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존재/비존재에 대한 생각
게시물ID : phil_1653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Phil
추천 : 2
조회수 : 831회
댓글수 : 26개
등록시간 : 2018/06/20 17:08:41
미국 동부 어느 대학원에서 있었던 일이다. 

때는 겨울이었다. 밤새 흄의 인성론을 읽고 아침에 피곤한 몸으로 교실로 향했다. 
맑고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며 하얀 눈길을 걸으니 정신도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철학과 건물에 들어서서 교실로 올라가는데 문간에서 신발을 탁탁 터는 교수님이 보였다.
그 교수는 학생들이 질문할 때마다 한동안의 침묵이 흐른 뒤에 답변을 했다. 
늘 본받아야 할만한 신중함과 생각의 정밀성을 보여주었다. 
그가 쓴 글들은 과감하고 상식을 벗어난 주장들을 내세웠지만, 반박치 못할 정교한 논증으로 받쳐 주었다.

수업이 시작되자 그 교수는 인성론에 대한 강의를 진행하면서 시간과 공간에 대한 내용에 다다르게 되었다.* 
읽으면서 빨리 지나친 내용이지만 교수님은 역시 이해하기 쉽게 그 내용에서 제기되는 문제를 천천히 설명한다: 

"무엇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분석해야 하는가? 즉, 산타클라우스가 존재한다는 생각과,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 두 생각 다 산타클라우스에 대한 생각이다. 그렇다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존재한다는 생각과 어떤 면에서 다른가? 흄은 이런 제안을 한다: 산타클라우스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바로 산타클라우스가 모든 시간과 장소에서 제외되었다는 생각인 것이다."

누가 교수님이 문장을 끝마치기도 전에 손을 들고 끼어들었다:

"흄은 틀렸습니다. 그의 제안은 모순이나 순환을 도출하기 때문이죠."

교실에는 정적이 흘렀다. 그 학생이 예전부터 뛰어난 두각을 나타낸 학생이 아니거니와, 순식간에 어떻게 이런 딜레마를 도출해내는 사고를 했겠는가.

교수님은 의아해하는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교수: 그래, 어떻게?
학생: 우리는 어느 특정 시간이나 장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교수: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오즈의 나라나 엘도라도같이, 존재하지 않는 곳을 생각할 수 있다는 거지?
학생: 네, 우주 밖의 공간이나, 빅뱅 이전의 시간, 둘 다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죠.
교수: 그렇다면 모순은?
학생: 어느 특정 시간이나 장소가 모든 시간이나 장소에서 제외된다는 것이 모순입니다."
교수: 그럼 순환은?
학생: 모순을 피하려면 "어느 특정 시간이나 장소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생각 = 그 특정 시간이나 장소가 존재하는 모든 시간과 장소에서 제외되었다는 생각"이라고 수정해야 되죠. 그러나 이렇게 수정하면 "존재"라는 단어가 정의되는 문구와 정의하는 문구에 동시에 포함되어 순환적인 정의가 되는거죠. 

대학원생 중 의자를 뒤로 젖히고 앉아있던 고참 선배는 놀라 자빠질 뻔했다. 

철학논쟁에도 일종의 체크메이트 같은게 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모순이나 악순환, 무한후퇴가 도출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흄은 틀리고 흄의 정의에서 모순과 순환을 이끌어낸 학생은 맞는 것인가?

존재성/비존재성의 문제는 복잡하다고 본다. 
흄의 정의는 시공간 속에서 존재하는 개별적인 사물들에게는 적용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이 정의는 시공간 자체에 적용할 수는 없다.
플라톤의 보편자나 집합론의 집합들과 같은 시공간을 초월한 추상적인 존재들이 있다면, 이러한 추상적인 존재들에게도 적용할 수 없다. 
정신이나 마음 또한 공간에서 존재하지 않는 비물질적인 것이라고 보면, 시간적인 측면에서는 흄의 정의를 적용할 수 있겠지만, 공간적인 측면에서는 적용할 수 없다. 

즉, 존재란 것은 일원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존재하는 대상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렇지만 모든 존재성은 근원적인 무언가에 기반한다.

좀 더 체계적으로 말하자면, 근원적으로 존재하는 무엇이 있다 (1차적 존재성). 
그리고 다른 모든 것들은 이 근원적인 존재에 의존한다 (2차적 존재성). 
그 의존관계를 완전히 파악하여 서술하면 그 다른 모든 것들의 "존재성"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을 다 한 것이다. 

존재론적인 문제에 더 깊이 파고들고 싶다면, 콰인(Quine)의 존재론, 그리고 카르납의 내적/외적 존재론적 질문에서 시작하길 권한다. 
콰인의 존재론은 일원적이고, 카르납의 존재론은 다원적이다. 나 자신의 입장은 이 둘 사이에서 중간 입장이라 할 수 있겠다. 

-----

*인성론 1.1.5, "...no two ideas are in themselves contrary ,except those of existence and nonexistence, which are plainly resembling, as implying both of them the idea of the object; though the latter excludes the object from all times and places, in which it is supposed to not exist."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