 그 가능성과 한계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불교>는 자기 모순에 직면하고 이를 합리화 하려 하면 할 수록 자기 뿐만 아니라 세상 전부를 속여야만 하는 암울한 현실에 처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자기 자신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천하는 속일 수가 없다. 이것은 세상을 혼란과 혼돈에 빠뜨리는 주된 원인 중 하나가 된다.

 
세계는 바야흐로 <정보화 시대>요 <지구촌 시대>가 아닌가? 게다가 머지 않은 미래에 <인공 지능>, <우주 시대>까지 펼쳐질 예정이니, 어찌 작은 손바닥으로 천하 전부를 가릴 수 있겠는가?
                                

                                            <불교 실천적 한계와 그 가능성>


인류의 성인이라 일컬어지는 석가, 공자, 예수, 소크라테스, 마호메트 등 중 전쟁을 통하지 않고 비폭력 평화주의 방식으로 그 당대에 가장 성과를 이룬 이는 단연코 석가다. 이러한 석가도 당대 문화, 종교, 풍습, 제도 등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다. 석가는 권력, 돈, 명예, 존경, 신분이나 지위 등에 큰 욕심 내지 않았고 이에 연연하지 않았기에 당대의 신흥 권력자들과 자본가들 그리고 대중들에게 지지를 받아 자기 길도 걷고 또 초기 출가공동체도 형성해나갈 수 있었다.

 
석가는 깨달음을 얻은 후 스스로 <여래>라 선언하고 <깨달은 이, 붓다>로서 삶을 시작했다. 이는 신 중심의 삶에서 벗어나 인간 중심의 길을 걸어가며 생로병사 희로애락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의 표현이자 실천이었다. 이후 석가는 열반에 들 때 까지 부지런히 수행 정진하였고, 당대인들이 <고>에서 벗어날 수 있게끔 각자에 맞는 설법의 행함을 통해 사회참여를 실천했다. 이를 <대기설법>이라고 한다. 석가에게는 삶 그 자체가 수행처였고 삶 그 자체가 위대한 공부이자 스승이었다. 석가는 남을 위한다는 생각도 없이 그저 자기 삶을 살고 자기 길을 걸어갔을 뿐이지만, 석가의 삶 자체가 많은 이들에게 도움이 되었다. 이것을 <자리이타>라고 한다. 이렇게 석가의 삶 자체에는 <상좌부 불교>의 수행과 <대승불교>의 사회참여가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기준에서 <상좌부 불교>와 <대승불교>는 상호보완적인 관계라고 본다.

 
석가 당시 인도에는 훌륭한 수행자에게 공양하는 게 공덕이 되는 문화가 존재했다. 석가는 공양 문화, 승가 문화 등 당대 문화를 받아들이면서도 그 내용 면에서는 이를 더욱 더 진일보시켰다. 석가 자신과 승가에 공양을 바치는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았다. 심지어 자기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데 결정적 원인을 제공한 춘다 마저도 깊게 이해할 정도였다. 석가는 왕과 평민을 차별하지 않았고, 승가 내에서도 그 자신이 지도자나 스승이라고 특별 대우를 바라지 않았다.. 또 석가는 여성의 출가 수행을 허락한 시대를 앞서간 인물이었다. 또, 카스트 제도를 타파할 명분을 제공하는 <무아법>을 제시함으로써 역사적 대전환을 이루는데 기여한 사상가이기도 하였다. 이런 점에서 석가는 진정한 인간 해방론자요 민주주의자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석가도 당대의 한계는 뛰어넘지 못했고 그 때의 주류적인 수행 문화(고행주의, 선정주의 등), 공양 전통, 당대 고정관념(계급차별, 성차별) 등은 여전히 존재했다. 그리고 석가 사후 석가는 불멸의 존재로 신격화 되었고 그 삶과 깨달음의 여정과 그 실천 또한 <성역화>되었다. 그리고 이는 하나의 불가침의 교본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상좌부 불교>에서는 국가, 사회적 지원과 수행 제도의 체계적 정립 등을 통한 체계적인 동시 철저한 수행을 통해 <아라한>이 되는 것이 궁극의 목적이 되고, 대중들은 승려들을 존경하여 공양하는 것을 큰 공덕으로 알고 있고, <대승 불교>에서는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보살이 되어 중생제도 실천을 삶의 궁극적 목표로 삼고 있다. <불교>의 이러한 이상적 목표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는 <깨달음>은 이미 성역화 되어 다시는 깨달은 이가 나올 수 없고, 대중들의 <공양 문화>는 나라 마다 다르게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공양 문화>는 훌륭한 수행자와 승가, 스승을 존경하며 삶의 의지처로 삼아 대중이 그때 그때 위로와 위안을 받는 <염불>, <부적>, <기복>, <석가탄신일> 불교로 이어지고 있다. <대승불교>가 중생제도를 목적으로 한다고 하나 실제로 그 실천은 미미한 실정이다. <대승불교>는 수행과 사회 참여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목표로 하나 그 결과는 <물음표>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한국 불교는 그 정체성이 모호하고 <수행>과 <사회 참여> 그 어느 쪽에서도 딱히 세계적으로 내세울 것이 없는 게 현실이다.

 
현대 <대승불교>는 달라이 라마, 탁닛한, 숭산, 법정, 법륜, 혜민 등 소수의 슈퍼스타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절대 다수의 대중들은 여전히 이들을 마음의 의지처요 등불로 삼아 그때 그때 위로와 위안을 삼을 뿐이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세계 각국의 불교와 종단 및 분파, 단체들은 저마다 자기들이 석가의 법맥을 바르게 이었다고 주장하고 있고,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지 않고 시기 질투하는 등 포용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대중들을 큰 혼란과 혼돈에 빠지게 한다. 대자대비는 대체 그 어디에 있는가?

 
이런 <불교>와 이런 <대중>과 이런 <문화적 풍토>에서 어찌 우울증, 공황, 불안증, 조현병 등이 치료될 수 있겠는가?

 
이런 기준에서 <불교>의 <수행>과 <대중적 실천>은 석가 시대를 여전히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고 나는 판단한다. 그 당시의 <아라한>도 병고를 못 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이 있었는데, 수행의 질이나 사회 참여 정도가 그때에 미치지 못하는 오늘날은 오죽하겠는가? 그때에 비해 생활 수준, 과학 기술 수준이 비교할 수 없이 발전했기에 그나마 <불교>의 위태로움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을 뿐이 아닌가? <불교>가 부디 <완전한 진리>, <완전한 깨달음>, <불법 만능>, <내가 최고>라는 허망한 환상에서 벗어나 현실을 뼈저리게 깨닫고 그 한계를 발판으로 거듭 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현실을 잊게 해주는 마약과도 같은 달콤한 꿈에서 깨어 현실을 그대로 직시할 때면 그 누구라도 자연히 아프디 아플뿐 만 아니라 고통스럽기 짝이 없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통 없이는 역사는 단 한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교훈을 <불교> 및 <불교계>가 애써 눈감지 말길 바란다. 위기는 기회다. 이 위기를 발판으로 <불교>가 <우주적 종교>로 거듭날 수 있다면 좋겠다. 이는 그야말로 전화위복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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