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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 번역 성경에 도전하다.]3. 창세기 원죄, 그리고 카인과 아벨
게시물ID : phil_1565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문명탐구자
추천 : 0
조회수 : 380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7/08/06 08:4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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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죄, 그리고 카인과 아벨
 
 
사실, 이해, 믿음에 관하여
 
 
사실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나 현재에 있는 일을 말하고, 우리는 사실을 믿는다.고 하지 않고 이해한다. 그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 등으로 표현한다. 헌데, 종교는 믿음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종교가 제시하는 온갖 주장, 논리 등은 사실 그 어떤 증거나 근거도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신이 있다는 전제 조차 종교는 스스로 증명해 내지 못한다. 이런 이유로 종교는 믿음과 체험을 강조할 수 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갖는다. 헌데, 이것은 또 이것 나름의 문제가 있다. 믿음과 체험, 감성, 영성 등을 강조하면 강조할 수록 종교인들은 반지성주의, 우민주의, 우중주의 등에 노출될 수 밖에 없고, 이렇게 빈약한 지성, 이성, 지혜를 토대로 쌓아올려진 종교관, 진리관 등은 더 상위의 패러다임을 만나는 순간 그 얼마든지 사상누각과도 같이 와르르 허물어질 수 있다. 종교가 처한 현실이 이러하기에 종교는 사이비니 이교니 이단이니 하며 타 종교, 다른 종파, 다른 학파 등을 불구대천의 원수 보듯 미워하지 않을 수가 없다.  헌데, 종교 밖에서 바라보면 솔직히 그 종교가 그 종교로 보인다. 한마디로, 도긴개긴이요 오십보백보일 따름이다. 스스로를 정통이라 주장하는 종교나 신흥 종교나 내가 언급한 기준에서 보자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본질적으로는 믿음과 체험을 강조하고 이성을 마비시킨다는 점에서는 별 다를 것도 없는 똑같은 종교일 뿐이다.  ㅡ여기서 말하는 종교는 기독교, 이슬람, 유대교, 힌두교 등 유일신 내지 일원론적 범신론 등을 그 사상적 기초로 일정한 규모 이상의 조직, 고도로 체계화 된 믿음 체계 및 교리 체계, 지도자 및 신도 등을 갖춘 체계화 된 믿음이 기반이 된 단체를 뜻한다. 이런 기준에서 종교는 사상, 철학, 학회, 학파 및 관련 조직이나 모임 등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불교는 종교성을 띈다는 점에서는 종교에 포함될 수 있고, 철학적인 면에 있어서는 철학에도 속한다고 보여진다. 이렇게 종교를 엄격하게 또 보다 더 엄밀하게 정의하면 종교라고 논할만한 것이 세상에는 별로 많지 않음에 새삼 놀라게 된다. ㅡ
 
 
종교라는 게 이렇게나 옹졸해서야 어디 크게 쓰일 수 있겠는가? 자기 신앙에 대해서는 지켜나가되 타 신앙에 대해서는 관용으로 대하는 최소한의 기본 자세가 종교인들에게는 더욱 더 요구된다. 그러므로 나는 인류 공존과 번영, 상생을 위해서라도 종교가 대내외적으로 내세우는 사이비, 이단이라는 개념, 규정, 심판권 자체를 박탈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이는 세계의 보편 지성이나 각 국가의 법률에 맡겨야 한다는 입장에 서 있다. 종교가 마녀 재판, 종교 재판을 할 수 있는 권리 및 근거 자체를 박탈하는 게 인류의 행복에는 도움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핵폭탄> 보다 더 위력이 센 <종교 재판> 관련 권한을 행사하기에 현존하는 종교는 아직 그에 걸맞는 성숙함, 관대함, 고도의 지성, 통찰, 지혜 등을 갖추지 못하였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며, 솔직하게 말해서 인류가 그 어떤 종교에게도 그러한 어마어마한 권한과 권리를 부여한 사실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 믿음, 체험, 감성, 영성 등을 통해 주장하는 종교이기에 인류가 더욱 더 깐깐하게 검증하고 철저하게 견제하는 게 종교를 위해서도 인류를 위해서도 더 나은 방향이리라.
 
 
 
믿음, 체험에 관하여
 
 
또, 종교인들은 흔히 믿음, 체험이 자기들만의 독특하며 독보적인 그 무엇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경향을 보인다. 헌데, 알고 보면 특정 종교에 소속되어 있지 않거나, 종교를 믿지 않는 이들도 얼마든지 우주, 대기권, 지구, 삼라만상 등과의 관계에서 그 얼마든지 경이로운 체험을 해오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종교인들이 그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처럼 어떤 보이지 않는 틀 안에 갖혀 살아오고 있는지가 단적으로 드러난다. 분명히 말하지만 종교 밖에서도 종교 안에서 경험할 수 있는 믿음, 체험 등은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다.
 
 
정말이다. 내기를 해도 좋다. 만약 내가 인류 역사의 영웅, 영웅적 지도자인 남과 여, 최고의 악인, 존경할 만한 인물군 등에 대해 잘 엮어 한 권으로 잘 요약하고 이를 인류가 감동을 느낄 만한 사상과 철학을 덧씌워 하나의 책으로 만들어  전세계에 충분하고도 충분할 정도로 보급한다면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까? 또 관련 조직을 전세계적으로 만든 후 인류 각 개인의 행복, 자존 및 인류 공영과 번영을 위해 헌신해 나간다면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내기를 해도 좋다. 분명히 그 안에서 온갖 치유, 구원, 깨달음, 기적 등을 경험했다는 이들이 속출할 것이다. 아니라고? 나의 착각이라고? 기대해도 좋다. 그 원리 등을 속속들이 알고 보면 믿음, 체험 등은 자연히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모를 때나 신비한 것이지 그 원리 등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나면 정말 별 것도 아닌 게 되어 버린다. 부디, 믿음과 체험 등이 종교 만의 특권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에서 벗어나기 바란다. 
 
 
 
원죄에 관하여
 
 
원죄(original sin, 原罪)는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담이 선악을 구분하는 열매를 먹으면서 발생하였다는 죄로 기독교의 근본이 되는 핵심 논리 중 하나다. 헌데, 나는 기독교가 말하는 전지전능한 신이란 존재 자체 내지 <전지전능>을 이미 깔끔하게 논파한 바 있다.(더 구체적인 내용은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phil&no=15644&s_no=15644&page=1 글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나에게 있어서 <신>은 그저 우주나, 대기권 내지 지구 등을 지칭하는 한낱 말에 불과하다. 즉 인간이 필요에 의해 만들어낸 개념이요, 만들어 낸 존재가 바로 <신>이라고 본다. 물론 이 때의 <신>은 그저 지칭하는 말에 불과하다. 이때의 <신>은 우주, 삼라만상 그 자체 아닌 종교가 전면에 내세우는 절대자라고 주장하는 그 무엇이요 그 어떤 존재다.
 
 
 따라서 내가 기독교의 <원죄> 논리를 받아들일 그 어떤 까닭도 없다. <신이> 창조한 인간이 <신>의 말 안 들었다고 그 행위 자체가 <원죄>란다. 그래서 인간이 <죄인>이란다. 가히 어린아이 어르고 달래는 수준이다. 정말 기가 막히는 논리요 논리체계다. 이것이야 말로 현존하는 기독교가 세계 및 인류에게 내세우는 핵심 논리의 적나라한 모습이다. 정말 초라하지 않은가? 정말 부끄럽지 않은가? 정말 미안하지도 않은가? 정말 한심하지 않은가?
 
 
이 <원죄>를 정말 믿어 의심치 않고 자기 삶에 받아들이면 대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것은 <신>이라는 절대자에 의해 행해지는 무의식 차원의 공포의 각인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한 인간의 무의식 속에 신의 심판과 처벌 이라는 공포가 각인된다고. 신이라는 존재가 인간에게 공포나 불안이나 선물한다고. 일단 이러한 개념, 논리 체계를 받아들인 이후로는 기독교를 떠나서는 평온과 행복을 누릴 수 없을 것이며 타 종교 등에 귀의하고자 할 때 무의식 차원에서 보이지 않는 심각한 갈등이 지속적으로 발생한다. 이것은 대체 그 무엇을 말하는가? 정신의학상 정신 분열, 우울, 불안 등을 기독교 논리가 발생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기독교의 이 논리 체계는 분명히 인류를 기독교 안에 구속시킨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 논리는 인류의 행복을 저해하는 바이러스라고 볼 수 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신>이 <인간>을 구속시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을 통제하고자 하는 자들이 <신>이라는 개념을 전면에 내세워 <인간>을 구속시키고 그 삶을 통제하는 것이다. 사실이 이러하다면 기독교가 과연 인간을 오랜 세월 동안 억압하고 혹세무민하며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통제해 왔다.는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당연히 자유로울 수 없다. 당연히 이런 기준에서 기독교는 분명히 유죄다. 기독교 안에서 분명히 인간을 혼돈, 혼란, 불안, 공포 등에 자빠뜨리는 거대한 바이러스가 존재하며 기독교는 이러한 거대 바이러스의 공급처요 진앙지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최소한 이러한 기준에서는 유죄다. 탕.탕.탕.
  
 
다시 한번 말한다. <신>, <원죄>, <대속>, <심판> 등을 받아들인다면 그 혹은 그녀는 기독교라는 우물안 세계를 떠나서는 제대로 살아남기가 어렵다. 이러한 의미에서 기독교의 특성을 속속들이 알고도 <그럼에도 불구라고 나는 절대자에게 귀의하겠습니다>라면 나는 상관하지 않을 것이며 상관할 까닭도 딱히 없다. 허나, 인류를 혹세무민하고 순진한 이들을 속여 등처먹으려는 종교에는 철퇴를 내리고 인류와 공동으로 견제하고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종교를 건들지 말라고? 대체 왜 종교만 견제받지 말아야 하는가? 대체 왜 종교만 견제 받지도 않고 형사 기소, 처벌, 민사 소송, 헌법 재판 등에서 열외 되는 특권 중에 특권, 특혜 중에 특혜를 누려야만 하는가?
 
 
카인과 아벨에 관하여
 
 
1. 아담아내 하와와 한자리에 들었더니 아내가 임신하여 카인을 낳고 이렇게 외쳤다. "야훼께서 나에게 아들을 주셨구나!"
2. 하와는 또 카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을 치는 목자가 되었고 카인은 밭을 가는 농부가 되었다.
3. 때가 되어 카인은 땅에서 난 곡식을 야훼께 예물로 드렸고
4. 아벨은 양떼 가운데서 맏배의 기름기를 드렸다. 그런데 야훼께서는 아벨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시고
5. 카인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지 않으셨다. 카인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몹시 화가 나 있었다. 야훼께서 이것을 보시고
6. 카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왜 그렇게 화가 났느냐? 왜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느냐?
7. 네가 잘했다면 왜 얼굴을 쳐들지 못하느냐?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잘못 먹었다면, 가 네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릴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그 에 굴레를 씌워야 한다."
8. 그러나 카인은 아우 아벨을 들로 가자고 꾀어 들로 데리고 나가서 달려들어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
9. 야훼께서 카인에게 물으셨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카인은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하고 잡아떼며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10. 그러나 야훼께서는 "네가 어찌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 하시면서 꾸짖으셨다. "네 아우의 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11. 이 입을 벌려 네 아우의 를 네 에서 받았다. 너는 저주를 받은 몸이니 이 에서 물러나야 한다.
12. 네가 아무리 애써 을 갈아도 이 은 더 이상 소출을 내지 않을 것이다. 너는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될 것이다."
13. 그러자 카인이 야훼께 하소연하였다. "벌이 너무 무거워서, 저로서는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14. 오늘 이 에서 저를 아주 쫓아내시니, 저는 이제 하느님을 뵙지 못하고 세상을 떠돌아다니게 되었습니다.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15. 그렇게 못하도록 하여주마. 카인을 죽이는 사람에게는 내가 일곱 갑절로 벌을 내리리라." 이렇게 말씀하시고 야훼께서는 누가 카인을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그에게 를 찍어주셨다.
16. 카인은 하느님 앞에서 물러나와 에덴 동쪽 이라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17. 카인이 아내와 한자리에 들었더니, 아내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았다. 카인은 제가 세운 고을을 아들의 이름을 따서 에녹이라고 불렀다.
 
 
여기에 나오는 것이 그 유명한 카인과 아벨 이야기다. 분란을 초래한 것은 누구인가? 바로 <신>이다. 옹졸하고 치졸한 것은 누구인가? 바로 <신>이다. 스스로 원인을 제공하고도 인간 행동을 빌미로 심판하고 처벌하는 누군인가? 바로 <신>이다. 이것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다. 기독교가 만들어 낸 <신>은 특히 구약의 <신>은 그 성숙도, 관대함 등에 있어서 일개 지혜롭고 성숙한 인간 만도 못한 존재다. 이러한 얼뜨기, 얼치기 <신>, 이렇게나 제멋대로 전횡을 일삼는 <신>은 인류의 행복을 위해 마땅히 폐기처분 되어야만 한다. 구약은   유해 바이러스의 온상이자 진앙지이기에 폐기 처분 되어야 마땅하다. 구약의 <신>  또한 그 존재 자체가 인류 행복을 저해하는 유해한 <바이러스>와 같은 존재니 마땅히 폐기처분 되어야만 한다.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를 구하는 기도-
 
주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부디 세계 기독교계 안에서 프란치스코와 같은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세상 천하에 기독교가 교세를 널리 떨치고 위풍당당 하기로는 이슬람, 힌두교와 가히 자웅을 겨룰 만해 보인다. 헌데, 그 실제는 어떠한가? 프란치스코와 같은 진정한 예수의 제자는 극히 드물디 드물어 찾아볼래야 찾아보기 조차 힘든 대신에 덜 여문 자들이 지도층을 차지하고 세속의 권력이나 탐내고 있고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신도들은 주체적인 판단이나 자기 결단도 없이 정신적 노예 되어 그저 지도자들을 따르며 지도자들의 허물을 세상이 알까 두려워 되려 감춰주기에 급급한 것이 오늘날의 기독교계가 처한 현실이 아니던가? 예수가 그렇게 비판하던 바리새인을 오늘날의 기독교계가 닮아 있지는 않은지 자문해 볼 일이다.
 
 
나 또한 프란치스코와 같은 진정한 예수의 제자는 진실로 존중하고 존경한다. 이러한 까닭에 그에게 이 시를 바친다.
 
 
 
사랑, 그 가슴 떨림에 관하여
 
사랑은
결코 집착이 될 수 없고,
자유로운 두 영혼의 설레임은
그저 생각만으로도 눈물이 난다.

,
이미 한 세계이며 우주인 존재
이제는 너를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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