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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독오독/감상문] (스포) 너무 시끄러운 고독
게시물ID : readers_2838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빨간냄비
추천 : 10
조회수 : 662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7/05/11 15:5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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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홀로 예술가요 관객임을 자처하다 결국 녹초가 되어버린다. (p.15)

그는 35년동안 그 짓을 해 왔다. 그가 압축기에 책들을 밀어넣으면 그 시간만큼이나 오래된 기계친구가 웅웅거리며 네모들을 토해낸다. 이 시끄러운 고독 안으로 그를 밀어넣은 지하실은 그러나 은밀한 쾌락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는 맥주를 양껏 마시며 자신만의 레고블록을 쌓는다. 오늘은 예수, 내일은 노자. 아, 칸트 씨와 니체 씨도 서로 인사들 나누시죠. 안녕하세요*. 꿀꺽.
 

내가 보는 세상만사는 동시성을 띤 왕복운동으로 활기를 띤다. (p.69)

그러나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 소장은 지하실을 보며 고함지른다. 외삼촌네 정원에서 규칙적으로 노선변경하는 기차의 진동음보다 시끄러운 소리다. 그것을 피해 집으로 가면 관 뚜껑처럼 그를 내리누르는 책더미가 화장실에마저 그득하다. 그가 온전히 쉴 수 있는 곳은 기억 속 뿐일지도 모른다.

이제 나는 두 눈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책이라면 질겁하며 단 한 권도 읽지 않았던 만차가 말년에 성스러움의 경지까지 올랐음을······ (p.102) 
평생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멀리까지 간 사람이 만차였다. 책들에 둘러싸인 나는 책에서 쉴새없이 표징을 구했으나 하늘로부터 단 한 줄의 메시지도 받지 못한 채 오히려 책들이 단합해 내게 맞섰는데 말이다. (p.104)

지하실에서, 그리고 기억 속에서 그는 억압된 것들의 왕이다. 그가 허울뿐인 왕 아니냐고 반문할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의 눈만큼은 왕관처럼 밝게 빛난다고 해 두자. 과거의 연인이 너무나 인간적인 시련을 벗어던지고, 그가 도달하지 못했던 어떤 경지에 다다르는 것을 그만큼은 알아보고 있다. 그의 밝은 눈만큼이나 그녀의 ‘속머리’가 똑똑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그는 옛 연인의 성취를 질투하기까지 하는 것 같다. 다시 한 번 축구경기의 출전명단을 훑어볼 차례다. 그사이 그의 두 발은 (또!) 어딘가에 빠져 있을 것이다. 

전투에서 패한 교양인들이다. 한 번도 이 전투에 가담한 적이 없지만 세상을 완벽히 설명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이다. (p.39)

경기 따위 그만두자. 그에겐 압축기와, 서로 마주본 책들과, 맥주와, 집시들이 남아있다. 쥐들이 흐르는 하수구마저 반갑다. 그러나 역시 소장은 경기를 포기하지 않은 모양이다. 새로 들여질 압축기는 말하자면 편의점같은 것이다. 파리 꼬이는 먼지 쌓인 수퍼마켓 대신 24시간 신선칸의 냉방풍이 쾌적함을 유발하는. 그 새로운 세상에 내던져진다는 것은 결국 그에겐 ‘소음의 진공상태’에 내던져진다는 뜻이다. 그곳엔 하수구도 쥐들도 없을 것이다. 참지 못한 그는 지하실을 나와 거리를 헤맨다. 그 이후의 삶이란 후일담에 불과한 것이다. 김빠진 맥주만이 그를 따가운 햇빛으로부터 보호해줄 것이다.

내가 신봉했던 책들의 어느 한 구절도, 내 존재를 온통 뒤흔들어놓은 이 폭풍우와 재난 속으로 나를 구하러 오지 않았다.  (p.113)
난 분명 아무데도 가지 않을 것이다. 그저 눈만 감아도 모든 게 현실에서보다 더 선명하게 떠오르니까.  (p.120)

그는 다시 폐허로 돌아온다. 뼈대만 남은 파르테논의 신전에 왕이 돌아왔다. 왕은 욕조에 들어가 피의 목욕을 시작한다. 그러다 무엇인가 머릿속에서 떠올라 허공중에 손가락으로 어떤 이름을 적을지도 모르겠다. 바닥에 핏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1976/이창실,문학동네,2016)

*

요즘은 기쁜 날들이다. 물론 정치는 스포츠와는 다른 것이어서, 결승점을 통과한 것을 마냥 축하만 할 일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일단 오늘까지는 기쁜 날이라고 해 두자. 이런 날 기어이 음습한 지하실의 공기를 담은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마뜩잖을 지도 모르겠다. 어떤 이들에게는 승리의 날들인 이때, 이 한 개인의 (그러나 감히 황홀한 몰락이라고도 할 법한) 패배에 대해.
오히려 이러한 패배담들이 더 많아지기를 바란다. 작품에서의 패배주의가 현실에서의 패배주의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난 날의 사상검열 이상으로 교활했던 블랙리스트의 창조자들이 이제 역사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다. 각자 안에 짜부라들었던 은밀한 폐허들이 웅웅거리며 기지개를 켜고 있다. 그러니 지하실의 고독은 더 시끄러워질 필요가 있다. 아니 그래도 된다. 오늘같은 날일수록 더더욱.
게다가 이 허니문의 시간이 얼마나 남아있을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는 노릇 아닌가.


* ‘서로 인사들 나누시지요. 안녕하세요‘ 부분은 단편애니메이션 <빈 방>(정다희,2016)에서 얻어온 것이다. 
   예고편 http://tvcast.naver.com/v/1216775

* 지금까지 직접 또는 사진, 창작물 등에서 접한 가장 아름답거나 인상적이었던 폐허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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