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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주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타자와의 마주침
게시물ID : phil_1729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민방위특급전사(가입:2019-05-21 방문:87)
추천 : 0
조회수 : 32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0/12/15 10:2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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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다는 추천을 받아서 보게된 이 영화는 우리나라에서 아주 흥행에 성공한 영화는 아닌것 같습니다. 줄거리는 도시에서 성공한 노노미야 료타와 시골에서 전파사를 하는 사이키 유다이의 아이가 산부인과에서 바뀌었던 것으로 시작합니다. 약 6세? 정도 되는 아이들이 바뀐것은 산부인과에서 전화를 받게 되어 알게 되죠. 료타는 늘 바쁘게 살면서 하나뿐인 아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는 못하지만 항상 상냥하게 아들을 대하고 아들을 사립학교에 보내기 위해 노력하고 피아노를 가르치며 나름의 규칙을 정해 아들을 키웁니다. 유다이는 비록 풍족하진 않지만 주인공인 첫째 류세이 포함 두아들과 딸하나를 키우면서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고 행복하게 삽니다. 아이가 바뀌게 된 이유는 그 병원 간호사가 행복해'보이는' 료타의 집을 시기하여 아이를 바꾸게 된 것으로 드러납니다. 산부인과에서는 아이를 교환할 것을 충고하지만 쉽사리 어떻게 이 일을 정리할 지 결정못하는 네사람(케이타의 부모, 류세이의 부모)은 케이타와 류세이를 토요일마다 하루씩 바꿔서 데리고 살면서 답을 찾으려고 하죠. 케이타를 키운 아빠 료타는 상대편 집이 풍족하지 않고 애가 셋이나 되는 점을 들어 케이타와 류세이 둘다 키우고 싶어하지만 평소 우유부단하던 류세이를 키운 유다이로부터 단호한 거절을 당하고 어쩔 수 없이 둘 중 한명을 고르려고 하죠. 결국 료타는 친자식인 류세이를 선택함으로써 이 결정은 마무리 됩니다. 류세이는 가난하지만 다정했던 아버지를 잃고, 도시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다가 가출하여 시골의 유다이에게 가면서 료타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류세이를 데리러 유다이 집에 가서 케이타를 찾지 않음으로써 케이타를 실망의 구렁텅이에 넣게 되죠. 료타는 류세이에게 더 많은 시간을 투자 함으로써 갈등이 봉합되는 것 같지만, 케이타의 빈자리에서 자신이 케이타에게 준 상처를 깨달으며 그 상처를 어루만져주기 위해 와이프와 류세이와 함께 유다이의 집으로 가게 됩니다. 결국 키운 자식이든 친자식이든 모두 자식이었습니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키운 자식을 고를 것이냐, 유전적으로 비슷한 친자식을 고를 것이냐 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사뭇 다른 조언을 하는 주체와 주변인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료타의 아내, 케이타의 엄마는 약 6년간 키운 아들에게 더 애착을 보입니다. 하지만 드러내고 결정을 하지는 못하죠. 케이타의 외할머니는 드러내놓고 키운자식이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료타의 아버지는 피가 섞인 자식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료타 자신도 류세이에게 더 끌리는 것을 점차 느끼게 됩니다. 이 두 그룹의 미묘한 차이는 직접 아이를 키운 여성과 시간을 같이 보내기 보다는 가부장적인 자세를 가진 남성의 대립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차이를 가부장적인 남자와 감정적인 여자의 대립으로 보기보다는 타자와의 만남을 라이프니츠처럼 운명적인 예정으로 볼 것이냐, 들뢰즈처럼 우연으로 인한 생성의 과정으로 볼 것이냐의 관점 차이는 아닌가 싶습니다. 료타는 피아노를 가르쳐도 잘 따라가지 못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것 같은 케이타보다는 자신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애초에 자신의 아들로 운명지어졌던 류세이에게 더 애착이 생깁니다. 하지만 케이타를 키운 엄마 미도리는 우연히 자신과 만나게 되었지만 자신과 6년의 시간을 함께 만들어간 케이타에게 더 애착이 있죠. 감독은 이 부분에서 분명히 중립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습니다. 유전적으로 료타를 닮았어야 하는 류세이는 유다이와 똑같은 빨대를 씹는 버릇과 오마이갓을 연발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 료타와 닮은 아들은 없습니다. 여기서 감독은 유다이의 입을 통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합니다. 자신이 꼭 있어야 할 일(직장)이 많아서 가족과 시간을 보내기 어렵다는 료타의 말에 유다이는 아버지의 역할도 아버지만이 할 수 있는 것이며, 가족과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너무 소중한 일이라고 일침을 놓게 되죠. 타자와의 관계는 소통이 중요하며 소통을 통해 서로가 서로를 '생성'해 나가는 존재여야 한다는 뜻 아닌가 싶습니다.

 

료타는 자신의 아들이 사립학교 입시에 성공하고, 하루에 얼마 이상 피아노를 연습하며, 혼자 목욕을 하도록 규칙을 만들어 아들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만들어 가고 싶어합니다. 류세이에게도 아버지라고 부를 것과 젓가락질을 똑바로 하라고 시키죠. 물론 케이타 역시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어서 노력하죠. 반대로 류세이는 반발합니다. 하지만 료타의 자식사랑은 조건적인 사랑이었으며 케이타의 아버지에 대한 애정은 짝사랑이었습니다. 료타는 케이타의 미래만을 바라보고 케이타는 현재의 아버지를 바라보기 때문에 료타와 케이타는 엇갈리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케이타는 료타와 걷다가 벛꽃잎을 주워서 바라봅니다. 너무 상징적인 장면은 아닌가 싶습니다. 벛꽃은 화려하게 폈다가 잠시 시간이 지나면 다 지게 되죠. 그러니까 벛꽃을 즐기려면 바로 꽃이 폈다가 흩날릴때 바로 그때 즐겨야 합니다. 내년에도 피겠지만 내년의 벛꽃은 올해피는 벛꽃이 아닙니다. 케이타는 그 벛꽃을 무심히 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그 꽃을 잡게 된 것입니다. 나중에 류세이가 가출하여 유다이 집에 갔을 때 료타는 케이타를 찾지도 궁금해 하지도 않아서 케이타는 상심하게 됩니다. 하지만 관심이 없다면 놓칠 수 있는 그 세심한 감정을 유다이는 찾아냅니다. 왜냐면 유다이는 항상 케이타의 얼굴을 보니까요. 바로 현재의 변해가는 아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관찰하고 잘 알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그 장면을 담아두고 싶어서 캠코더를 손에서 놓치 않죠. 타자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변해가는 인간의 모습을 긍정할 때 가능할 것입니다. 만약 케이타의 본질은 변하지 않고 겉모습만 약간씩 변한다고 형이상학적 관점으로 본다면 지금 아들의 표정이나 행동이 소중하지 않을 겁니다. 왜냐면 영원한 본질은 변하지 않으니까 내일 봐도 그대로니까요. 하지만 인간은 항상 변하고 타자와의 만남으로 새로 생성된다고 생각하면 바로 지금을 놓칠 수 없습니다. 바로 오늘의 케이타는 내일은 없을 테니까요. 이 부분에서 감독은 또 다시 유다이의 입을 통해 일갈합니다. 료타는 뭐든 미래를 바라보고 계획을 가지고 미리미리 일을 해나가는 것을 보고 유다이는 부끄럽지만 당당하게 말합니다. '난 내일 할 수 있는 일을 절대 오늘 하지 않습니다'라고.

 

료타의 부모님은 이혼하고 아버지는 새어머니와 삽니다. 새어머니와 료타와의 관계는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특히 새어머니는 료타와 료타 형에게 애정을 보이지만 료타는 가부장적이고 도박을 좋아하는 아버지도 좋아하지 않고 그 아버지와 잘 맞춰서 사는 새어머니도 그닥 맘에 들지 않습니다. 류세이가 료타에게 아버지라고 부를 것을 끝내 거부하고 료타 역시 어쩔 수 없이 그 상황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새어머니한테 전화를 합니다. 아마 처음으로 전화를 한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료타가 어머니에게 심각하게 과거에 대한 사과를 하려고 하였으나 새어머니는 거부합니다. 새어머니 자신은 료타에게 바라는 것이 없다. 그냥 시시콜콜한 얘기나 하자.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일 뿐. 기억나는 것도 없다. 그렇습니다. 새어머니는 자식에게 바라는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저 짝사랑일 지라도 상관없이 주기만 하는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과거에 대한 집착과 회한도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걸리적 거리기만 할 뿐인것이죠.

 

마지막으로 케이타는 자기를 키워줬으나 자기를 버리고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았던 료타와 만나고 도망을 가버립니다. 케이타 뒤를 따라 쫓아가던 료타는 갈림길에서 케이타와 다른 길로 따라갑니다. 하지만 그 길은 다시 만나게 되고 다시 만나는 지점에서 둘은 극적으로 화해를 하게 됩니다. 결국 료타는 아이가 바뀐것을 알고 일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많이 성장하게 됩니다. 희한한게 성장영화인데 성장한 것이 아이가 아니라 어른이었군요.

 

이 이야기에서 감독은 중립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습니다. 유다이는 어떤 결정과정에서도 우유부단하게 결정을 내리지 않습니다. 왜냐면 유다이는 알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케이타나 류세이 모두 자식이고, 모두 자식이지만 자기가 모두 키울 수는 없다는 것을. 류세이를 고집하면 자신의 마음에 케이타를 채울 수 없고, 케이타를 고집하면 류세이를 채울 수 없는 것을.

 

피히테는 기억에 의존한 자기동일성을 추구하지만 니체는 나를 망각하고, 나를 버리고 타자에게 자신을 던질 것을 말합니다. 저는 보통 열린 결말을 싫어합니다. 보고나면 찝찝하고 생각이 너무 많아져서 머리가 아프죠. 이 영화는 그런 면에서도 아주 명확하게 감독이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해서 참 편합니다. 감독은 말합니다. 나를 버리고 타자와 소통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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