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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여전히 폴더폰을 쓰나
게시물ID : readers_1431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Nushian
추천 : 2
조회수 : 532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4/08/02 02:22:37

살면서 너무나 많은 잘못을 범하지만, 그것을 반성하는 시간은 너무 모자란 것 같다. 인생에 일시멈춤이란 것은 없고, 어영부영 망설이는 사이에도 시간은 끊임없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친구와 대화한 이후로 한동안 악몽에 시달렸다. 군대 꿈이었다. 친구에게서 들은 것은 별 거 없었다. 단지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좀 없다는 것뿐이었고, 사실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지금껏 내가 순진하다고 비웃은 사람 중에는 상당한 인격자들도 있었다. 인격자를 비웃는다고 해서 본인이 그 인격자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내가 숨막힌다고 생각한 사람 중에는 상당한 원칙주의자들도 있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피하고 싶었지만, 세상엔 그런 사람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

내가 좋다고 생각한 사람 중에는 탐욕에 물든 인간은 없었다. 다행히도 나는 탐욕스런 사람은 싫어한다. 탐욕스런 사람은 눈에 사기치고 공갈치고 상대를 억압하고 싶어하는 게 보인다. 예를 들면... 예를 들었다간 잡혀 갈지도 모르니 일단 패스.


나는 아직도 폴더폰을 쓴다. 편하다. 실제로 그것은 요금제도 싼 편이고, 배터리도 오래 간다. 단, 하나 단점이 있다면, 그건 유행에 뒤쳐져 있다는 점뿐이다. 정말 그 이외의 단점은 없어보인다. 스마트폰이란 게 정말 편해보이긴 한다. 형의 것을 써보면 느껴진다. 터치도 부드럽고 키 입력이 안 되는 경우는 없다. 인터넷도 되고 사전 검색도 되고 mp3도 들을 수 있다. 알람도 원하는 곡으로 맞출 수 있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 쓰는 휴대폰을 별로 바꾸고 싶지 않다. 이유라면야 있긴 하다.

나는 유행에 신경 쓰지 않고 싶다.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신경 쓰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신경이 쓰이긴 한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사는 데에는 아무런 하잘 것 없이 하찮은 것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이 종종 온다. 정말 중요한 것은 잘 안 변하는 편이다. 아무튼 나는 유행에 되도록 신경 안 쓰려고 한다. 세상사에 무심해지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유행을 좇는 순간, 나는 유행의 노예가 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노예가 된다는 건 순식간이고, 사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노예가 되는 것이다. 끊임없이 변하는 유행 속에서 자신이 필요로 하지지 않는 물건을 산다는 것은, 소비 주권을 박탈 당한 것과 크게 차이가 없어 보인다. 유행에 뒤쳐져서 초조해하는 모습은 스스로의 발목에 족쇄를 채운 것이기 때문이다. 유행을 좇을수록 족쇄는 무거워지고 거추장스러워질 것이다. 유행을 좇는 것이 자신을 채워주지 못함을 알면서도, 자신의 가치를 내세우는 게 아님을 알면서도 유행에 꾸역꾸역 따라가는 것은 노예의 삶이 자신을 풍요롭게 만들어주지 못함을 알면서도, 자신의 가치를 증가시키는 게 아님을 알면서도 주인의 말에 꾸역꾸역 따라가는 것과 진배없어 보인다. 그러므로 나는 유행을 거부하고 싶고, 그런 소소한 거부의 행위로 휴대폰을 안 바꾸는 것이다.

과시적 소비란, 토스타인 베블런이 사용했던 용어인데, 자신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아님에도 단지 허영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치르는 소비인 것이다. 과시적 소비는 부유한 사람들만 하는 게 아니다. 가격이 비싸질수록 소비가 역으로 증가하는 가수요 곡선은, 이름 그대로 가짜 수요 곡선이다. 가짜 수요를 만드는 것은 소비 심리이다. 이런 심리를 조장할수록 거짓된 수요는 비효율을 부채질할 것이며, 쓸데없는 자원의 소모를 야기하게 할 것이다. 결국 자극된 소비 심리 - 가짜 수요 - 유행 - 자원 낭비 - 누군가의 이익 - 확대재생산은 하나의 사이클로 움직이게 되는 것이며, 효과가 커지면 커질수록 유한 계급은 이를 더 철저히 이용해 버리려고 할 것이다.

나는 유행에는 신경쓰지 않으려 하고 그걸 거부하려고 하지만,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려고 한다. 그것이 나와 무관하지 않으며 그것이 나에게 원치 않는 족쇄를 채우려고 시도할 수도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시나브로 노예가 되어가는 사람들을 보면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온다. 당장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는 것은 유행을 좇는 것으로 보여 앞서 한 말과 일견 모순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그 둘은 다른 행위이다.

지금까지 사회를 관찰해 본 결과, 사회 분위기를 가장 손쉽게 체감하는 것은 주위를 지켜보는 것이다. 주위에서 하는 말을 보면 서서히 느껴지는 게 있다. 사람들이 묘피아(myopia, 단견)에 찌들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관피아, 학피아보다 무서운 게 사실 묘피아다. 묘피아는 우리의 눈을 멀어버리게 만들고, 그들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슬금슬금 다가오게 해 족쇄를 채울 수 있게 한다.


지금까지 그런 묘피아와 싸워온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묘피아를 거부해온 사람들이 있었다.

너무 늦기 전에 우리가 깨달아야 한다면 그건 내일도 모레도 아니고 오늘일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말하길, 어제와 같은 삶을 살면서 오늘과 다른 내일을 사는 건 정신병이라고 그랬다.(대충 이런 뉘앙스였다. 검색하면 잘 나온다.) 우리 사회의 상당수는 아인슈타인이 진단하면 정신병에 걸려 있다고 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큰일이 벌어져도 근본적인 해결책이 나오지 않았는데 문제를 그만 떠들어대자는 건 몇 가지 이유가 있을 텐데, 그들이 말하는 유행에 이번 큰일이 큰 찬물이 되었다는 것이고, 그들이 바라는 사이클이 조금이나마 뒤틀렸다는 것이기도 하고, 일상적인 탐욕을 자극하여야 사이클이 복귀될 것임을 알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 문제와 해결은 시험 시간의 답안지 작성하듯이 제한 시간 안에 풀고 넘어가는 게 아니다. 정답이 뭔지 헷갈린다고 찍고 넘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 시험 종료음은 울리지 않는다.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비슷한 오답이 우리를 죽음에 몰아붙일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정신병에 걸리고, 묘피아에 사로잡힌 까닭은 그것이 일상적인 탐욕에 기초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일상적인 탐욕을 경계해온 사람들이야말로, 내가 비웃고 꺼리던 인격자요, 원칙주의자였던 것이다.

그러하기에 나는 그들 앞에 사죄하고 반성해야 하고, 나 자신도 묘피아를 거부하고 일상적인 탐욕에서 해방되도록 정신을 일깨워야 한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당분간은 폴더폰을 계속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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