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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사라진 그날
게시물ID : readers_2827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뚜뚜르
추천 : 2
조회수 : 19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7/04/24 13:0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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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태양 아래로 몸을 움직일 수는 있었지만 나는 탈출에 실패했다. 어둡고 깊은 구덩이 안에서 건진 몸뚱이와는 달리 아직 갇혀있는 심장은 끊임없이 나에게 암통을 선사한다. 결국 나는 완전한 해방을 결심했다....


나는 결국 죽음이라는 운명을 선택했지만, 그 완전한 어둠속에서 죽기보다 평온한 햇빛 아래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 그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기 위해 유서를 쓰는 것은 아니며 그저 앞으로 벌어질 끔찍한 나의 행동에 대해 오해 받기 싫어 글을 남긴다. 이 글에는 진실만을 담기로 다짐했으니,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미친 사람의 변명 정도로 치부하지 않았으면 한다.


얼마전만해도 남부럽지 않은 직장에서 적금 걱정이나 하던 화창한 봄날이었다. 철 이른 감기몸살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 조퇴를 결심했을 때, 나는 홀가분한 마음에 절반쯤은 이미 치료된 기분이 들었다.


바람도 쐴 겸 한창 공사 중이던 거대한 타워 옆을 지날 때 나는 싱크홀 속으로 추락했다. 손을 들어 허우적거렸는데 내게 벌어진 일을 짐작조차 못한, 그저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결과적으로 식물의 뿌리를 붙잡을 수 있었고, 내 목숨을 지금까지 연명시켜 주었다.


흙이 얼굴 정면으로 쏟아지고 나서야 내게 벌어진 일을 추측할 수 있었다. 오른 손에 감긴 뿌리에서 강력한 장력이 느껴졌다. 뿌리와 흙 사이에 생겨난 마찰이 내가 추락하는 속도를 줄여주었던 것이다. 그때는 미처 생각지 못했는데, 그것은 식물의 일부라기엔 너무나 길었다.


내가 시커먼 어둠속으로 완전히 잠식하지 않은 이유는 비정상적으로 긴 뿌리의 도움만은 아니었다. 왼쪽 팔꿈치 뼈를 아작 내긴 했어도 단단한 바위의 돌출부는 내게 누울 자리를 공급했다. 바위에 안착하고도 만약을 대비해 손에 감긴 뿌리를 놓지 않았는데, 혹시 그것이 내 편집증적인 광기의 시작이 아니었을까. 그 뿌리를, 괴생물체의 꼬리를 빨리 놓았다면....


뻥 뚫린 구덩이 중간에 튀어나온 바위에 누워 천장을 정면으로 바라보자 내가 떨어진 구멍이 빛났다.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보였는데 그 만큼 멀었다.


내게 눈대중으로 거리를 측정할 만한 재주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략 오십 미터는 넘지 않을까 싶었다. 구조 된 후에도 그 일에 대해서는 말하기도, 듣기도 싫었기에 당시 내가 처한 객관적 사실을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음을 밝힌다. 나는 그저 구덩이 안에서 내가 겪었던 미지의 공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몸을 뒤척이려 하면 왼손에서 끔찍한 고통이 일었고, 바위가 충격으로 떨어질 것 같은 불안감에 나는 가만히 구조대를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뿌리가 움직인 것은 구조대를 막 떠올렸을 때였다. 정체모를 움직임을, 처음에는 그저 심장박동이 증폭된 울림이라 막연히 넘겨짚었다. 꿈틀거림이 점차 커지기 시작했을 때도 싱크홀의 여파쯤으로 생각하고 뿌리를 더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것은 결국 모습을 드러냈다.


지상에서 내려 쬐는 빛을 통해 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정확히 볼 수 있었다. 장력이 약해진다 싶더니 그것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끝이 둥그스름했는데, 마치 뿌리식물이 하염없이 성장한다면 그런 모습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때야 양파나, 하여간 그 비슷한 무엇이라면, 내가 잡고 있는 부근이 아니라 저 둥그스름한 쪽이 뿌리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오자 그 둥그스름한 물체가 가져올 충격이 걱정됐다. 곧이어 내 옆을 아슬아슬하게 빗겨가며 바위 위로 떨어졌는데 그것은 비명을 질렀다. 나는 너무도 놀라 머리가 새하얗게 변한채로 그 둥그스름한 무엇인가를 황급히 밀어냈다. 고통이 찾아왔지만 비명을 지르는 괴생물체가 주는 충격보다는 덜했다고 확신한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경황이 없던 나는 오른손에 감긴 그 꼬리를 풀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도 손끝에서 느껴지던 감촉이 잊혀 지지가 않는다. 뱀의 꼬리를 잡았을 때나 느낄법한 탄력이었다. 정체불명의 생물이 몸을 뒤집어 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시커먼 어둠속에서 되살아나 기어 올라올 것만 같은 두려움에 나는 손에 감긴 꼬리를 겨우 풀어내었다. 그러자 비명이 다시 울리는데, 점차 멀어지는 비명이었다. 기나긴 포효는 저 아래로 서서히 사라졌지만, 내가 추락한 지하세계에 대한 뚜렷한 공포는 내 옆으로 바짝 다가왔다.


괴생물체가 추락한 그 자리에는 비릿하고 역겨운 냄새가 진동했다. 나는 미칠 지경이었다. 그 냄새는 편안한 휴식은 물론, 공포를 잊기 위해 사소한 상상을 하는 것조차도 허락지 않았다. 나는 잠깐의 휴식도 없이 끊임없는 두려움에 시달려야 했다.


이윽고 두려움은, 가서는 안 될 영역으로 나를 안내했다. 바위 역시 비명을 지를 수 있지 않을까하는 의심이 들자, 등 뒤가 섬뜩해졌다. 박동하는 것이 심장인지, 바위인지 도무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나는 바위 역시 비명을 지를 수 있는지 밝혀내야만 한다는 광기에 사로잡혔다. 괴생물체의 감각이 사라지기도 전에 오른손으로 바닥을 후벼 팠다. 그 호기심을 채우지 않으면, 한 순간도 누워있지 못할 것 같았다. 그리고 바위 역시 비명을 지른다면 차라리 저 어둠 속으로 떨어질 각오를 했다. 다행히 손톱이 흙을 헤집고 단단한 표면을 긁는 동안 바위는 움직이지도,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다.


나는 깊게 안도했다. 그러자 온몸의 감각들이 살아났다. 천장에서 빛나는 별 하나, 역겹고 비릿한 냄새, 바위의 차가움과 단단함. 그리고 저 아래에서 들려오는 공허한 바람소리....


지하 깊숙한 곳에서도 동굴에서처럼 바람이 분다는 사실이, 처음에는 놀라웠다. 하지만 저 텅 빈 공간이 무한히 이어져있다 생각하니 오싹해졌다.


방금 전 했던 각오가 무색할 정도로 암흑 속으로 추락하는 것이 괴생물체 이상으로 두려워졌다. 바위에 걸치지 않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는 채로 추락해 죽었더라면, 차라리 그것이 축복처럼 느껴졌다. 그 두려움의 원천은, 저 공허한 바람소리가 일러주듯 부딪힐 바닥없이 계속해서 추락하는 것이다. 어둠을 정면으로 바라보고서는 영원히, 영원히.


온갖 상상으로 두려움에 빠져있던 사이 시간이 제법 흘렀다. 천장에서는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는지 구멍을 통해 들어오던 빛이 약해졌다. 나는 제발 그러길 빌었다. 밤이 찾아오는 것이, 구멍을 메우는 것보다야 훨씬 희망적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붐비는 거리였다지만 다른 이들에게 관심 없는 현대의 사람들이 나의 추락을 보았을까? 나는 저 괴생물체와 다르게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는데. 만약 구조대가 오지 않는다면 나는 어둠에 갇혀 홀로 죽을 운명이었다. 그것은 공허한 저 아래로 영원히 추락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공포였다.


지독한 고독감이 찾아오고 나서야 스마트폰의 존재를 떠올렸다. 분명 안주머니 속에 있어야 할 스마트폰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는데 아마 추락하는 과정에서 저 심연으로 떠났으리라.


좁은 공간이었기에 내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도 있겠다 싶어 한동안 소리도 질러보았지만 들리지 않는 것인지, 주변에 사람이 전혀 없는 것인지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오로지 바람소리만 스산하게 울릴 뿐이었다.


쉬지 않고 소리를 지르자 피곤이 몰려왔다. 더구나 몸살기운마저 심해져 나는 그만 정신을 잃고 잠이 들었다. 꿈을 꾸었는데 흉측한 괴물에게 쫓겨 다니길 반복했다.


잠에서 깨자 천장은 더 이상 빛을 내지 않았다. 나는 다시 한 번, 밤이 되었길 간절히 기도했다.


밤이 되어도 심연에서 부는 바람은 그치지 않았다. 꿈에서 깬지 얼마 되지 않아 몽롱한 상태였기에 나는 그 소리가 마치 꿈속의 괴물이 내는 입김 같다고 생각했다. 기이하고 일정하게 울리던 바람소리는 서서히 커져갔다.


문득, 바람소리 사이로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저장해둔 스마트폰의 벨소리였다. 나는 왼팔에서 오는 통증을 겨우 참아내고는 바위 끝으로 갔다. 만약 바닥이 가깝다면 스마트폰을 가지러 갈 수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스마트폰의 벨소리로 인해 희미하게나마 빛이 비출 것이란 예상을 했지만 아니었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야했다. 그때 나는 빛이 없어도 볼 수 있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까마득한 저 아래 심연에는 완전한 암흑이 있었다. 그 암흑의 본체는 거대하게 덩어리져 있었고, 그것의 주위로 검고 긴 촉수가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촉수가 흐느적거리자 암흑은 점차 몸이 부풀었다. 그에 따라 벨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그것은 벽을 기어 올라오고 있는 것이다. 나는 알 수 있었다. 내게 오고 있었던 것이다. 심연의 암흑으로 점철된 그 덩어리는 사고력을 지닌 생명체가 분명했다....


심장이 뭉텅 떨어져 나가는 착각이 들게 하는 광경이었지만, 도저히 눈을 떼지 못했다. 어디로든 도망가야 했지만 사방이 온통 암흑인 상황에서, 그 존재로부터 도망갈 수 있을 리 없었다.


암흑 속으로 떨어지는 것보다, 암흑 속에 갇히는 것보다, 그 암흑이 내게 다가오는 것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두려웠다.


나는 너무도 약해져 있는 상태였기에, 비교적 덜 두렵다고는 해도 심연으로 추락을 선택하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멀쩡한 정신으로 그것을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었기에 벨소리가 바위 아래 가까이서 다시 한 번 울리자 까무러치듯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떠보니 순천향병원의 환한 전등이 보였다. 나는 그 지독한 암흑 속에서 빠져나왔음을 직감했다.


동네의 작은 병원에서 약을 처방받아 하루를 편히 쉴 계획이었는데, 기억나는 것 하나 없이 지역의 가장 큰 병원으로 후송되어있었다. 감기몸살치고는 퍽 호강을 한 샘이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잠깐은 횡설수설하며 내게 있었던 일을 쏟아냈다고 했다. 그것 역시 기억에는 없지만, 온전히 제정신을 차리고서 나는 오히려 입을 다물었다.


그 기괴하고 끔찍한 사건을 누구하나 믿어줄 것 같지도 않았으며 기억 속에서 꺼내어 놓는 과정은, 나 스스로를 그 완전한 암흑과 고독의 공포 속에 또다시 밀어 넣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부러진 왼쪽 팔꿈치 뼈를 맞추고 며칠인가를 입원해 있는 동안, 나는 지하에서 본 그 괴생물체에 대해 정보를 찾으며 시간을 보냈다.


바위를 후벼 파던 그 호기심과 크게 다른 행동은 아니었다. 그것의 정체를 알기만 한다면, 동물도감 언저리에 그 비슷한 무엇인가라도 발견할 수 있다면 더 이상 악몽에 시달리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그 방대한 책과 인터넷 세상 속 어디하나에도 내가 본 그 암흑과 조금도 비슷한 생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탈출에 실패했다. 아직까지 저 아래 심연으로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다는 착각이 든다. 완전한 어둠 속으로, 영원히, 영원히. 몇 차례인가 마음을 다잡으며 올라가 본 창문 난간에서 그 아래를 내려다보면 짜릿한 쾌감까지 느껴지곤 했다.


나는 햇빛 아래에서 추락하며 생을 마감하는 일이, 결코 괴롭다거나 슬프지 아니하다. 오히려 이것은 축복이다.


가만,


어디선가 벨소리가 들린다. 내가 심연에 두고 온 스마트폰에 저장해둔 그 벨소리다. 점점 가까워진다. 드디어 저 소리에서 도망갈 수 있으리라.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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