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공동 번역 성경에 도전하다.] 7. 계시의 발동 조건과 가상 현실
게시물ID : phil_1567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문명탐구자
추천 : 1
조회수 : 332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7/08/10 11:05:18
옵션
  • 창작글
  • 외부펌금지
계시의 발동 조건과 가상 현실  
 
 
인류의 역사에서 그 혹은 그녀가 <있는 그대로> 중에서 <세상에 물들지 않은 갓난 아이의 시야>로 그 무엇과 조우하는 그 자체를 <깨달음>, <발견>, <계시>라고 한다. <깨달음>, <발견>, <계시>에 대한 여러분의 전체적인 시야 확보 및 전반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이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는 실로 중요한 개념인 <있는 그대로>, <세상에 물들지 않은 갓난 아이의 시야>에 관해 잠깐 언급하고자 한다.
 
 
<있는 그대로>는  우주, 지구, 인간 등 그대로의 본질과 현상을 모두 아우르는 실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것은 그저 우주니 자연이니 삼라만상이니 세계니 할 때의 이 전부를 그 자체로 가리키는 한낱 말에 불과하다. <있는 그대로> 라는 말 자체가 <깨달음, 발견, 계시>라는 말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그 무엇이다. <있는 그대로> 중 그 무엇과 개인 차원에서든 인류 차원에서든 조우했을 때 그것을 보통 <깨달음>, <계시>, <발견>이라 이름 부른다.
 
 
물론, 인간의 인식과 경험 체계로는 이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그대로 인식하고 경험한다는 것도 결코 쉽지는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기존 문명이나 사회에 물들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존 문명이나 사회에 이미 물들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당대 문명, 당대 진리관, 당대 세계관, 상식, 법과 도덕 등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실존하는 현실 그 자체이기에 그저 받아들이면 될 뿐이지, 애초에 이것에 관해 진지하게 고뇌하고 사유, 철학할 그 어떤 까닭도 필요도 없다. 
 
 
부모(기존 질서 즉 당대의 법과 제도, 문명, 국가 등을 포괄적으로 상징하는 말)에 반항하는 아이가 생존하기 쉬울까? 아니면 부모에게 순종하는 아이가 생존하기 쉬울까? 그렇다고 어린 아이가 태어나자 마자 독자적인 제3의 길을 능히 선택할 수 있을까?
 
 
기존 질서를 상징하는 부모에게 저항하거나 반항 및 대항하는  아이는 생존 자체도 담보할 수 없다. 속된 말로 얼마든지 살해 당할 수도 있고 유기될 수도 있으며 모진 학대에 처할 수도 있는 게 현실이다. 이렇게 기존 상식, 법, 도덕, 관습, 시스템 등을 따르지 않으면 인간은 생존하기 조차 어렵다. 기존 시스템에 반항하고 저항하면 우선 감옥에 가기가 쉬워진다. 또, 권력자에 밉 보이면 살해 당하거나 온갖 불이익 등에 처하기가 쉬워진다. 인류 문명은 이러한 통제를 통해 질서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발달해 왔다. 그래서 인간은 그 자신의 생존을 확보하기 위한 선택들을 통해 결국 그 시대 그 문명 그 인식과 경험의 체계에 이미 물든 존재이다. 이렇게 우리 모두는 어떤 우물 안에서 그것이 천하의 모든 것인줄 아는 개구리로 자라났다.
 
 
헌데, 이 우물과 이 우물 안에서 바라본 천하가 정말 세계의 전부일까? 우리는 먼저 우리가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식을 통해서든 경험을 통해서든 타인의 지식과 정보 등을 통해서든 먼저 눈 떠야만 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우물 밖으로 나가 더 큰 세계가 있음을 직접 체험하고 검증함을 통해 확연히 깨우치는 것이 필요하다. 이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된다. 이때의 개구리는 우물 안에서 보고 듣고 느껴지는 세계가 전부인 줄로만 철석같이 믿던 과거의 그 개구리가 아니다. 이것을 흔히 개인적 차원의 인식적 깨달음 내지 인식의 확장이라고 한다. 즉 이는 일종의 삶의 발견이다. 이것은 조건과 상황 등이 충족되기만 한다면 그 누구라도 체험할 수 있다. 
 
 
그 개구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우물 안에 있었을 때 나는 내 인식과 경험이 전부인 줄 알았다. 그런데 우물 밖에는 거대하고도 거대한 세상이 끝모르게 펼쳐져 있었다. 나는 그제야 천하가 얼마나 넓은 지 실감할 수 있었고 내가 얼마나 무지한지 절감하게 되었다.>
 
 
<세상에 물들지 않은 발가벗은 갓난 아이의 시야>란 일종의 비유로 <세상을 속속들이 알고도 자기가 익히 잘 아는 세상에 관한 지식, 경험, 정보 등이 절대적으로 고정된 그 무엇이 아닌 셀 수 없이 많이 존재하는 그저 한 시선이요 그저 한 인식이요 그저 한 경험일 뿐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열려 있고 깨어 있는 삶의 자세, 시야, 세계관 등을 포괄하여 가리키는 말이다. 자신이 색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고 있을 수도 있음을 이미 깨달은 자의 시야,  절대적이며 상대적인 세계 및 삶의 다양성에 이미 눈 뜬 자의 시야 등을 가리키는 말이다.
 
자기 자신이 색안경을 쓰고 있는 줄도 모르는 자인가? 아니면 자신이 색안경을 쓰고 있는 줄은 아는 자인가? 자신이 색안경을 쓰고 있는 줄도 뼈저리게 자각하였고 그것이 그저 한 생각이요 한 시야에 불과할 수 있음을 삶으로 받아들인 자인가? 그것을 정말 삶 가운데 실천해 나가는 자인가? 등등 이것에 관해서는 <깨달음>과 마찬가지로 매우 심도 깊은 논의가 가능한 영역이다. 또 과학, 발명, 기술, 철학 등의 발전과 그 분야의 개척자 및 선구자의 삶과 맞물려 새로운 발견, 깨달음이 인류 세계에 발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때의 <발가벗은 갓난 아이의 시야>란 과학, 발명, 기술, 철학 등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포함하는 그 선구자 및 개척자 개인의 활짝 열린 삶의 자세 및 시야를 의미할 수 있다.>
 
한 인간의 본성을 알아내는 방법에는 그 무엇이 있을까?
 
 
 
술에 잔뜩 취하게 해서 본성을 드러나게 한다든지, 시비를 붙여 화를 내는 모습을 드러나게 한다든지, 그 누구라도 혹할만한 외모와 몸매를 지닌 이성으로 하여금 유혹케 하여 그 진면목을 드러나게 한다든지, 부귀영화나 명예, 명성, 거대한 공포와 불안, 불명예, 비난 등을 잔뜩 안겨주고는 그 참된 인성이 드러나게 한다든지 칭찬을 해서 우쭐해지게 한 후 자아도취, 과대 망상 등에 빠진 모습을 발견한다든지 하는 방법을 인류는 지난 역사를 통해 활용해 오고 있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나열되는 정도가 인류 중 그 누구라도  사는 동안 한번쯤은 체험할 수 있는 가벼운 정도의 가상 현실이다. 우리는 흔히 뭔가에 확 씌인 것 같다.는 표현을 쓴다. 바로 그때가 가상현실이 발동하는 때이다.)
 

그렇다면, 예언자들은 계시를 어떻게 발동시켜 왔는가? 예언자들이 계시를 발동시켜온 방법에는 그 어떤 것들이 있는가?
 
 
 
인류 역사에서 종교인, 수행자, 구도자, 철학자, 명상가 들은 대개 단식이나 기도 등을 통해 진리와의 소통, 환상 세계(가상 현실), 자기 진면목 등의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경험해 오고 있다. 이 중에서도 생사의 위협이 늘 현존하는 척박하고 황량한 광야에서의 기도는 특히 각광받아온 방법으로 광야라는 공간 자체가 <계시>가 잘 발동하는 환경이다. 또 지역이나 국가, 종교나 조직 등에 따라서는 환상, 환각, 환시 등을 불러일으키는 특수한 약초, 마약 등을 활용해 집단무의식 등을 발현케 하는 경우도 있다. 또, 전쟁, 고문, 억울한 감옥살이, 테러, 천재지변 등과 조우해 절체절명의 순간을 겪고 그 어떤 경이, 공포, 두려움, 의혹, 혼돈 등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계시>를 경험한 이들도 있다. 가장 보편적으로는 한 주제나 한 문제에 관해 깊고도 깊게 넓게도 넓게 농밀하고도 농밀하게 천착하고 또 천착하여 자기란 알을 깨칠만큼 충분하고도 충분한 임계치까지 도달하는 방법이 있다. 이것은 인류 역사상 존재해 왔던 거의 모든 분야의 선구자, 개척자들이 즐겨 활용한 방법이다. 에디슨이 계란을 품고 병아리가 되기까지 지켜본 것과 같이, 인류의 많은 예언자들은 생각의 씨앗 한 톨을 자기 삶에 소중히 받아들여 이를 삶을 통해 품고 또 품었다. 이 생각의 씨앗은 그 주인과 함께 수 많은 인식과 경험을  통해 무럭무럭 자라나게 된다. 이렇게 고도로 숙성된 철학과 사유 과정을 통해 그 씨앗이 발아하고 자라나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 것이 대개 예언자들의 삶에서 일어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꽃이 피는 것을 <계시, 발견, 깨달음>이라 이름 부른다.
 
 
이외에도 주로 계시가 발동하기 좋은 조건이 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뇌혹사, 생사를 가늠할 정도로 중대한 선택의 갈림길에 처한 상황이 지속됨,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심신 학대, 간질병과 정신분열증 등이 주로 불러일으키는 <가상 현실>이다.  인류 역사에서 토마스 아퀴나스, 바울, 마호메트, 석가, 존 내시 등은 <가상 현실> 관련 일화를 남겼다. 바울, 토마스 아퀴나스, 존 내시, 마호메트, 석가는 지나친 뇌혹사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그리고 석가, 존 내시, 토마스 아퀴나스, 바울, 마호메트는 중대한 생사의 갈림길에 처한 적이 있거나 그러할 거라 충분히 예견된다는 점에서 또 공통점을 갖는다.
 
 
 이 과정에서 이들이 가진 공통점을 알게 된다. 이들은 저마다 태어난 시대의 한계를 깨닫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고뇌하다 새로운 길을 열어간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상 현실을 체험했거나 체험했다고 믿어지거나 관련 일화를 남긴 인물들이다.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과도한 뇌 사용(뇌 혹사),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사건 발생(단식, 살해 위협, 적대 세력의 테러 내지 그럴 거라는 확신, 생사를 결정지을 정도로 중대한 갈림길에 처하게 됨, 진리라 믿어 의심치 않던 법칙, 원리 등에 대한 도저히 뿌리칠 수 없는 의혹을 통해 내면을 지탱해주는 자존감, 정체성 등에 큰 혼란을 겪음 등) 등은 가상 현실을 발현시키는 중대한 한 조건이 된다.
 
 
보통, 사람들은 이 정도까지 자기를 학대하지 않는다. 이는 시대의 고뇌인들 특유의 뇌 활용 습관으로 보여진다. 어떤 한 주제에 꽂히면 식음을 전폐하고 생사를 도외시하며 그 궁극적 진리에 도달하려는 성질과 고도의 집중이야 말로 천재가 역사적 발견을 하기 쉬운 동시 마찬가지로 단명하기도 쉬운 원인 중 하나로 보여진다. 생사를 도외시 할 정도의 초집중, 진리 탐구 및 발견에 집착하는 성질 등은 시대의 고뇌인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공통 요소 중 하나다. (바로 이 기준에서 살펴보면, 놀지 않고 공부만 하면 바보가 된다.는 격언도 이 세상에 괜히 나온 것은 아님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워렌 버핏도 가정사를 통해 진리에 관한 큰 혼돈과 정서적 혼란을 겪은 것은 사실이나 일찌감치 불가지론을 선택해 숫자, 돈, 주식 투자 등에 전념하였고 수잔 버핏이라는 성숙한 인격의 소유자를 배우자로 하여 모난 부분이 상당 부분 상쇄되었으므로 그 고뇌가 인류의 영역까지는 나아가지 못하였다고 보고 논외로 하였다.
 
 
이런 인류의 선구자들이 미지의 세계(원리, 법칙, 이치, 어떤 가능성 등을 기초로 하는 새로운 길)를 발견하고 이를 개척해 나가야만 하기에  이들이 걸어가는 그 길이 필연적으로 당대의 주류 세계와는 극명하게 대비될 수 밖에 없다는 의미에서 이들은 <가상 현실>과 조우할 수 밖에는 없다. 이때의 가상 현실이란 <아직은 도래하지 않았으나 먼 미래에 인류가 도달할 가능성이 있는 세계나 이미 존재하기는 하나 아직은 인류사에 큰 길이 아닌 좁은 길이나 세계>를 말함이며, 이 과정에는 정신 분열이라고 말하는 정신 장애도 환각, 환청, 환시 등도 얼마든지 그 개인이나 집단에 찾아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다수의 인류 중에는 남이 쓴 책, 남이 걸어갔다고 믿어지는 길, 진리를 조직했다고 믿어지는 단체나 종교, 학파, 유명인, 역사상 위인, 부모나 교사 등 주입하는 철학, 세계관, 신념, 종교에 관한 지식과 정보 등을 믿고 자신이 잘 알지도 못하는 세계에 진입해 <가상 현실>에 빠져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처지에 처하기도 하는데, 이는 인류가 처한 적나라한 현실 그 자체다. 인류 중 극소수는 이렇게 새로운 길을 걸어가기에 <가상 현실>과 조우하기도 하고, 인류의 절대 다수 증 그 누군가는 남이 걸어간 길을 무작정 따라가다 자기도 모르게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처치 곤란한 상황 -환각, 환시, 환청, 정신 분열 등 정신 장애)에 처하기도 한다.
 
 
이야기를 더 진행하기 전에 여러분께서는 본인이 <뷰티풀 마인드>라는 영화 속 주인공이라면 어떨지 한번 생각해면 좋겠다.

존 내시의 성격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자존심 드높고 상처받기 쉬운 유리로 만들어진 사람을 상상하시면 된다. 너무도 섬세하고도 섬세하나 반대로 그러하기에 깨지기 쉬운 그런 사람을 상상해 보면 좋겠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수학자라는 타이틀은 못 따낼 지언정 당대 수학자 중의 최고, 내지 동년배 중에서는 단연코 돋보이는 최고이기를 내심 바라는 그런 기준이 하늘 끝에 닿아 있는 인물을 떠올리면 된다. 하나에 꽂히면 식음을 전폐하고 생사를 도외시 할 정도로 무섭도록 초집중 하는 습관, 타인 과의 교류 거의 없이 연구 등에 몰두함. 인생의 다양한 경험 거의 전무. 그 분야 그 주제 밖에는 모르는 외곬수  중에 외곬수 정도가 존 내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내용이다.  존 내시는 어떠한 기준에서는 <푸앙카레의 추측>을 인류 최초로 증명해 낸 <은둔의 수학자> 그레고리 페렐만과도 유사한 성격과 심리와 행동 패턴을 갖고 있다고 보면 된다.(한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다는 게 아닌 외곬수 중에 외곬수인 천재라는 점에서 유사하다는 것이다.)
 
<존 내시가 겪은 가상 현실의 경우>

위  질문들이 확 와닿으려면 상상력과 연기력이 좀 필요하다. 여러분은 존 내시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뷰티풀 마인드>를 본 적이 있는가? 여러분이 존 내시의 입장이라면 어땠을까? 여러분이 만약 존 내시를 관찰하고 검증하는 입장이라면 어땠을까? 여러분이 존 내시를 정말 아끼는 가족이나 친구라면 어땠을까? 여러분이 존 내시가 <리만 가설>등 인류의 난제를 풀어주기를 학수고대하는 어떤 선견 지명 있는 당대의 석학이라면 어땠을까? 이렇게 다양한 기준에서 아주 구체적으로 접근하면 이해가 편하리라 생각한다.

영화에서는 존 내시는 자신이 사는 현실이 가상 현실(정신 장애, 정신 분열, 무의식이 발현 된 세계 등등으로 불릴 수 있는 바로 그 세계)라는 것을 인지하는데만 수십년이 걸리는 것으로 나온다. 이 점에 대해서 여러분은 대체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당대 지성인 존 내시가 그 사실을 인지하는데만 수십년이 걸렸다.는 사실에 대한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다. 즉, 현실의 자신은 늙었는데 그들은 전혀 늙지 않음을 보고서야 겨우 그들이 가공의 인물임을 알 수 있다면(벗어난 것도 아니고 벗어날 실마리를 얻는 데 수십년이 걸린 셈이다.) 존 내시와 같은 이들은 과연 만족할 수 있을까? 이 주제는 아주 아주 흥미롭다. 인간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인식론, 존재론, 능력, 오감, 선택과 책임, 삶과 죽음, 생명작용, 물질작용, 정신작용 등이 최고도로 발현되는 현실 등등의 영역)들이 총체적으로 복잡계를 이루는 분야라 생각한다. 그래서 그만큼 해법 또한 복잡할 수 밖에는 없다고 생각한다.
 
 
전체 퍼즐조각(충분한 조건) 중 단순히 극히 일부를 아는 것과 그 현실에서 실제로 그 작디 작은 앎을 활용해 전체 퍼즐 전체를 맞춰나가는 것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큰 차이가 발생한다. 존 내시처럼 똑똑한 인물 조차도 그 세계에서는 적어도 수십년 세월을 보낸 후에야 겨우 겨우 벗어날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다. 우리는 보이는 것, 느껴지는 것, 들려오는 것, 만져지는 것 등을 정말 실재한다고 확인하거나 믿을 수 있을까? 나는 이것 부터 의문이 든다.
 
 
가상 현실 세계(물론 그 당사자에게는 현실 그 자체로 느껴지고 받아들여진다. 현실 세계와 비교하기 위해 다만 편의상 이렇게 이름 부르는 것이다.)에서는 인간이 상상하는 그 모든 것이 실제로 가능하다. 실제 사례와 현실에서는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느껴지는 것 조차 끝 없이 의심하고 또 의심해야만 한다. 자기 자신 조차 철저히 의심하고 또 의심해야 한다. 숨 쉬는 것도 끝 없이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자신 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이 이해가 되는가?

한걸음 내딛는 것도 삶과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문 하나 여는 것에도 생사가 오간다. 이것이 이해가 진정 이해가 되는가? 진정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의심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정립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갖춘 자만이 아주 실낱같은 단서를 포착한다고 생각한다. 정말 놀라운 것은 이것이 탈출지점이 아니고 그저 본격적인 시작점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우주 전체 지구 전체가 전쟁터가 되어버린 세계를 상상해 보기 바란다. 적군과 아군을 구분할 수 없는 공포와 두려움의 전장을 상상해 보기 바란다. 그 어디에 지뢰가 묻혀 있는지, 어디에 적군 스나이퍼가 은닉해 있는지 우리는 전혀 알 수 없다. 가족이 나에게 독을 먹일지 나는 감히 단정할 수 없다. 맞다, 틀리다.나는 감히 단정할 수도 규정할 수도 없다. 사랑하는 배우자나 연인 조차 섣불리 믿을 수 없다. 내 욕구와 감각, 생각, 느낌, 무의식 조차도 섣불리 믿을 수 없고 또, 그리해서도 아니 된다. 이것이 가상 현실 세계의 어려움이다. 게다가 인체는 사실이든 가상 현실이든 간에 그것을 실제로 보고 듣고 느끼게 생겨 먹었기에 그 공포, 두려움, 불안, 생명의 위협은 고스란히 그 개체에게 영향을 끼친다. 한계치 이상의 과도한 스트레스는  얼마든지 생명을 순식간에 앗아갈 수 있다. 하나의 생각, 하나의 선택이 그 개체의 생명을 얼마든지 앗아갈 수 있다. 이것이 진정한 가상 현실 세계의 공포와 두려움이다.
 
 
이것이 이해가 되는가? 보이는 그대로를 믿자니 나는 내 손에 수 없이 피를 묻히는 끔찍한 살인자가 될 수 밖에는 없고, 저항하지 않자니 과도한 공포와 불안, 의혹 등이 내 목숨을 앗아가기에 충분한 스트레스를 불러내다. 이것이 이해가 되는가?

존 내시가 멍청하고 바보여서 수십년간 가상 현실 세계에 갖혀 있었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단순한 상상 그 이상의 거대한 공포, 두려움, 불안, 생명의 위협, 의혹과 의심 등이 실제로 존재하기에 그 무엇하나 섣불리 시도해 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나는 본다. 즉 이 거대한 공포, 불안, 생명의 위협, 의혹, 혼돈이 전제되지 않은 논의는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다는 것이다. 더욱 더 놀라운 사실은 이 모든 것이 그 개체가 최고도로 끔찍한 공포와 불안, 두려움, 의혹을 불러일으키게끔 스스로 설정되어졌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판도라의 상자를 열 때의 극심한 혼란과 두려움, 공포, 불안 또한 더해진다.

 <그 무엇하나 안심하고 선택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끔찍한 상황>이야 말로 가상 현실 세계를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이것을 이해하고 <가상 현실> 세계를 다시 살펴보면 전혀 새로운 시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불교에서 대체 왜 부처를 일컬어 자기를 이겨낸 위대한 승리자. 라고 하는지도 진심으로 공감하게 될 것이다. 나는 불교신자가 아니다. 나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습관이 있는 자요, 그저 진리와 깨달음의 길을 실제로 걸어온 자다. 헌데 그러한 자의 기준에서도 <아! 이런 의미에서 부처가 실제로 존재했고 실제로 그러한 삶을 살았으며 마왕 파순 이야기와 같은 가상 현실을 실제로 겪고도 이를 극복했다면, 바로 이 기준에서는 능히 <자기를 이겨낸  위대한 승리자. >라고도 볼 수 있겠구나. 라는 공감에 이르게 한다. 인류의 절대 다수는 존 내시의 경우에 처하거나 석가, 마호메트의 경우에 처하면 거의 거의 거의 평생 동안 그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가상 현실 세계의  현실에서의 발현(무의식의 발현)은 뛰어난 게임 개발자나 프로그래머, 디자이너, 감독 등이 총동원 되어 그 개체 인간을 <가상 현실>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가는 것과 같다. 뛰어난 몰입도, 흥미 유발, 그 끝이 없는 거대하고도 거대한 세계관, 실제 보다 더 현실 같은 환경, 나와 동일시 되는 캐릭터의 존재 등등... 이 가상 현실 발현의 주체가 유전자 단위인지, 아니면 뇌 차원인지, 물질 차원인지, 생리적 작용인 것인지, 비밀 스런 정신작용인 것인지 아니면 열거된 이 모든 것들이 복합 작용하는 것인지 인류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우주, 자연, 문명 등이 그 개체와 만나 빚어내는 그 무엇들 일체가 그 개체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만일, 그 누군가가 존 내시가 경험한 것 같은 엄격한 의미에서의 가상현실 세계를 벗어날 수 있다면 그 혹은 그녀는 사는 동안 품었던 그 무엇 혹은 그 무엇들이 하나로 꿰뚫어지는 체험과 동시 새로운 지평을 스스로 열기에 충분하고도 충분하다.고 나는 본다. 인류 사회에서는 이것을 가리켜 깨달음 혹은 발견이라 부른다. 자연세계에서는 가능성의 형태로 이미 존재해왔으나 다만 인류가 아직 진입하지 못한 세계로 그 혹은 그녀가 진입하고, 그 혹은 그녀에 의해 인류가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는 것이 인류 차원의 발견 혹은 깨달음이라고 본다. 나는 이것을 가리켜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던 세계가 존재하는 세계로 편입되었다.>고 말한다. 다만, 나는 여전히 대체 왜 인류에게 이런 비밀의 관문이 존재하는지 알지 못한다. 나는 그저 내 무지와 자연에 대한 경이를 통해 그 어떤 전율을 느낄 뿐이다. 생명 자체에 인류가 아직은 모르는 그 어떤 비밀스러운 작동 원리가 숨어 있는 것인지 조차 나는  감히 단언할 수 없다.
 
 
세상에는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에 비해 상대적인 절대자인  <무의식>, <뇌>, <오감> 생명작용, 정신 작용 등이 복합적으로 발동해 우리 몸과 마음을 그 숙주로 하여 <가상 현실>이 현실에서 발현될 때, 우리는 연구실 내지 실험실 등에서 행해지는 온갖 실험의 대상이 된다. 즉, 우리는 그 자체로 실험용 생쥐가 되며 실험용 인공지능이 된다. 탈출구 없는 미로 속을 영원히 헤매는 실험용 생쥐처럼, 끝 없이 자기 자신과 대결하면서 성능을 진보시켜야만 하는 인공 지능처럼, 우리는 생존을 확보하고 탈출로를 찾아내기 위해 처절하게 길을 모색해야만 한다. <생명은 길을 모색한다.>는 말처럼 우리는 이 <가상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야만 한다. 미로에서 탈출하기에 충분하고도 충분한 조건에 도달하기 전까지, 우리는 결코 이 미로에서 탈출할 수 없다. 이 미로를 탈출하는 과정에서 미로 탈출자에게 가상 현실 탈출자에게 온갖 깨달음, 발견, 계시, 능력의 각성 등이 덤으로 주어지는 것은 어찌보면 지극히 당연한 이치라 생각된다. 이는, 영화 트루먼 쇼에서 그 세계를 탈출한 트루먼이 예전의 바로 그 트루먼이 더는 아닌 것과도 같다.
 
 
<가상 현실>이라는 미로 속에서 탈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컴퓨터 운영 시스템의 지속적인 오류, 충돌, 치명적 바이러스에의 감염, 오작동 등에 의해 하드웨어 자체가 더는 못 쓰게 되는 것 같은 결과를 인류에게도 얼마든지 선물할 수 있다. 벗어난다면 <깨달음>, <발견>, <계시> 등이 복합적으로 그 훈장으로 주어지고, 못 벗어난다면 몸과 마음, 인생까지 얼마든지 망가질 수 있다.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미로를 탈출하면 정신 분야의 영역에서는 인류의 스승이나 지도자가 되고, 미로를 탈출하지 못한다면 정신 병원과 평생 인연을 맺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