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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광고+한심한 고백
게시물ID : readers_2009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뚱뚱한바다
추천 : 0
조회수 : 548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06/05 11: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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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멋 모르고 들어간 방통대 4학년입니다. 내년부턴 학생증 없어지니까 음슴체.

6월 28일에 기말고사 보는데
방통대 강의는 어쨌든 꼭 들어놔야 함. 강의 안 듣고 좋은 성적 기대? 
꽝임.
바쁘다는 핑계로 보통은 1.6배속, 
어쩌다가 낙타 타고 가는 교수님이라면 2배속으로 강의를 돌리는데
정보사회와 디지털문명이란 과목은 빨리듣기 기능이 없슴. 
왠지는 나도 모름. 아몰랑, 어쩌라고... -.,-

빅데이터가 어떻고 정보공개청구권이 어떻고 하는 과목이라 흥미 유발도 안 되고
(역사, 철학, 사회학 쪽 과목은 재미난데. 흙...)
안 들으면 안 되니까 듣긴 들어야 하는데~!
오늘까지 15강 전부 다 들어야 하는데~!
이 시간까지 내가 들은 건 4강이 전부. 아, 진짜 뒈지게 공부하기 싫네...
시험공부 할 땐 벽지 무늬 세는 것도 공부보다 재밌단 말 절감하는 중임.

그냥 가면 섭섭해서 며칠 전에 올린 방현희 작가의 <우리 모두의 남편> 리뷰글 하나 올림.

‘거짓말’ 같은 ‘남편’ 이야기

1. 내가 부를 수 있는 랩은 95년에 나온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이 전부다. 삼십 초반에 나온 덕에 겨우 따라 부를 수 있었단 말이지, 랩을 즐기는 젊은 오빠란 주장은 아니다. 사실 김건모 이후에 나온 가수들, 특히 아이돌 가수들은 미안한 말이지만, 내 기준에선 가수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떼로 나와서 춤이나 출까, 가창력하곤. 그래, 소방차 말이다.


그렇게 한참을 지났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우연히 지오디가 부른 ‘거짓말’을 들었다. 그리고 그 노래는 정말이지 거짓말처럼 나를 사로잡았다. 그 또래 아이돌 가수가 부르는 노래는 알아듣기도 힘들었지만, 이 노래는 정말이지 귀에 쏙쏙 들어왔다. 게다가 그 가사는 심금을 울리고도 남아, 들을 때마다 심장이 덜커덕 내려앉았다. 저렇게 절절한 사랑이라니. 지고지순한지고. 그래 이런 게 노래지.


노래를 처음 들은 게 언제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럼에도 나는 이 노래를 마흔 넘어 들었다고 굳게 믿고 있다. 난 서른보다 마흔이 아름다웠다. 매양 안달을 볶던 조급증에서 한 걸음 물러나 나를 바라볼 수 있게 됐고, 그래서 나를 긍정할 수 있게도 됐다. 그건 축복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서른 즈음의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하지 못했다. 타인에게 너그럽지 않았고, 세상과 역시나 불화했다. 지나고 나니 조금 끔찍하기조차 한 시절이었다. 다시 살라면 십 대나 이삼십 대는 절대 선택하지 않을 거다. 오, 빛나는 사십이여. 지금 막 보내는 중인 황금의 오십이여.


마흔이 넘자 지오디의 ‘거짓말’을 좋아하게 되었단 말은, 내가 나이를 먹고 나서야 겨우 신파를 좋아하게 됐단 말이다. 사실 십 대 소녀들이나 좋아할 얇고 가녀린 김태우의 보컬이나,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그 가사라니. 고생만 시켜서 널 보내겠단 남자는 속마음으론 간절하게 가지 말라고 외친다. 그때나 지금이나 난 이런 정서와 거리가 멀다. 겉보리 서 말이면 처가살이를 면하는데,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을 왜 보낸단 말인가. 그게 사랑이라고? 사랑하니까 헤어진다고? 그런 건 사랑이 아니다.


2. 그런 건 사랑도 아니라고 믿었던 내가 지오디의 사랑도 사랑이라고 믿게 된 건, 나이를 먹었기 때문이다. 삶은 수많은 스펙트럼으로 나뉘지만, 분광기를 거치기 이전의 빛은 그저 다발로 묶인 흔하디흔한 광채에 불과하다. 빛은 어디에나 있고, 나 자신도 빛이기 때문에, 그게 얼마나 귀한 것인지 우리는 흔히 잊어버린다. 누군가 그게 아니라고, 각자의 삶은 하나하나가 깊고 웅숭깊고 길게 감긴 이야기라서 풀어내기만 하면 취하게 된다는 걸 말해주기 전에는.


신파가 싫은 건 어찌 돌아갈지 뻔한 데, 기어이 눈물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은 어떤가. 함께 산대도 결국엔 공허하고, 헤어진다면 끝내 불행해진다. 삶은 또 어떤가. 빛나는 영광만 지르밟은 사람도 말년엔 결국 부축을 받아야 화장실엘 간다. 변기에 앉기도 전에 오줌똥을 지리지 말란 법도 없다. 한 면만 보면 인생처럼 뻔한 신파가 없다. 어려선 부모 속을 썩이고, 자라면서 원망만 쌓다가, 늙으면 한숨만 길게 내쉬는 게 인생 아닌가.


그러나 지오디는 아마도 십 대 어쩌면 이십 대의 뻔한, 내 기준으로 보면 비겁한 사랑이, 아프고 슬프고 절절한 사랑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바로 그 방식으로 작가 방현희는 우리에게 ‘남편’들의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한다. 후기에서 작가는 스스로 소설적 인간이라서 수필에 약하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건 겸양의 말이거나 췌언(贅言)이다. 집 짓는 대목이 의자 못 만들까. 방현희의 ‘우리 모두의 남편’은 지오디의 거짓말이다.


3. 방현희가 포착한 남편(남자이면서 동시에 한 여자의 남편이고, 가장인)들은 아내에게 김치전을 해달래서 먹고, 호박죽을 사 어머니에게 간다. 어쩐지 서먹해진 아내와 화해하고, 파견근무를 나간 미국에서 한국의 생태탕을 그리워한다. 그렇다. 그녀가 잡아낸 남편들은 전혀 특이하지 않다. 범상하고 심상하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고 그릴 수 있고 만날 수 있는, 그래서 중년 남자란 한 묶음으로 싸잡아 부를 수 있는, 어쩌면 신파. 혹은 범용(凡庸)함.


방현희의 ‘남편’이 지오디의 ‘거짓말’과 마찬가지로 공명하고 회전하는 동류의 소립자라는 사실을 알아채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책의 진정한 놀라움은 삭아버린 나무토막 같은 삶일지라도, 일단 그녀가 주목하기만 하면, 스스로 분광(分光)해서 눈부신 오로라 또는 무지개로 현현한다는 점이다. 수필에서조차 사람을 나누고(分光), 그래서 스스로 타오르게 하는 방현희는 타고난 작가다.


내가 비록 범용함이라고 포장하긴 했으나 방현희의 책에 등장하는 남편들은 비루하지 않다. 그들은 어떻게든 상황을 바꾸려고 노력하고, 그래서 사람에게 주어진 가장 큰 폭의 자유를 성취하는 자들이다.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건 자기를 관찰하는 것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그 말대로다. 한 가지 더 첨언하자면, 나처럼 눈이 어두운 자는 나이를 먹어야 겨우 보이는 범용함 속의 빛남을 이십대 혹은 삼십대에 만나는 독자들에게 영광있을진저. 

출처 변변찮은 내 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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