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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된 사나이.2.
게시물ID : phil_1578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문명탐구자
추천 : 2
조회수 : 307회
댓글수 : 8개
등록시간 : 2017/09/01 10: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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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내가 신병 교육을 받던 사단 신교대에도 소원수리함이 있었다. 신교대의 모순에 대해 아무도 나서지 않기에 나는 훈련병들을 대상으로 교육병들에 의해 행해지는 폭력과 얼차려 등에 관해 글을 작성하여 함에 넣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때문에 우리는 전체가 얼차려를 받게 되었다. 당시 교육계를 담당하던 병사가 비웃으며 내게 이렇게 말했다.
 
"폭력이나 부당한 얼차려 보다는 차라리 체력 단련을 시켜달라고? 그래, 어디 한번 체력 단련을 힘껏 해봐라."
 
얼차려가 누구 때문에 행해지게 되었는지를 비로소 알게 된 동기생들은 나에 대해 단단이 뿔이 나 있었다. 당시 동기생들의 나에 대한 원성과 원망이 그야 말로 하늘에 닿아 있었다. 몇 몇은 씩씩 거리며 내게 집단 폭력을 가하려는 이들도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평소 내 행실이 나쁘지 않았기에 그간 쌓아온 평판 덕분에 나는 집단 린치를 당하는 위기는 모면할 수 있었다. 다만, 나는 이 사건으로 꼴통, 문제 사병으로 낙인 찍히게 되었다.
 
나는 이 사건으로 군대가 어떤 곳인지 내가 누구를 상대하고 있는지 정신 번쩍 들 정도로 확연히 깨닫게 되었다. 사단 신교대에서 표창을 받고 자대 배치 받은 이후 구타와 절도 사건을 경험한 나는 그 신병처럼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정의는 대체 그 어디에 있는 것이지? 법학도로서 내가 배운 법과 인권은 대체 어디에 존재하는 것이지? 우리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 국방의 의무를 책임지는 전우들이 아닌가? 왜 우리는 서로를 뜯어먹지 못해 이렇게나 안달을 해야만 하는 거지? 폭력과 분노에 쩌든 이 정체불명의 사람들과 집단은 대체 무엇이지? 나는 대체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만 하지? 
 
나는 혼돈 속에서 차라리 자살하고자 했으나 미수에 그쳤고, 중대와 대대가 발칵 뒤집어 졌다. 소원수리함을 활용하는 것 보다야 자살 시도를 하는 것이 내가 속한 사회에 훨씬 더 큰 영향력 끼치고 있었다. 전쟁 영웅이었던 아버지 인맥을 통해 사단 내 한 대대장이 중대로 나를 면담하러 왔고 몇 마디 좋은 말과 함께 돈 몇 만원을 용돈으로 쓰라고 내 손에 쥐어주고는 짚차를 타고 부대를 떠나갔다. 나는 나 스스로의 힘에 의해 그 무엇도 이루지 못하고 그 집단 안에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타인의 도움을 통해서야 겨우 생명과 안전을 확보할 수 있었다. 나의 이런 행동은 특권의식으로 비쳐졌고 여기서도 꼴통이나 문제사병, 고문관 등으로 찍힌 나는 대대 본부로 전출을 명 받게 되었다.
 
전출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내무 반장에 의해 나는 성기를 빨리는 추행? 내지 폭행을 당했다. 나는 저항할 수 없었다. 군대에서 항명죄가 어떻게 다뤄지는 지 전 부대에서 발생한 한 사건을 통해 이미 경험한 바 있기 때문이고 눈 앞에서 당하는 치욕 보다 내게 닥칠 후환이 더 무섭고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 사건 이후 나는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았으나 내 내면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나를 살린 것은 대홍수 사건이었다. 막사가 무너지고 도로가 유실되고 포탄이나 탄약 등이 분실되며 사람이 죽어나가는 현장에서 모두는 복구 작업에 신경을 쓸 수 밖에는 없었고, 그저 몸뚱이를 부지런히 쉬지 않고 놀리니 부대 사람들도 차츰 나를 한 명의 전우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주기 시작했다. 나는 연천 대홍수,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 등 역사를 거치며 어느새 병장이 되었고 부대 창설후 최초로 수여되는 표창을 받는 모범 병사가 되기에 이르렀다.
 
나는 잘 훈련 된 살인병기로 거듭났고 군단 훈련 중 감독관 앞에서 시행되는 분대 시범의 분대장을 담당할 정도로 신용을 얻게 되었다. 나는 타락한 것인가? 아니면 현실에 적응한 것인가? 나는 전투 병기로서 내 능력에 각성한 것인가? 나는 알 수 없게 되었다. 분명한 것은 내가 생존을 선택했다는 사실 뿐이다.
 
폭력과 분노에 노출된 나는 후임병들에게 만큼은 이를 되물림하지 않으려 하였으나, 이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내 동기생들은 나를 포함해 모두 13명이나 되었고 선임병들은 이 기수만 제대로 족치면 부대는 자연히 알아서 잘 돌아가게 된다는 논리로 우리 기수를 이나 쥐 잡듯 잡고자 하였다. 우리는 폭력과 분노에 노출될 만큼 노출되어 있었고 구속과 억압에 이미 악에 받힐대로 받혀있었다.
 
한번은 폭력의 되물림을 우리 기수에서 끝내자고 동기들에게 공공연하게 의사를 표현하였는데
 
"너나 그렇게 해라. 나는 당한게 있어서 고스란히 되갚지 않고는 못 참겠다. 하려거든 너나 네 분대 내에서 해. 나하고는 상관 없는 일이니까."
 
라는 답변이 되돌아 왔다.
 
이 글을 쓰는 나 또한 한 사건에서 후임병의 태도에 분노한 나머지 집단 린치의 가해자가 될 뻔 했고, 경계근무를 선 후 제대로 인수인계를 하지 않은 한 후임병을 내무반에서 주먹으로 폭행한 적도 있었다.
 
최소한 내 분대 안에서 만큼은 폭력과 분노가 되풀이 되는 것을 막고자 후임병들을 좋은 말과 행동으로 대하고자 애를 썼으나 분대 구성원 모두가 내 생각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말처럼 등하불명이라는 말처럼 내가 믿었던 나 보다 4개월 후임 병장에 의해 분대 내에서도 폭력의 되물림이 행사되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나는 그야말로 머리 끝까지 분노하게 되었다. 내가 나에게 덧씌운 <나는 선량한 병사요 선임병이요 관대한 분대장이며 폭력과 분노의 되물림을 최소한 우리 분대 안에서 만큼은 끊은 자>라는 이미지가 산산이 부숴져 버렸기에 나는 정말 머리 꼭지까지 빡 돌게 되었다. 정말 할 수 만 있으면 그 후임 병장을 두드려 패고 싶었었다. 분대장 직책을 내게 양보한 분대 내 동기 두 명의 중재로 폭력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으나, 나도 그 후임 병사도 서로간의 이견을 결코 좁히지는 못하였다. 그의 논리는 내가 선임병들이나 동기생들에게서 늘 들어오던 내용이었다.
 
 
<당한 게 억울하니 나도 똑같이 되갚아주겠다.>
<맺힌 게 있는데 어떻게 나만 참으라고 하십니까? 정말 너무 하십니다.>
 
 
사회에서 먹물깨나 먹었다는 명문대나 대학원 출신의 소위 엘리트 계급의 병사들도 <필요악>이라는 논리로 폭력과 분노의 되물림을 합리화하고 기정사실화 하고 있었다. 그들도 공공의 적으로 찍히는 게 그 무엇 보다 더 두렵고도 두려웠으리라. 명령불복종 등을 원인으로 하는 군 형무소 수감 등의 명백 현존하는 공포(소위 빨간줄 그어지는 공포와 불안)가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구속하고 억압하고 있었다.이 사건으로 나는 다시 한번 꼴통에 고문관,문제사병으로 낙인 찍히게 되었다. 이후로 나는 조용한 병장 말년 생활을 보내고 만기 전역하게 되었다.
 
 
나는 피해자인 동시 가해자였고, 파괴된 자인 동시 파괴하는 자가 되어 있었다.
파괴된 것은 그 신병만이었을까? 광인이 된 것은 정말 그 신병 한 명 뿐이었을까?
 
 
정말 우리 모두는 괜찮은 것일까?
우리를 이렇게 방치한 한국 사회는 정말 괜찮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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