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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에 대하여
게시물ID : phil_1632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fishCutlet
추천 : 2
조회수 : 792회
댓글수 : 18개
등록시간 : 2018/02/23 02:18:11
1.
두 사람이 있다.

A는 너무나 입맛이 까다로워서 그 입맛을 충족시키려면 상당한 수준의 요리가 아니면 안된다.
그는 어떤 요리에서도 티끌만한 오점이라도 분별해 낼 수 있기에 절대적인 미각을 가지고 있다고 불린다.

B는 딱히 입맛이랄게 없다할 정도로 잘 먹는다.
떡볶이든 라면이든, 밥에 간장과 참기름만 뿌려도 진수성찬이라도 먹는 듯 맛있게 먹는다.

두사람 중 누가 미식가일까?
일반적으로 미식가라하면 A 같은 사람을 떠올리게 된다.
가장 까다로운 기준을 가진 A가 추천하는 음식이라면, 그 누구의 까다로운 입맛도 만족시킬 수 있다.

반면 '미식'이라는 행위, 즉 맛을 즐긴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A는 별로 행복하진 않다.
오히려, 무엇이든 맛있게 먹을 수 있는 B야 말로 미식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B가 정말로 무엇이든 맛있게 먹을 수 있다면 그가 추천한 음식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만약 B가 다른 모든 사람이 혐오하는 것조차 맛있게 먹는다면,
그것은 미식이 아니라 괴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2.
A와 B의 비교는 사실 지나치게 단순화된 도식이다.
입맛이라는 것은 어떤 단일화된 정점을 향해 수직으로 나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00점 만점에 99점인 음식이 80점인 음식에 비해 절대적이고 확고하게 맛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A가 맛있다고 말한 음식이, A를 만족시키지 못한 음식보다 반드시 더 낫다고 말할 수 없다.
정말로 까다로운 입맛을 가진 A가 만족한 음식에, 별로 까다롭지 않은 B가 만족하지 못할 수도 있다.

만약 맛이라는 것을 절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 있다면,
그래서 100점 만점에 100점이라는 정점이 존재하여 그것을 추구하는 것만으로 미식을 구분지을 수 있다면,
과학적으로 규명된 100점짜리 맛을 조미료로 만들어 모든 음식에 집어넣을 수도 있을 것이다.

라면 스프는 실제로도 대단히 많은 사람들의 입맛을 만족시키는, 강력한 조미료다.
그러나 아주 까다로운 입맛을 가진 누군가 모든 음식에 라면스프를 뿌려 먹는다면(실제로 이런 사람이 종종 있다)
그 사람은 미식가가 아니라 괴식가라고 불릴 것이며, 맛이라는 걸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 비웃음을 살 것이다.

3.
미식이라는 것은 맛의 우열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폭넓은 맛의 경험을 쌓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무엇이든 잘 먹을 수 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하지도 못하고 그냥 배불리 먹을 수 있다면, 그건 미식이 아니라 미각이 마비된 것이다.

다양한 맛을 분별하고 이해함으로서 풍요로운 맛의 경험을 쌓는 것이 미식이다.
스테이크에 흐르는 육즙의 무거운 맛과 홍어 삼합의 코를 찌르는 강렬한 맛,
크림 파스타의 고소함과 된장찌개의 구수함,
서로 다른 문화와 맥락을 가진, 서로 다른 종류의 맛, 다른 자극을 즐길 수 있게 되는 것.

물론 꼭 세상의 모든 맛을 즐길수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매일 먹던 편안한 맛에 안주하는 것도 각자의 삶의 방식이니, 그것을 잘못이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할수만 있다면,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드는 다양성을 즐길 수 있게 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4.
아이러니하게도, 감각이 예리해질 수록 자극은 무뎌진다.
미식의 경험이 쌓이고 미각이 예민해 질수록,
사람은 자극에 둔감해지고 호불호가 희미해진다.

더욱 자극적인 맛, 또는 더욱 완벽하게 균형잡힌 맛, 완전히 새로운 맛이 아니면 미식가를 만족시킬 수 없다.
이전에 즐기던 평범한 맛은 싫지는 않지만 그렇게 좋지도 않은, 다르게 말해 식상한 맛이 되어 버린다.
A와 같은 미식가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이 생기는 것도 아마 이런 탓이라고 생각한다.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은 어느 방송에서, 자신이 그 일을 하게 되면서 맛을 진심으로 즐길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수없이 다양한 음식을 맛보며 분석하고 평가하는 작업은
미각을 더욱 예리하게 만들면서도 맛에 대한 호불호를 불분명하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황교익이 떡볶이를 맛 없는 음식이라고 평가하면서도 떡볶이 광고를 찍고,
집밥백선생의 야메 레시피를 비판하면서도 
'내가 라면 싫어할 것 같아요? 좋아해요. 냄새만 맡아도 ㅎㅎㅎ' 같은 인스턴트 음식 광고를 찍는
일견 모순된 모습은 단순히 자본에 굴복한 것이 아니라(물론 그런 이유도 없진 않겠지만)
미식가의 단련된 미각과 이론적인 평가는 A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럴수록 어떤 음식이든 크게 싫어하지 않고 먹을 수 있는 B의 모습도 동시에 갖게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이 든다.
'맛있다고 생각하니까 맛있는 것'이라는 황교익의 주장은
호불호란 상대적이고 주관적이며 인위적으로 만들어 질 수 있는 것이라는 뜻이며,
어떠한 맛이 좋은 맛이라는 경험과 지식이 희미해진 호불호와 만났기에 나올수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5.
미식이 어쩌고 저쩌고 해도, 나는 미식가가 아니다.
이 글은 미식에 대한 글이 아니라, 미학에 관한 글이다.
미학과 미술에 대해서, 단순히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리고 아름다움에 대해서 어떤 절대적인 궁극의 아름다움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아름다움이란 대게 익숙한 것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외국 음식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입맛이 어려서부터 길들여지는 것이기 때문이며,
이와 마찬가지로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 또한 길들여지는 것이다.

미학은 아름다움에 관한 고상하고 품격있는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다.
아름다움에 관한 익숙한 관념을 무너뜨리고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현대미술에 대해 전통 예술과 달리 이해하지 못할 난해한 것,
쓰레기와 구분되지 않은 추악한 것이라 생각하기도 하지만,
과거로 부터 예술은 동시대에는 천박하고 난잡한 것으로 이해되기 일쑤였다.
아름다운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오가며, 다름에 대해서 서서히 길들여온 것이다.

미학은 유일하고 궁극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과 추하다고 생각하는 것의 경계를 허물고
모든 것으로부터 아름다움을 찾을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낯설고 서로다른 존재들이 공존할수 있게 하는 것이다.

6.
이를테면, 사람들은 성형수술을 한 누군가를 성괴라 욕한다.
기괴함이 느껴질 정도로 획일화된 얼굴은 철두 철미하게 계산되고 설계된 미적 기준에도 불구하고
라면 스프를 들이부은 요리처럼 욕을 먹는다.

그러나 그들에게 욕할 자격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타인의 외모를 평가하고 아름다움의 순위를 매기는 이들이
사람들을 극단적인 성형에 빠져들게 만드는 가해자들이며,
이들을 성괴라 비난하는 이들과 동일한 사람들이다.
이들에겐 다름과 다양함을 받아들일 수 있는 무딤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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