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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철학하다. -5- 돈에 관한 나의 무의식 형성기.
게시물ID : phil_1566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문명탐구자
추천 : 1
조회수 : 43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7/08/08 12: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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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에 관한 나의 무의식 형성기.
 
 
내가 어렸을 때, 난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주말마다 집을 나서곤 했다. 굴다리를 지나 버스를 타고 아버지와 나는 어디론가로 향하곤 했다. 이 당시 내가 불과 너댓살 무렵에 불과해 아주 세세한 기억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나는 아버지와 함께 어디론가 향하는 그 느낌이 좋았다.
 
 
아버지의 까칠까칠한 수염이 난 볼, 턱 등에 내 양뺨을 부비기 좋아했던 난 아버지가 직장에서 집으로 돌아오시는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차리고선 문 밖으로 쪼르르 달려가 아버지 품에 꼬옥 안기곤 했다. 이런 나를 아버지께서도 퍽이나 좋아하셔서 어린 나로선 상당히 먼 버스 여행에 나를 꼭 데려가곤 하셨다.
 
 
아버지와 함께 버스를 타면 할아버지, 할머니들께서 아이가 귀엽다며 초코파이 등을 건네주시기도 하셨는데, 다른 건 다 기억이 안 나는데 어찌나 초코파이를 맛있게 먹었던지 초코파이 만큼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아버지가 내 손을 잡고 버스에 내리는 곳은 늘 일정했다. 아버지는 어떤 가게 딸린 집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나오곤 하셨는데, 그때 마다 기분이 그닥 좋아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나로서도 아버지 심기가 편치 않음을 어렴 풋이나마 느낄 정도였다.
 
 
그곳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아버지는 늘 말씀이 없으셨다. 출발 할 때와 너무도 다르셨기 때문에 나는 종
종 아버지가 딴 사람이 된 것 같다는 이상한 느낌도 들었다. 아버지가 힘없이 집으로 돌아온 날엔 집에서 한바탕 큰 소란이 일어나곤 했다. 울그락불그락 화가 난 어머니와 마음도 상한데다 어머니의 바가지에 신경이 크게 거슬린 아버지는 옥신각신 다투곤 하셨다. 물정도 모르는 난 그저 이 소란이 빨리 그치기만을 바랄뿐이었다. 한바탕 하신 후에는 아버지는 밖에서 술을 드시고 오시곤 하셨다.
 
 
어머니에게는 이런 아버지가 매우 못마땅하셨던 모양이다. 어머니는 술이라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치를 떨 정도로 술기운을 이기지 못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참지 못하셨다. 하지만 이렇게 한바탕 야단법석 난리가 끝나고, 고요해진 다음엔 언제나 어머니는 부엌에서 아버지 속 다스리는데 좋은 꿀물을 타거나, 다슬기며 북어 등을 손질해 다음날 아버지 출근 전 식사 때 올려놓곤 하셨다. 내가 좀 더 나이가 먹은 이후에야 비로소 나는 당시 부모님께서 친척에게 빌려준 돈 문제로 종종 다투곤 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일가를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셨고, 어머니는 결혼하여 독립했으면 가정이 최우선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셨다. 사정이 이러하니 부모님께서는 자연히 다투실 수 밖에는 없었다.
 
 
어린 나에게 이 모든 갈등과 다툼의 주된 원인은 단연코 <돈>이었다. 그 당시, 나는 저, <돈>이란 녀석이 부모님을 다투게 하고 우리 가정에 분란을 일으킨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대체 <돈>이란 녀석은 어떤 녀석이기에 우리 가정에 갈등을 초래하는 것일까? 라는 돈에 관한 부정적 인식과 경험이 내 어린 시절을 지배했다. 또, 어린 시절에 나는 따로 경제 교육을 받아본 적이 전혀 없었다. 명절에 부모님, 친척, 주변 이웃 어른들께서 주시는 돈은 내 고사리 손에서 어머니 수중으로 모조리 옮겨가곤 했다. 어머니는 그때 마다 내게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했다.
 
 
"적금에 넣어두고 네가 대학갈 때 자금으로 쓸 거야."
 
 
나는 속으로야 불만이 가득했으나 겉으로는 내색하지도 표현하지도 않았다. 이렇게 나는 돈의 맛을 일단 제대로 맛 본 적이 없었고, 돈에 관해 긍정적 경험을 한 적도 없었으며 경제 교육 마저도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었다. 또 나는 진정한 의미에서 돈의 주인이 되어본 적도 없었다. 
 
 
이러한 가운데, 우연하게도 동네 할아버지 한 분을 알게 되었다. 그분은 늘 자전거를 타고 다니셨다. 동네에서 엄청 무섭다는 소문이 나돌던 할아버지셨다. 어느 날 내가(여섯살 때의 일로 기억된다.) 저녁 늦게까지 딱지치기를 하고 놀고 있었는데 그만 놀이에 정신이 팔려 할아버지가 자전거 타고 오시는 것을 못 보고 말았다. 할아버지는 할아버지 나름 대로 황급히 나를 피하려 하셨으나, 공교롭게도 할아버지가 피한 그 자리에 마침 내가 딱지를 주우려고 그 곳에 서 있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난 영문도 모른 채 그저 막연하게 아팠기에 눈물을 줄줄 흘리며 울 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눈 낲에 무엇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눈물을 훔치고 바라보니 할아버지께서 굉장히 미안한 표정으로 내게 눈깔사탕을 내밀고 계셨다. 그렇게 할아버지와 낭와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것은 아이와 할아버지 간의 단순한 호기심이나 유대관계 정도를 훌쩍 뛰어넘는 순수한 한 인간과 또 다른 한 인간의 만남이 아니였다 생각하게 된다. 서로가 서로게 대해 차츰 마음의 문을 열게 되자 할아버지는 더이상 무서운 분이 아니셨다. 적어도 내게는 말이다. 그 일들은 아직도 내 뇌리에 소중한 추억으로 고스란히 각인되어 있다.
 
 
그리고 몇 해 후, 어느 눈 오던 날 밤 이후 할아버지는 동네에 더는 나타나지 않으셨다. 또, 내게 더이상 눈깔 사탕도 건네 주지 않으셨다. 겨울, 그 어느 날 밤 시야를 가리는 눈보라가 치는 날 자전거를 타고 산을 넘던 할아버지는 그만 영영 돌아오지 못할 그곳으로 떠나고 마셨던 거다. 난 이 사실을 그 일이 있은지 며칠이 지나서야 겨우 알게 되었다. 할아버지와 나와의 인연을 시작하게 해 준 것도 자전거였고, 할아버지와 나와의 현세에서의 마지막 끈을 놓게 한 것 또한 바로 그 자전거였다. 내 생애 최초의 죽음이란 화두는 이렇게 나를 찾아왔다. 내가 사는 동네에는 많은 무속인들이 살고 있었고, 또 공동묘지 또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기에 자연히 나는 어린 시절 부터 삶과 죽음에 관해 눈 뜰 수 밖에 없었다. 나는 꿈, 현실, 미로, 삶과 죽음, 불교, 기독교, 무속 등에 관해 일찌감치 호기심을 갖게 되었고 모종의 이유로 나는 이에 관한 관심을 곧 접게 되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학교에서 가계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다. 그 당시 나는 외조부, 친조부 란에 아무것도 적어내지 못하였고, 이는 나를 매우 부끄럽게 만들었다. 당시, 부모님께 여쭤도 두 분께서는 내가 납득할만한 답변을 해주시지 못하였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였다.
 
 
"혹시 우리집 친일파가 아닌가?" 하고. 이후로도 이 의문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외조모님께서는 어렵게 행상으로 삶을 영위하셨고, 이는 내가 아는 친일파 및 그 후예의 삶과는 너무도 달랐기에 또 이런 의문이 들었다.
 
 
"친일파인가? 친일파가 아닌가? 대체 어떻게 된 사연일까?" 하고.
 
 
<보이지 않는 세계>, <진리와 깨달음> 등에 관해 큰 혼돈, 의혹 등에 내가 휩싸인 게 바로 열살 무렵의 일이고, 돈에 관한 내 인식과 경험 등이 이러하였으니 나는 자연히 돈과는 멀어질 수 밖에 없었다. 이미 무속, 불교, 기독교 등 기성 종교에 관해 대단히 실망을 한 나였기에 나는 내가 접하기 쉬운 위인전을 통해 위인들과 대화를 하며 내 정체성, 자존감 등을 형성해 나가기 시작했다. 만약 우리 집안이 친일파라면 나라도 그 치욕을 만회하고 회복해야만 한다.는 불안, 두려움 등에 기반한 관념이 어린 내게는 있었다. 나에게 있어 위인전 속 위인들은 나에게 그 길을 제시해 주는 스승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까닭에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광역시장이 주는 선한 어린이 표창을 받게 된 것은 다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의문 중 하나가 올해 확연히 풀리게 되었다. 알고 보니 외조부께서는 육이오 참전 국군이셨고, 인제지구 전투에서 사망하셨던 거다. (이 사실은 2015년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당시 외조모님과 외조부님께서는 사실혼 관계로 아직 혼인신고는 마치지 못한 상태였고, 이 상황에서 어머니가 태어나고 얼마 후 6.25가 발발하자 외조부님께서는 국군으로 참전해 얼마후 전투에서 전사하였던 거다. 워낙에 오래 된 일이고 두 분이 혼인신고를 마친 것도 아니고 어머니가 두 분의 딸로 호적에 오른 것도 아니기에 이것에 관해 법에 호소하는데만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존재 및 부존재 확인의 소>, <인지 청구의 소> 등에서 승소하여 어머니께서는 국가유공자 유자녀로 정식 인정받게 되었고 나는 외조부님을 내 인생 최초로 찾게 되었다.
 
 
내가 어린 시절 품었던 의문 하나가 명확히 풀리는 데 30년도 더 넘게 걸렸다. 어머니께서도 근 70년 만에 당신 아버지의 생사, 및 그 실체 및 사연에 대해 속시원히 아시게 되었다고 한다. 사정이 이러하니, 그 어렸던 내가 당시 나를 지배했던 삶이 던져준 수수께끼를 어찌 속시원히 풀 수 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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