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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게시물ID : readers_2961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이세하
추천 : 2
조회수 : 99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7/09/12 18:54:52
 어릴 적의 나는 내가 굉장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시험을 치면 곧잘 100점을 맞았고 그림대회나 백일장 같은데 나가서 상도 타오고 그랬거든. 엄마아빠도 선생님도 친구들도 나를 치켜세워줬지. 그 때의 나는 어린애라면 누구라도 할법한 큰 꿈을 꿨어. 노벨 평화상이라든가 대통령이든가. 왜냐하면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으니까.
 

  중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깨달은 게 있었어. 고작 14살짜리가 무엇을 깨달을 수 있냐고 비웃는다면 나로서도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그 나이에 깨달은 게 있긴 했다고. 정확히는, 처음으로 만난 낯선 애들과 남중1학년 센 척 하는 애들 중 한 명한테 개기가 뒤통수 맞고 찌그러졌을 때 깨달은 거지.
 

  아, 나는 별 것 아닌 놈이구나 하는 깨달음 말이야. 차라리 왁 하고 달려들었으면 뭐라도 됐을 텐데 소심하고 바보 같았던 나는 그것도 못하고 뒤통수를 문지르며 고개를 푹 숙인거지. 이전까지의 나는 바늘에 찔린 풍선마냥 펑 터져서 사라졌어. 남은 것은 공부도 어중간하고 축구도 잘 못하고 사이즈 M 교복을 입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찔찔거리는 애새끼뿐이었지. 나는 그렇게 소심한 바보가 됐지. 그래도 아주 바보처럼 시간을 보내기만 한 건 아니었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책을 많이 좋아했잖아. 소설이라면 장르를 가리지 않고 막 읽고 그랬으니까. 그 시작이 바로 중학교 1학년 때였어. 뒤통수 한 대 맞고 소심한 바보가 되어버린 내게 도서관은 최고의 아지트였거든. 일 년 가까운 시간 동안 100권에 가까운 책을 읽고 큰 대회 나가서 몇 번 상을 타오고 교내신문에도 몇 번 실리니까 애들이 나를 문학소년 취급 하더라. 적어도 바보에 찌질이 취급보다는 나았지.
 
 그 시선을 은근 즐기기도 했고. 그 시선이 좋아서 잘 읽지도 않는 책을 겨드랑이에 끼고 복도를 걸으며 까불거리던게 지금도 떠오른다. , 이불 발로 차고 싶어진다. 여하튼 그게 한심한 짓거리라는 걸 깨닫는 데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어. 내가 여기에 적어놓은 것처럼 고등학교 3학년 졸업할 때까지 모르고 있었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을 꼽자면 수능 끝난 고삼 수험생은 고삐 풀린 망아지 같다는 거야. 수능 끝나고 새해로 접어든 순간의 고삼은 더욱 그렇고 나도 마찬가지였어. 그래도 친한 친구들이라고 생각했던 애들이랑 편의점 가서 맥주랑 소주를 잔뜩 산 다음 주구장창 마셔댔지. 해 뜨기 전까지 마셨던가. 기억이 안 나네. 여하튼 처음으로 취할 때까지 마신 우리들은 꼴에 수능 좀 쳤다고 여태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이야기하기 시작했어. 다들 한 두 가지씩은 힘들고 어려웠던 기억을 가지고 있는 법이었으니까. 원래 취하면 그런 이야기 다들 하는 법이라고 생각도 했고. 그런데 좀 이상한 기분이 들더라.
 

왜 나는 친구들이 말하는 힘들었던 시간들이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던걸까.
왜 내가 말하는 힘들었던 시간들을 친구들이 이해하지 못하는걸까.
 

 낄낄거리면서 웃어 넘겨버렸지만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나는 적당한 핑계를 대고 자리를 빠져나왔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의 벤치에 앉아, 처음으로 취할 때 까지 마셔본 술 때문에 두근거리는 심장과 울렁거리는 속을 부여잡고 내 시간을 되새김질해봤지. 그리고 깨닫게 된 거야. 내게 남은 것이라고는 스스로의 허세에 짓눌려 쓴 소설과 시 몇 편 뿐이라는 걸. 그 허무함과 자괴감이란.
 

  다시 시간이 흐르고 겨울이 지나 봄이 찾아 왔어. 나는 편의점 구석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지.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아무도 보지 않을 글을. 오직 나만이 보게 될 글을.
 

  있잖아, 어릴 적의 나는 내가 굉장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하지만 지금의 나는 잘 모르겠어.
 

나는 무엇이 된 걸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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