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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등불을 밝히라?
게시물ID : phil_1610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크리톤
추천 : 0
조회수 : 450회
댓글수 : 26개
등록시간 : 2017/11/27 06:3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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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요즘 불경을 읽고 있습니다.

불교가 원래 제 종교가 아니었기 때문에 알고 있는 바가 적었지만.. 
본격적으로 불교를 접한 후에도 불경을 읽는 것보다 수행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올해가 되기 전까지는 숫타니파타나 반야심경 정도만을 읽었을 따름이었습니다. 
(선불교의 조사들의 어록들은 그래도 좀 읽은 편이긴 하군요.)

앞으로도 화엄경이나 천수경과 같은 대승경전은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읽을 생각은 없으나..
불교의 가르침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 초기경전은 힘 닿는대로 꾸준히 읽어볼 요랑입니다. 

읽으면서 배우고 깨치는 점이 적잖습니다.
그게 그저 생각으로 그치는게 아니라, 바른 앎이 되어 저를 바꾸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바입니다. 

각설하고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는 어떤 분이 스스로 등불을 밝히라는 부처님의 유언을 언급했기 때문이며, 
둘째로는 불교의 가르침에 대해서 스스로 정리하는 차원에서 기초적인 내용을 정리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스스로 등불을 밝히라는 가르침은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너 스스로를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으라"는 말입니다. 

이는 아함경의 대반열반경에서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기 전에 남게 되는 제자들을 위해서 남기신 말로
부처님이 쓰신 언어인 팔리어로는 atta-dīpa, dhamma dīpa” 라고 합니다. 

'dipa'는 등불 만이 아니라 섬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동북아의 대승불교에서는 자등명 법등명으로 옮기고 있지만, 
상좌부불교에서는 dipa를 섬으로 읽어.."자주 법주(自洲 法洲)"라 합니다. 
"너 자신을 섬(의지처)로 삼고, 법을 섬으로 삼으라"는 말입니다. 

해석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지긴 하겠지만...
자기 자신과 법(Dharma)에 의지하여 깨달음의 길을 가야한다는 말이겠지요. 

이 말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등명만 뚝 떼어와서... 자기 자신에 의지해서 깨달음 혹은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해석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법 없이는 나 하나만으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르마(Dharma)라고 불리는 법은.. 이 세상의 실상 혹은 진리로 저는 해석합니다. 

*제 의견 중에 잘못된 점이 있다면 언제든지 지적해주시길 바랍니다. 

이 진리에 대해서 명철하게 본 스승이 있고, 그 스승이 남긴 가르침이 바로 법입니다. 
꼭 스승이... 가르침이 없다고 하더라도 본인 스스로 그 법을 본다면 그게 굳이 부처님의 가르침일 필요는 없겠으나...
그게 너무나도 힘들기에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법(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깨달음을 얻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본인이 세상을 떠나는 마당에... 본인에게 의지하라 하실 수 없으니...
본인이 남기고 가는... 숨김없이 안팎으로 원만하게 드러낸 가르침에 의지하라는 말입니다. 

부처님이 있으시고, 그 가르침을 받을 제자들이 있다면... 부처님은 가르침을 주셨겠지요...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기 전에 부처님을 가르쳤던 스승들에게... 깨달음을 얻자마자 가셨지만...
그 두 명의 스승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고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만 있었다면 그들은 바로 깨달음을 얻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이처럼 부처님이 계시다면 그 분께 의지하고 가르침을 들어 정진하여 깨달음에 다다르겠으나..
그럴 수 없으니 제자들 자기자신 스스로,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정진하라는 말이지요. 

이 가르침이 왜 중요하느냐? 
그것은 세상은 제행무상이다... 변하지 않는 확고부동한 자아란 없다...
고집멸도가 있다.. 팔정도가 있다... 라는 불교의 가르침이 듣기에는 쉬워보이지만...
실상 그것을 제대로 보는 것은 미묘하고 매우 어려워서...
부처님의 가르침없이는 홀로 거기에 다다라 보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사성제와 팔정도는 단순한 철학이 아니라, 깨달음을 위해 수행할 때 아주 중요한 모듈입니다. 
항상 염두에 두고 그에 따라 수행을 한다면 깨달음에 다다를 수 있는... 
유일한 모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단순히 종교적인 차원이 아니라 철학적인 차원에서도 생각해볼 필요는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잘못된 방향으로 길을 출발했는데, 옳은 도착지에 도착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방향으로 출발해도 옳은 곳에 도착할 수 있다고 말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조차 그 중간에 그 어느 곳에선가 옳은 방향으로 길을 틀었기 때문이지요. 

사성제와 팔정도는 그 길을 찾아가는 나침반이며, 지도이며, 네비게이션입니다. 


2. 사성제 

'고통이 있음'을 보고
'고통이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지'를 보고
'고통의 멸함이 있음'을 보고
'고통을 멸하는 것에 이르는 길 혹은 도닦음'이 있음을 보는 것이...

바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라는 사성제입니다. 

고통이 왜 있는가? 고통은 왜 일어나는가? 
이에 대한 답이 사성제 중에 ... 고(苦)성제와 집(集)성제입니다. 

인간의 본질적인 고통은 병듦과 늙음, 그리고 죽음이 있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인간에게는 많은 종류의 고통들이 있지만... 
죽음과 죽음으로 이르는 늙음과 병듦 앞에서는 사소한 고통일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늙음과 죽음의 조건은 바로 태어남입니다. 
태어나지 않았는데 늙고 죽을 수는 없습니다. 

왜 태어나게 되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부처님의 답은..
존재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 여기서부터는 이해가 어려워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의 진정한 깨달음은 이성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단순한 철학이 아니라 수행인 것입니다. 
이 심오한 고통의 원인과 일어남, 멸함과 멸할의 이르는 길을 보기 위해서 정신의 수준을 높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존재는 무엇을 조건으로 생겨나는가? 
취착(취하고 집착함)을 조건으로 일어납니다. 
그리고 취착은 갈애(갈구하고 원하는 것)를 조건으로 일어납니다.

갈애는 느낌(受)을 통해서 일어나고...
느낌은 감각접촉으로 인해 일어나며...
감각접촉은 정신과 물질이 있음으로 가능합니다. 

정신과 물질은 알음알이(識: 알 식)을 조건으로 있으며, 
또한 알음알이는 정신과 물질이 있음으로하여 있습니다. 

결국 알음알이가 있고, 정신과 물질이 있고, 이 둘이 서로 의지하여 존재합니다.
이게 존재와 태어남과 병듦과 늙음의 원인이며... 
고통의 원인이 됩니다. 

요약하면... 고통이 있음을 명확히 보면... 그 고통이 왜 일어나는가를 보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프로세스가 시작되는 제일 처음 지점은 고통에 대한 바른 이해와 바라봄입니다. 
그로 인해 고통이 일어나는 프로세스에 대한 이해로서 집착에 대한 바른 앎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온다면... 절반은 온 것입니다. 
그럼 고통의 멸함과 고통의 멸함에 이르는 길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고통의 멸함은 아주 쉽게 설명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었고 존재와 알음알이가 있음으로 해서 생기는 모든 고통을 끊어버리셨다"라는 역사적 사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를 객관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불교가 철학 너머에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부처님이 내가 고통을 멸했으니 이제 그 고통의 멸함에 이르는 길을 알려주겠다... 
바로 그것이 팔정도입니다. 


3. 팔정도 

팔정도는 모두 8개의 모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는 한국 선불교에서 가르치는 계정혜(戒定慧: 계율과 선정과 지혜) 삼학으로 압축되어서 제시되기도 합니다. 
팔정도의 구조는 순환구조이며, 이를 계정혜 삼학으로 묶어서 제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지혜()

정견(正見): 바르게 보기 → 정사유(正思惟) : 바르게 생각하기 

2) 계율(戒)

→ 정어(正語): 바르게 말하기 → 정업(正業): 바르게 행동하기 → 정명(正命): 바르게 생활하기 

3) 선정(
定)

→ 정정진(正精進): 바르게 정진하기 → 정념(正念): 바르게 깨어 있기  정정(正定): 바르게 삼매(집중)하기 


(반복) →
정견(正見): 바르게 보기


왜 계정혜 삼학의 순서인데... 지혜가 가장 앞에 나와 있는가 의아하실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른 지혜없이는 바른 법을 먼저 받아들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바른 법을 알아야.. 우선 그에 따라 자신의 언행을 맞추고, 바르게 수행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 지혜는 팔정도의 과정을 완전히 거쳐서 얻어지는 깨달음의 지혜와는 다르지만... 
그런 지혜로 거듭날 수 있는 씨앗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제 경험으로는 단순히 한 번 슥... 거치는 프로세스가 아니라...
마지막 깨달음을 이르기 전까지는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프로세스이며... 
서로가 긴밀하게 연관이 되어.. 상승작용을 일으키기도 하고..
하나가 무너지면 전체가 무너져버리는 부의 시너지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팔정도를 좀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계정혜로 단순화시켜서 설명하면 좋을 것 같고... 
그 예로서 김연아와 같은 아주 우수한 운동선수에 비유해서 얘기해볼 수 있겠습니다. 


일단 김연아라는 아주 좋은 재목을 가진 운동선수가 있습니다. 
그 선수가 잘 되기 위해서는..

- 지혜: 우선.. 자기가 어떤 운동에 맞는지 느낌으로든 이성으로든 경험하면서 알아내고..
그 분야에 좋은 스승님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이 좋은 스승인지 알아야 합니다. 

- 계율: 그리고 나서는 더 나은 폼과 역량을 갖기 위해서 바른 자세로 바르게 동작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최선의 상태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생활을 그 목표에 맞게 바르게 조직해서 생활해야 합니다. 

이렇게 좋은 안목과 바른 방법의 실행이 있다하여도.. 
제대로 된 훈련을 거치지 않는다면 최정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 선정: 아무리 김연아라도... 바른 방법을 기반으로 끊임없이 훈련해야 하고...
그 훈련이 최고의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그 매 순간순간마다 자신의 동작들을 스스로 인지하고...
자신의 능력을 끌어내기 위해서 최선의 집중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 결국 처음에 아무것도 잘 모르던 여자아이는...
피겨스케이팅이 뭔지.. 척 보면 딱 알고... 군더더기가 전혀 없는...
누구보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동작을 할 줄 알고.. 이를 가르칠 수도 있는...
피겨스케이팅의 여왕이.. 마스터가 되는 것입니다. 


대충 어떤 프로세스인지 감이 오실겁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반문이 나올 수도 있겠습니다. 

"그럼 김연아처럼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들만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것이냐..?"라는 질문이겠지요. 

물론 개개인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차이는 있겠습니다. 
실제로도 어떤 스님은 단박에 스승을 만나자마자 깨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죽을때까지 사력을 다해 수행해보아도... 깨달음의 근처도 못 가고 죽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렇지만 깨달음에 이를 것인가 말 것인가는...
이 사성제와 팔정도를 제대로 이해하고... 바른 수행을 시작하고 나서야 논해야 하는 것이고.. 
이러한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남이 말하면 들어서 대답할 줄 알고... 밥먹고 싶으면 밥먹을 줄 알고..
똥마려우면 똥쌀 줄 알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선사들은 말합니다. 

이게 가능한 사람들은 이미 김연아급의 재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사실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것입니다. 
동물로 태어나거나 벌레로 태어나면 하고 싶어도 못하는게 생각이고, 불교수행이니까요. 

어차피 태어났으니 죽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끊임없는 고통을 겪어야 하고...
그러니 고통을 어쨌든 감소시켜나가는 좋은 프로세스이자 행동의 모듈로서 불교수행은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또 이게 여기서 끝이면 좋겠는데... 부처님은 죽어도 또 과보에 따라 태어나기를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온갖 고통을 무한대로 겪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고..
꼭 부처님이 아니더라도... 예수님, 모하메드 등등을 여러 성인들이 지옥이나 천국은 있다고 하고...
거기 갈려고 해도... 집착이나 욕심은 버리고... 지혜와 자비를 갖춰야 하는 것이니... 
꼭 불교가 아니라도 불교의 수행법은 참고를 할만한 필요성이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천주교에서도 수도원의 수사와 수녀님들은...
바른 생활을 위해서 내부의 규칙을 지키고.. 
평상시 생활에서도 항상 깨어있음으로 침잠하여 고요한 마음 상태로 지내려 노력하고...
경건한 마음을 갖고 기도를 함으로서 항상 지혜와 사랑을 구하고 계십니다. 

종교마다 가르침은 달라도... 비슷한 모듈이 분명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이게 단순히 종교 뿐만이 아니라... 
공부를 하는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다른 분야는 잘 모르겠습니다..) 

바르게 보고, 생각하고...
그를 바탕으로 말하고, 배우고.. 가설과 이론을 만들고 이용하고.. 검증하고... 이를 바탕으로 현실에 적용하고.. 
그러한 공부와 학문활동을 잘 하기 위해서 모든 생활방식을 최적화하고... 
끊임없이 연구하고.. 이 과정에서 지속적인 자기성찰과 몰입과 집중을 잘 해야... 
결국 쓸만한 학자가 될 수 있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언급한 내용과 연관하여.. 제 개인적인 경험과 생각을 말하자면...
사성제와 팔정도는 정신 발전을 위해서 매우 합리적이고, 뛰어난 정신적 모듈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집착하고 고통이 일어나는 상황을 캐치하기 위해서는...
이것이 고통이다라고 보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고..
그 고통의 뿌리를 가능한 깊고 근본적이고 명확하게 보아야...
그에 대한 적합한 대응이 가능한 것인데...
그러한 대응방법으로서의 수행방법인 팔정도가 있고...
그 수행의 결과로서 얻어진 깨달음에 대한 사례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불교는 인간 본질에 대해서 과학이 아직 답해주지 못하고 데려다주지 못하는 곳까지 
인간의 정신을 이끄는 뗏목으로서 아주 훌륭하게 사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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