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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압주의) 김경주 시인의 문장들
게시물ID : readers_2400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치우
추천 : 4
조회수 : 534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6/02/13 20:57:59
어디선가 이과수 열매 향기가 바람에 실려 와요.
아마 열매들도 눈을 뜨고 저처럼 이렇게 기지개를 켜나 봐요. 열매들은 아침마다 기지개를 켜면 겨드랑이에서 좋은 냄새가 난대요. 그건 느릅나무 밑에 사는 늙은 고양이 캐럿이 말해 주었어요. 그 고양이는 당근처럼 생겼죠. 캐럿은 자신이 언젠가 기린이 될 거라고 믿는 고양이에요. 녀석은 가끔 나무를 타고 올라와 제 겨드랑이나 배 위에서 갸르릉거리며 자다가 내려가곤 해요.
“날 안아 드는 네 삼촌들의 겨드랑이에선 늘 고약한 냄새가 났다고.”


 
내 옆으로 흘러가는 구름은 어디로 가는 걸까
바람 속에 머물며 내 의자는 부드럽게 흔들려
구름은 너무 포근하고 난 공기처럼 떠다녀

창문 너머 사람들의 일상이 가끔 아찔해 보여
내가 하는 여행이 저 아래선 보이지 않을 거야
내가 모르는 흔들림도 세상엔 또 많겠지만

가끔씩 창문으로 훔쳐본 너의 옆모습처럼
가만히 좋아하면 조금씩 보이는 게 있어
언젠가 너를 만나면 말해주고 싶었어
내 마음은 서쪽 하늘처럼 조금씩 붉어진다고

사람들은 말하곤 해 사는 건 아찔한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하곤 해 아찔한 삶은 피해 가라고
하지만 난 이 출렁임이 좋은 거야 가벼워서

가끔씩 창문으로 훔쳐본 너의 옆모습처럼
가만히 좋아하면 조금씩 보이는 게 있어
언젠가 너를 만나면 말해주고 싶었어
내 마음은 서쪽 하늘처럼 조금씩 붉어진다고

새들은 내 어깨에 앉아 잠깐씩 졸고
손등에 앉아 빵가루를 쪼아 먹지
지금 이곳이 아니라면 내가 어디 있겠어

 

“다음 번에도 친구들이 널 괴롭히면 나무 위로 올라가거라. 그 아이들은 나무 위로 올라오다가 모두 바닥으로 나뒹굴 거야. 나무와 바람이 널 도와줄 거야.”
“할머니, 나무가 몸을 흔들 때마다 바람이 불어 주나요?”
“아주 오래전부터 바람이 불 때마다 나무가 몸을 흔들어 주기로 하면서 둘은 친구가 되기로 약속했단다.”

 

내가 살았던 시간은 아무도 맛본 적 없는 밀주였다.
나는 그 시간의 이름으로 쉽게 취했다.

 

내 고통은 자막이 없다 읽히지 않는다.

 

불가피하게 오늘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니 오늘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 눈이 너로 인해 번식하고 있으니 불가피하게 오늘은 너를 사랑한다 오늘은 불가피하게 너를 사랑해서 내 뒤편에 무시무시한 침묵이 놓일 테지만 너를 사랑해서 오늘은 불가피하다

 

열두 살이 되는 밤부터 라디오 속에 푸른 모닥불을 피운다 아주 사소한 바람에도 음악들은 꺼질 듯 꺼질 듯 흔들리지만 눅눅한 불빛을 흘리고 있는 낮은 스탠드 아래서 나는 지금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가고 있는 메아리 하나를 생각한다

 

죽은 사람을 물가로 질질 끌고 가듯이

염전의 어둠은 온다

몇천 년을 물속으로 울렁이던 쓴 빛들을 본다

물의 내장들을 본다

 

벼루 위에서 마른 먹처럼 강은 얼어 있습니다

 

달 사이로 진흙 같은 바람이 지나가고
천천히 오늘도 하늘에 오르지 못한 공기들이
동상을 입은 채 집집마다 흘러들어 가고 있다
귀신처럼

 

이사 때마다 기차의 화물칸에 실어 온 자전거처럼
나는 그 바람에 다시 접근한다
얼마나 많은 거미들이
나무의 성대에 입을 벌리고 말라가고서야
꽃은 넘어오는 것인가

나무에 목을 걸고 죽은 꽃을 본다
인질을 놓아주듯이 목련은
꽃잎의 목을 또 조용히 놓아준다
그늘이 비리다

 

어쩌면 벽에 박혀 있는 저 못은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깊어지는지 모른다

사람은 울면서 비로소
자기가 기르는 짐승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일찍이 음악으로 스며든 바람은 살아남지 못했다 음악은 유적지를 남기지 않지만 어느 먼 나라에서는 음악이 방금 다녀간 나라들을 허공이라 부른다

 

펑퍼짐한 엉덩이처럼 풀린 하늘로 확성기 소리 짱짱하게 날아가네

삶은, 팬티를 다시 입고 시작하는 순간순간이었네

 

골목 끝 노란색 헌옷 수거함에
오래 입던 옷이며 이불들을
구겨 넣고 돌아온다
곱게 접거나 개어 넣고 오지 못한 것이
걸린지라 돌아보니
언젠가 간장을 쏟았던 팔 한쪽이
녹은 창문처럼 밖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어둠이 이 골목의 내외(內外)에도 쌓이면
어떤 그림자는 저 속을 뒤지며
타인의 온기를 이해하려 들 텐데
내가 타인의 눈에서 잠시 빌렸던 내부나
주머니처럼 자꾸 뒤집어보곤 했던
시간 따위도 모두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
감추고 돌아와야 할 옷 몇 벌, 이불 몇 벌,
이 생을 지나는 동안
잠시 내 몸의 열을 입히는 것이다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넣고
종일 벽으로 돌아누워 있을 때에도
창문이 나를 한 장의 열로 깊게 덮고
살이 닿았던 자리마다 실밥들이 뜨고 부풀었다
내가 내려놓고 간 미색의 옷가지들,
내가 모르는 공간이 나에게
빌려주었던 시간으로 들어와
다른 생을 윤리하고 있다

저녁의 타자들이 먼 생으로 붐비기 시작한다
출처 '나무 위의 고래' 또는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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