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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 여기에 머무르다
게시물ID : readers_2918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alouette
추천 : 2
조회수 : 352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7/08/05 12:08:50
지나는 길에 도서관에 들렸다

[니체, 자서전]과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임솔아 시집]을 빌렸다

나는 애써 니체를 고민하고 싶었고
아무렇게나 집어든 시집을 헤메이고 싶었다

지하철을 탄다
사람이 드문 시간
더운 여름 이곳은 선선하다

시집을 펼친다
몇 개를 읽어보고
시인의 이름을 다시 본다
나는 이 사람의 시가 마음에 든다

내려야 할 곳을 지나쳤다
상관없다
음악을 한 곡 반복으로 바꾸고
조용하게 다시..
그 세계로 침잠해 간다





- 시인의 말

내 방에선 끔찍한 다툼들이 얽혀
겨우겨우 박자를 만들어내

언니는 말했지
이런 세계는 풀 수 없는 암호 같고,
그런 건 낙서만큼의 가치도 없다고



- 모래

오늘은 내가 수두룩 했다

잊는 방법을 잊어버려
어쩔 줄 모르게 된다

오늘은 내가 무수했다
나를 모래처럼 수북하게 쌓아두고 끝까지 세어보았다
혼자가 아니라는 말은 얼마나 오래 혼자였던 것일까



- 두꺼비와 나

내가 많아지는 게 좋아서
기어이 나는 커다래집니다



- 오월

꽃들은 오월에 쏟아졌고 오월에 다 웃었다. 꽃들은 오월에 완벽했고 오월에 다 죽었다



- 여분

나를 살게 하는 것들과
나는 만나본 적이 없다

내 심장은 어떻게 생겼을까
빨갛고 예쁠까

무릎에 눈꽃이 피고 있다
코트를 열어 무릎을 집어넣고 감싼다

코트 안쪽에 달려 있는 여분의 단추에
나와 닮은 얼굴이 있다

까맣고 동그랗구나
했는데



- 같은

모래 위의 게들은 모래색이다. 종일 바다를 바라보다가 먼 발소리가 들리면
구멍을 파고 내려간다

물방울도 구름을 버려야 할 때가 온다. 바지만 입고 사는 소년들도 모래색 게들처럼 불빛 없는 집 속으로 숨어들어야 할 때가 온다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에
노인은 비를 맞으며 서슴서슴 바늘에 낚싯줄을 꿰고
은색 정처리는 서슴없이 녹슨 바늘에 입술을 꿴다

바닷속에도 지난한 나라가 있다 발소리가 목숨처럼 따라오는 나라가 있다
몸안에 가시를 키워야 물고기들을 살 수가 있다



- 악수

공원에 앉아 돌을 따라 한다. 바짝바짝 팔다리를 끌어안는다. 비가 내려도 속살은 젖지 않으려 한다.
이것을 마중이라 부르자.
참새가 날아와 돌을 쫀다. 입술을 화살같이 모으고 입맞춤을 한다. 
이것을 악수라고 생각하자.
구멍 뚫린 돌을 만난다면 구멍마다 담긴 안부를 꺼내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바람이 분다. 혼자 굴러가는 배드민턴공이 혼자서 굴러간다. 새를 기억하는 돌이 되어서.

모래바람이 분다. 돌의 부스러기가 내 눈을 쫀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처럼 나는 헝클어지며 바람의 방향으로 따라간다. 
새의 부리가 돌의 깨어짐을 응원하고 있다. 입안에서 모래가 서걱인다. 
그것을 약속이라 부르자. 
내 몸의 구멍마다 모래가 차오른다.



- 나를

내 그림자로 인해 나는 나를 구경할 수 있다. 그물처럼 서로의 그림자가 겹쳐질 때 그곳은 우리의 집이 된다.
아무나 밟고 지나갔으나 아무리 밟아도 무사해지는 집이 느리게 방바닥에서 움직인다.

구름 그림자가 방 안으로 들어오면 창밖의 먼 곳에서 바람이 분다. 구름 그림자는 발끝부터 나를 지나간다.
날벌레 한 마리가 구름 그림자를 드나들고 먼 것들이 틈틈이 나를 뒤덮는다.

나는 오랫동안 있다.
그림자는 목숨보다 목숨 같다. 나는 아무것에나 그림자를 나눠 준다.
아무와 나는 겹쳐 살고 아무도 나를 만진 적은 없다.



- 중계천

의자가 모두 젖어 있어서 걸을 수밖에 없었다

왕십리역 중계천, 물속을 헤엄치는 잉어를 따라 쥐 한 마리가 헤엄치는 것을 보았다. 대가리를 넣었다 뺐다 하면서

누구는 잉어 같고 누구는 쥐새끼 같겠지
사람들을 따라갈수록 나는 거짓말이 되어가

물 밖으로 나온 쥐의 머리처럼 나는 헉헉거렸다
나는 자꾸 나를 배제한다. 흔들리는 것은 모두 손짓 같았다.

나는 의자들과 함께 젖었고 드디어 걸어갔다



- 승강장

아이는 빨간 신 한짝을 잃어버려서 찾아다니다가 집을 잃어버렸다고 했다

신도 인간을 일허게 계속 찾아다닐 것이다 그래서 집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 어째서

꽃들의 모가지가 일제히
햇빛을 향해 비틀리고 있는지
경이로움은 어째서 징그러운지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꽃 없는 꽃밭에 철퍼덕 앉는다



- 하얀

불을 끄니
불을 켜고 있을 때의 내 생각을 누군가
훤히 읽기 시작한다

낮에 만난 이야기들은 햇빛에 닿아
타버렸다



- 멍

사랑받고 싶은 날에는 사람들에게 그 어린 나를 내세운다. 사람들이 나를 안아준다.



- 동시에

 자판기 불빛을 마시러 갔다. 만지작대던 동전을
넣으면 금세 환해지는 게 좋았다. 종이컵과 악수를
하는 게 좋았다. 갓 태어난 메추라기처럼 따듯한 종
이컵. 테두리에 이빨 자국을 새기는 게 좋았다. 의자
위에 세워두었다. 내가 버린 컵은 편지가 되었다.

 비바람이 치는 밤에는 빗방울들이 악착같이 나를 부
르는 게 좋다. 발음이 어려운 내 이름을 두 번 부르
게 하는 게 좋다. 내 이름을 모른 체하느라 벗어놓은
옷을 내가 뒤집어쓰는 게 좋다. 폭우에 몸을 녹이느
라 폭우를 맞는 게 좋다. 성당의 첨탑 아래에서는 악
마와 천사가 공평하게 부식되는 게 좋다.

 종이컵 편지에 빗방울이 모여들 것이다. 빗방울이 
모여 구름을 새길 것이다. 연녹색 손바닥이 버즘나
무 가득 퍼드덕거릴 것이다. 잘 가라는 손짓이면서
동시에 잘 있으라는 손짓일 것이다.



- 뒷면

가로수의 조용함이 뾰족해진다

모퉁이에서 뒤돌아선다

내가 모르는 내 비밀이 발끝에 엉겨붙는다 내가 모르는 비밀이 덥석 자라난다 내 행세를 하기 시작한다



- 그래서 그랬다

할 말 없니
그 말이 내 말문을 닫는다



- 가장 남쪽

몸 바깥으로 피가 쏟아지는 일
악몽이 몸 바깥으로 질질 흘러내리는 일
아침이 세상으로 나를 내쫓는 일

깨어나는 꿈을 꾸고 싶다 나쁜 꿈이 놀아달라 번번이 칭얼댔고 같은 놀이를 반복했다

매번 얼굴을 바꿧고 매번 이유를 바꿨다 너 같은 아이가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 나쁜 꿈에게 나는

말해주지 않을 수 있다 끝까지 그 말을 들어줄 수 있다 똑같은 자세에서 끝나버리는 실뜨기처럼 멍청해 보여도 기꺼이 처음을 반복할 수 있다

버려진 기억에게서 버려진 기억으로부터 다시 버려지는 기억이 될 때까지

작은 눈사람을 손 위에 올려보았다
차가운 사람은 차가운 곳에 있어야 하지


- 빨간

눈물을 흘리면 눈알이 붉어진다 고통에 색이 있다면 그 색으로 나는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고통들이 말해지는 동안

빨간 촛불을 켜고 노래를 부른다



- 노래의 일

손가락 두 개로
빈 몸을 깨뜨린다



- 룸메이트

방 안에 방이 하나 생겨나고 있다

허락받지 못한 것들이 외풍처럼 드나든다

골목의 테두리를 골똘히 헤매인다

테두리가 어둠 속에서 빛난다


출처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 임솔아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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