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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신백일장] 천국의 문
게시물ID : readers_1121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cocoa
추천 : 1
조회수 : 277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1/20 21:43:39
내가 좀 특이한 버릇이 있는데, 생각이 복잡하거나 맘에 걸리는 일이 떠오르면 연필을 깎는다.

유리가 깔린 내 작은 방 책상에, 의자를 벽에 붙이고 기대앉아 짧게 눈을 감았다가 한숨 크게 '푹' 내쉰 뒤에 오른손으로 커터칼 딸각하고 올리고선 책상 모서리 필통에 연필 중 가장 뭉툭한 놈을 잡고 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끝자락에 나무껍질을 밀어낸다.

얇게 잘려나간 나무껍질 조각을 힘줘서 튕겨낼 때마다 내 주변 사람들 사이 연결된 희미한 선들이 조금씩 정리되는 느낌이다.

무슨 일이 머릿속에서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 수는 없지만, 고요한 방안에 조금씩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산뜻하고 가벼운 바람이 부는 것 같고 먼지처럼 수북이 쌓인, 내가 가진 고민도 그런 바람에 조금씩 날아간다.

연필심을 둘러싼 나무껍질, 한올 한올 벗겨내며 연필심에 칼날이 닫을 때면, 칼 쥔 오른손에 힘을 잔뜩 쥐고서 '틱'하는 소리와 함께 생각 없이 가루가 돼서 떨어지는 연필심에 시선을 잃은 사람처럼 바라본다.

살짝 느껴지는 커터 칼날 끝의 진동에 사방으로 퍼지는 흑연가루가 책상 넘어 바닥으로 떨어지면 표정이 약간 굳어지지만 무심한 눈빛에는 변함이 없다.

사각거리는 소리, 힘 받은 커터 칼날의 튕김, 조금씩 연필을 돌려 잡는 왼손, 다시 힘을 주는 오른손과 밀려 나가는 나무껍질..... 뭉툭했던 연필 끝이 제법 날카로워 질 때 쯤..... 

흩어진 연필흑연 가루와 나무껍질을 물끄러미 보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커터칼을 돌려 잡고선 칼 마개 뒷부분을 힘을 줘서 밀어내고 '따다닥' 경쾌한 소리를 뒤로 조심스레 커터 칼날 끝이 보일 때까지 모두 밀어 올리면.....

칼날과 유리가 닿는다. 가벼운 금속과 유리가 만나는 맑은소리....

책상 유리에 맞닿은 칼날이 매섭다.

엄지손가락을 칼날이 없는 부분에 꾹 누른다, 손끝이 아려 올 때까지....

슬며시 들어 올리는 엄지 손가락끝에 따라오는 커터 칼날에 기쁘다. 

중지로 가볍게 칼등을 맞잡고 책상 모서리부터 차근차근 퉁겨 나간 부스러기를 긁어모으면 칼날이 유리면을 긁으며 나는 날카로운 소리가 적막한 방에 한동안 울린다.

여기저기 흩어진 부스러기가 한 데 모이고, 휴지 한 칸 뜯어 펼쳐 놓고는 다시 한 번 엄지손가락으로 꾹 눌러서 한번씩 검지 중간 마디로 엄지 끝을 밀며 부스러기를 털어낸다. 

연필 가루에 까맣게 변했다. 또 약간 번들거린다. 휴지 끝에 쓱쓱 비빈다. 그리고 '괜찮겠지'.....



연필을 하나 깎고 조금은 포근해진 마음에 발끝을 방바닥에 대고 길게 뉘인 채로 의자에 기대 생각한다. '복잡한 선들, 누가 주인인가....' 

잠시나마 잊었던 삶에 찌든 자극들이 나를 또 여기저기 쑤셔 덴다.

복잡한 선들의 주인, 그 덕에 지금은 일단 행복하지 않은 걸로 해두기로 하자.

불만에 가득 찬 시선과 누가 주인인지 모를 내 심경은 하루하루 깎는 연필로는 쉽사리 정리되지 않는다. 

잠깐 감았던 눈가에 깊은 여운이라도 남듯 힘겹게 눈을 뜨곤 폈던 다리를 당겨 땅을 짚고, 축 처진 가슴을 밀어 올려 몸을 일으킨다. 

혹시라도 의자 바퀴에 발뒤꿈치를 찍힐까 봐 신경이 좀 쓰이긴 하지만 힘을 쓰는 게 귀찮은지 그냥 일어나고선 방바닥에 널브러진 두꺼운 점퍼 하나, 책상 한편에 기대진 가방을 피해 침대 위에 이불을 살짝 올리고 '스르륵', 내 옷의 마찰 소리와 함께 몸을 뉘어 두꺼운 천이 접히며 느껴지는 포근함은 생각보다 아늑하다. 

구겨진 이불 덕에 발 한쪽이 살짝 삐져나오면, 손을 빼 이불 귀퉁이를 잡고 삐져나온 발을 이불 안으로 밀어 넣는다. 

찬 공기를 피해 볼 맘에 이불을 코까지 끌어올리면.... "딱히 걸리는 냄새는 나질 않네.." 

내 체취에 익숙해진 탓인가.... 아무 냄새도 맡을 수 없다. '그냥 나쁘지 않은 이불 냄세'..... 

편하게 몸을 뉘면 아까 연필을 깎게 하던 복잡한 선들, 그리고 의미 없는 자극들이 툭툭, 잠이 들려던 날 건드린다. 

조금씩 목을 움직여 베개에 닿는 포근한 느낌을 확인하고선 다시 눈을 감아본다. 

기다림, 외로움, 혼돈 속에 하루가 천천히 그리고 삐걱거리며 꺼져간다. 

손을 가슴으로 올려, 그리고 이불을 당긴다. 소외된 날 감추든 꼼꼼하게 포근한 이불을 당긴다. 

내일이 궁금하진 않다. 딱히 오늘을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언제나 흐르는 시간에 초조해 하는 내가 있을 뿐이다. 

'내일도 비슷하겠지'란 생각에 기대어 자신 스스로 타협해 갈지 모른다. 

두렵다. '난 그대로지만.... 사람들과 시간은 아니거든....' 

따듯했던 사람들이 사라져 간다. 자와 칼날로 날 재단 하려는 사람들, 하고 싶은 수많은 일은 이제 잘려나가야 할 부스러기일지도 모른다. 

두렵다. '내가 그대로라서.... 조금도 변하고 싶지 않아서....' 


하지만 사실 조금은 변한 거 같다. '낯을 가리기 시작했고, 말수가 적어졌지' 

이젠 내가 좋아하는 걸 말하지 않는다.

당신들의 눈치를 살피지

당신들이 듣고 싶은 말, 내가 당신이라면 받고 싶은 배려, 당신들이 바라는 옷차림,

당신들과의 대화 속에 끈임없는 해답을 찾고 있다. 

난 당신들이 필요하니까...

당신들의 관심이....

내 존재감이 당신들 안에 커다랗게 자리 잡고 있음을 느끼고 싶다.

'오늘 하루 내가 다가갈 행복은 내가 아닌 타인의 손에 달렸어.'








"띠디딕 띠디딕"

시끄럽게 알람이 울리지만....

조금만 .... 조금만 더 울어라.

두 번째 알람이 울리면,

그때 일어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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