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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 이야기
게시물ID : readers_1984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단군의후예
추천 : 1
조회수 : 256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05/22 06:4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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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는 어쩌면 9대 독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손이 귀한 집 종가집의 장손..

 

1919년 음력 9

천안과 온양 사이의 모산이란 지역의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8대 독자로 무척 손이 귀했기에

첫째 딸이 14살 되던해에

드디어 그를 나았다.

 

그에게 불행이 시작된건

그가 3살이 채 되기도 전이었다.

구걸을 하러 온 피부병환자들을 박대하던 머슴들을

혼내고 직접 밥상을 차려 걸인들을 먹이시던 그의 어머니는

병이 옮아 끝내 어린 아들을 두고 하늘로 떠나셨다.

 

9대독자...

대가 걱정이 되던 그의 아버지는

새 장가를 들었고,

그의 새 부인은 4명의 아들을 낳았다.

 

아들이 많아지자 그의 아버지는 주색에 빠졌고,

새 엄마되는 사람은 그에게 끼니조차 주지 않았다.

부잣집의 큰 아들이

아직 익지도 않은 콩을 먹고 설사병에 걸렸다는 소문은

그 동네에서 그의 아버지만이 몰랐다.

 

시집을 갔던 그의 누이는 공부하러 일본으로 가는 남편을 따라

이 나라를 떠나기 전,

동생을 일본에서 공부시키겠다는 말로

그를 일본으로 데려간다.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공부할 여비를 매달 보냈다.

하지만, 한번도 그의 손에 돈은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새엄마가 자기가 보내준다 하고 자기 쌈짓돈으로 삼았다.

 

부잣집의 종손이

일본이라는 남의 나라에서

신문을 돌리고, 배달일을 하면서 공부했다.

조센진이라는 이유로 아무리 시험에서 만점을 받아도

그는 전교1등을 받지도 못했고,

동경제대 입학시험도 치루지 못한채

와세다 대학교의 영문과를 졸업했다.

 

그가 한국에 다시 돌아온건 1942년 봄이었다.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어 징용이 시작되자

그는 징용을 피할 방법으로

면서기가 된다.

말단 공무원....

 

그렇게 해방이 되었다.

 

해방이 되자, 공무원을 때려치우고,

우리나라 최초의 소방대 창설멤버가 된다.

하지만, 열악한 환경, 위험한 직업을 반대한 그의 아버지 말에

 

그는 20대 후반의 나이에

육사 전신인 장교교육을 받고

최전방의 소대장이 된다.

 

전쟁통에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고

고향에 돌아왔으나

그의 아버지가 전쟁통에 행방불명상태로

돌아가셨다는 말만을 듣게된다.

 

집의 재산은 온데간데 없고,

배다른 동생들은 대궐같은 집에

전쟁 후에도 안락하게 살고 있음을 보았지만,

그는 아무말 없이 뒤돌아 처와 자식들을 데리고

서울 이태원에 집을 마련한다.

 

그는 모아둔 돈으로 성냥공장을 차린다.

불티나게 팔리는 성냥으로해서

돈을 모으자

배운 것을 쓰고 싶어서

작은 신문사를 차린다.

 

그리고 5.16이 터졌을 때,

그는 사설에

군인은 군대로 돌아가라고 쓴다.

 

하지만, 군사정부에 찍힌 그는

재산을 모두 빼앗기고,

파주로 강원도로 인천으로

떠돌이가 된다.

 

그렇게 그의 자식들은 고향이 결정났다.

 

아무런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는

룸펜으로서의 생활

처가 벌어온 돈으로 살면서

재기를 꿈꾼다.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고

그는 못사는 동네의 가장 배운 어른으로서

열과 성을 다해 일에 앞장서고

 

수많은 표창을 받으면서 복권이 된다.

 

수완을 발휘해서 건설회사를 차리고

건설붐이 불자 큰 돈을 버니

명예에 대한 욕심이 생긴 그는..

 

박정희가 있는 공화당의 지구당 위원장이 된다.

박정희로 인해서 모든걸 잃었고

그로 인해서 떠돌이가 되었고,

그의 자식은 공부를 제대로 하지도 못했는데..

 

인천은 당시 최대의 야당도시였다.

그는 국회의원에 출마하려고 했으나 공천을 못받는다.

그리고 박정희가 죽고

전두환이 들어서자

민정당으로 대통령 선거인단에 나간다.


하지만, 당시 인천은 야당의 우세지역

그는 보기좋게 떨어진다.

설상가상..자금담당하던 사람이 공금을 횡령해서

부도를 맞고

 

처자식을 데리고 산동네로 이사를 가게 된다.

다시 어려운 때로 돌아간 그..

 

그의 막내아들이 대학생이 되었다.

다른 아들들은 한창 어려울 때 태어나 공부를 하지 못했고,

셋째 아들은 아버지의 재력을 믿고 사고만 치고 다니다 학교를 그만두었기에

그는 막내 아들이 대학입학이 결정나자

창피함을 무릎쓰고 입학금을 빌리러 다녔다.

 

해가 바뀌고 바뀌어

어느날 막내아들의 학교에서 전화가 왔다.

데모를 주동하고 있어서 언제 경찰에 잡혀갈지 모르니

조치를 취해달라고...

 

그는 한달음에 아들을 데리러 간다.

안암동에서 아들을 데리고 온 그는

아무말도 없이 낚시터로 막내아들을 데리고 간다.

 

낚시는 한 마리도 낚지 못하고

멀뚱 멀뚱 있는 막내 아들에게 한마디 않던 그는

해질녘이 되어서야 아들에게 말한다.

 

옳다고 다 바른건 아니란다. 하지만,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그럴 자신이 없다면 다 그만두고....그래도 옳다면 다 걸어라

 

그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또 한해가 지나 군대에 간 막내아들의 휴가날이 내일이다.

휴가오면 맛있는 것을 사주기로 약속하고

지인들과 같이 음성에 짓는 아파트 공사 현장을 둘러보고

집으로 가는길에 소고기를 사서 운전하는 길에

그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쓰러졌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

 

그는 나의 아버지다.

20세기 한국 근현대사의 한 가운데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가끔은 정의롭게 가끔은 비겁하게 살았던 나의 아버지

오늘 그가 그립습니다.

출처 20세기를 관통해 살았던 한 남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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