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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필사] 권여선 소설집 『처녀치마』
게시물ID : readers_2895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ㅁㅈ이
추천 : 5
조회수 : 692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7/07/17 17:03:00


권여선 소설집 『처녀치마』



죽은 나무에 매달리 시든 열매 같은 그들은, 서른다섯 번의 봄이 지나면 너희도 우리처럼 된다고 한결같은 확신의 쌍지팡이를 짚고 말하는 듯했다. 남은봄이 꿈이라면, 그 꿈 또한 악몽일까. 겪은 날보다 남은 날이 더 적다고 부등호가 살짝 몸을 돌려 앉는 봄, 희뿌연 꽃가루가 분분 날렸다.

산다는 일엔 애당초 그 어떤 아름다운 실마리도 없다는 걸, 누군가 우연히 제 손가락 마디를 이용해 실을 감고 조심스럽게 덧감아나가면서 만들어놓은빈공간, 누군가의 손가락이 빠져나가버린 그 허사의 자리에 자신이 도착했다는 걸.

아무 친지도 연고도 없는 그곳에 고향이라는 치마를 입히고 그곳으로 향하는 길을 엄숙하게 귀향이라 부르는 건 마치 계산대 앞에서 돈 한 푼 없는 주머니를 자꾸 들척이는 일처럼 비루하지만, 그러나 고향은 고향이었다. 생각해보면 고향만큼 닳아서 얇고 누덕누덕해진 말도 없다.

「처녀치마」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 사이에 남아 있는 유대란 더 이상 유대라고 부르기 힘든 유대였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힘주어 당기면 딱 끊어져 이쪽저쪽 모두에게 따끔한 고무채찍의 고통만 안기고 끝나버릴 관계였다. 굳이 유대라고 한다면 탁 하는 최후의 순간이 오지 않아 모두 그것만을 학수고대한다는 의미에서의 유대일 뿐이었다.

「트라우마」


이제 내 육체와 정신은, 미세한 주름 하나가 열두 가지도 넘는 의미를 잣던 풍요로운 은유의 세계에서 벗어나, 파안대소와 대성통곡이 구별되지 않는 둔탁한 사물의 세계로 접어들 것이다. 늙은 자는 사물처럼 덜 들키니, 나는 비록 허세일지라도 늙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선형 계단이 돈다. 나는 굳은 땅에 튼튼히 뿌리 박은 느티나무의 수령을 생각한다. 제 몸의 녹이 뚝뚝 떨어져도 늙은 자는 더 이상 아프지 않으리라. 녹꽃은 더디게 피니, 그곳은 아주 오래전에 다친 곳이다. 이제는 아프지 않다.

「12월 31일」


언어가 처음 생겨날 무렵 온 인류는 옹알이 비슷한 것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옹알이도 잊고 유년의 사투리도 잊고 마침내 언어 너머에서 누리던 유동의 흔적들을 모두 잊게 될 것이다. 인류 역사는 참 기특한 데가 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는 아기 인류가 모조리 옹알이를 하며 말랑말랑한 말을 빚던 시절이 그립다.

말도 떡처럼 차지게 뭉치는 모양이었다. 훌떡 뱉어놓으면 개운할 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또 뱉어놓고 보면 뭉쳐 있던 그 응어리가 아닌 말들이 얼마나 많은가.

사람이 얼마나 고귀해져야 자신의 비천함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게 되는가. 어떻게 하면 자기 자신마저 속일 수 있게 되는가.

「두리번거린다」


나는 종종 그런 정결의 현현 앞에 주눅 들곤 한다. 반들반들 윤이 나는 까만 구두코, 일식집의 도자기 수저 받침대, 콩기름이 곱게 먹은 장판, 여학생들의 목더미를 감싼 꽃받침 같은 형광빛 칼라, 은빛 테를 두른 종지에 담긴 한 테이블스푼 분량의 어리굴젓, 막 감고 말려 반짜반짝 나풀거리는 소년의 가마 주변의 머리칼, 그리고 이렇게 공장에서 갓 뽑아낸 비닐처럼 미끈하게 다려진 셔츠.

이런 사랑은, 사랑하여 상대를 모질게 훑어내지 못하는 유약함은, 서툰 생선 손질을 닮았다. 곧 오점은 상대를 완전히 못쓰게 만든다는 것이다.

「수업시대」


나는 눈을 감고 누군가 빠져나간 자리를 고스란히 보존하는 일에 대해 생각했다. 문화 유적을 보존하는 일처럼 T가 떠난 자리를 지키는 일도 어떤 쓸모가 있을 것이다. 모든 보존에는 일면 자아도취적인 데가 있다. 모든 파괴에 자기파괴적인 면이 있듯이. 사실 우리의 행위는 궁극적으로 자기와 관련된다. 그래서 타인을 가장 잘 모욕하는 사람이 스스로에게 가장 민감한 사람일 수 있다.

내 삶의 패 둘 중 앞의 패 하나가 나쁘다면 뒤의 패는 아무리 좋은 것이어도 답은 나쁠 수밖에 없다. 답을 좋게 만들기 위해서는 첫 패가 나쁘면 다음 패도 나쁜 걸 집어야 한다. 마이너스는 마이너스를 상쇄한다.

「나쁜음자리표」


작은 깃발처럼 나긋나긋한 그녀의 손가락이 스쳐주지 않아도 그의 볼은 볕과 바닷바람에 그을렸고 흉한 각이 생겼다. 이정표 없는 시간이란 게 그렇듯, 다음 주도 다음 달도 다음 계절도 그녀가 오지 않아 끝없이 지루했다. 그녀 탓은 아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무위에의 노력은 언제나 그렇듯 괴롭고 모순적이었다.

그는 다시금 노란 참외와 주홍빛 귤 같은 것, 바람이 불 때마다 살랑대던 나뭇잎, 그 틈새의 별 모양을 반사하던 여자의 매끈한 팔기둥, 사뿐사뿐 멀어지던 초록빛 거북이 가방 같은 것, 과거부터 쭉 그의 곁에 있어왔으되 전혀 육중하지 않은, 그를 살짝만 건드리고 투명하게 스쳐 간 것들을 생각하려 했다.

「그것은 아니다」



*
권여선 소설은 이야기보다 문장을 워낙 좋아하는 편이라 
필사를 아주 많이 하게 되더라구요. 
원래 이것보다 더 많은데 부분만 들고 왔습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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