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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너를 만나다
게시물ID : readers_2981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무연히
추천 : 4
조회수 : 407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7/09/28 16:5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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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너를 만나다>
 

 

  나는 너를 반쯤 땅에 묻었다. 두려움조차 묻어나오지 않는 차가운 모습의 너. 그런 너를 보는 내 마음이 뜨거웠다. 이별은 당연한 거야- 네가 말했다. 당연하다고 해서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퉁명스러운 나의 대답에 너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제 정말 이별이구나.
나는 너를 온전히 땅속에 묻었다.
 

***
 

  너를 만난 건 붉은 달이 뜬 어느 날 밤이었다. 녹색 페인트가 칠해진 옥상의 시멘트 바닥 위로 담뱃재를 탁, 털었다. 달 한 번 보고 담뱃재 한 번 털고, 달 한 번 보고, 담뱃재 한 번 털고. 담배를 다 피워갈 즈음 나는 너를 보았다. 새로운 인연이 시작되기에는 어중간한 날이었다. 새해가 시작되는 1월도 아니고, 한해가 끝나는 12월도 아닌, 어중간한 9월의 어디쯤 너는 저 달처럼 붉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너를 물건이라 생각했다. 둥글지만 달처럼 둥글지는 않고, 굳이 비교하자면 알과 같은 모습이었다. 축구공보다는 크고 농구공보다는 작은, 어중간한 크기의 무표정한 너를, 나는 우리 집에서 가장 따듯한 곳에 옮겨두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떠보니 너의 눈이라고 생각했던‘66’‘67’이 되어있었다. 뒤늦게 생각해보니 주인이 있을지도 모를 너였다. 나는 출근하기 전에 너와 함께 옥상을 찾았다. 너를 제자리에 되돌려 놓을 생각이었는데 옥상 문은 수리 중이라는 글귀가 붙은 채 잠겨있었다.
 

  나는 막노동을 하며 하루를 살았다. 친구가 없어 일이 끝나면 바로 집으로 퇴근을 하는 게 나의 일상이었다. 그런 나의 일상에 네가 들어왔다. 퇴근 후 집에 들어섰을 때 붉게 빛나는 네가 있어 집안이 어둡지 않았다. 너와 함께한 뒤로는 매일 찾던 술도 더는 마시지 않게 되었다. 술을 마시는 것 대신 하루의 마지막은 늘 너에게 넋두리를 털어놓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67’은 어느덧 ‘88’이 되었다. 동그란 두 눈에 눈물이 맺힌 것 같은 모양이었다. 너를 만난 날로부터 숫자가 한 개씩 오르는 것 같았는데, 어느 날은 두 개씩 오르기도 했다. 확실한 건 한 번 올라간 숫자는 절대로 내려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해결되는 일이 없다 해도 누군가에게 내 속마음을 털어놓는 일 자체는 내게 큰 힘이 되어주었다. 나는 일터를 제외한 모든 곳에서 너와 함께 했다. 내게 힘을 주는 네게 아름다운 것, 새로운 것, 경이로운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강화도에서 너와 함께 본 노을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어느새 너의 숫자는 ‘90’이 되었다. 아마 그때부터인 것 같다. 네가 말을 하기 시작한 시점이.
 

  넋두리를 털어놓을 때마다 너의 몸에 새겨진 숫자가 하나씩 오르는 것이라고 너는 말했다. 숫자가‘100’이 되면 폭발할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니 이제부터 조금씩 마음을 정리하라고 했다. 폭발하고 나면 나에게 털어놓은 모든 근심이 사라지게 되는 거야. 네가 말했다. 나는 네가 없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너에게 그 말을 들은 날로부터 넋두리를 털어놓지 않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던 것 같다. 모진 말도 한 귀로 흘려들을 수 있게 되었고 다혈질이었던 성격도 점차 고쳐나갔다. 날 심란한 상태로 몰아넣었던 모든 상황을 조금이나마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시각도 생겨났다. 나는 변했고 도란도란 술잔을 주고받을 친구가 생겼다. 그래도 여행을 갈 때는 다른 누구도 아닌 너와 함께 했다. 나는 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넋두리를 털어놓지는 않았다.
 

  나도 모르게 너에게 넋두리를 털어놓게 되면 어떡하지? 내가 물었다. 폭발에 가까워지겠지, 그건 너의 고민이 사라지게 될 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미야. 네가 대답했다. 나는 너를 알맞은 크기의 종이 상자에 넣었다. 노란 박스테이프를 붙여 장롱 깊은 곳에 너를 넣어두고 마지막 담배를 피웠다. 담배를 끊을 생각이었다.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결국, 담배를 끊지 못해 얼마 가지 않을 짧은 생명의 끈만 붙잡고 있는 상태지만,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아 번듯한 가정을 꾸리는 일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나 나름대로 잘 살았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내가 죽으면 날 추억해 줄 사람이 있으니 그거면 충분했다. 모두 너의 덕이었다. 나는 너와 처음 만난 날을 떠올렸다. 네가 아니라면 아마 그 날 이후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나는 나의 존재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인생이란- 행복이란- 고통이란- 따위의 질문을 스스로 던지다 문득 라는 존재가 궁금했다. 너를 처음 만난 날 너는 ‘66’이었다. 이미 누군가 너에게 ‘66’번의 넋두리를 털어놓은 뒤 나를 만났다는 의미였다. 나는 장롱에서 세월이 켜켜이 쌓인 너를 꺼냈다.
 

 "잊혀 진 줄 알았어, 하지만 잊혀 진다는 건 내게 좋은 일이야. 네가 슬프지 않다거나, 슬픔을 나눌 친구가 생겼다는 의미니까. 그런데 너, 꽤 많이 나이를 먹었구나."
 

  나를 만나기 전에는 어떤 사람을 만났고, 그들은 어떤 고민을 가지고 있었는지 물었더니, 너는 그들에게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하기에 대답할 수 없다고 했다. 너에게 조금 섭섭한 기분이 들었지만 나 역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 비밀이 누군가에게 알려진다면 불쾌할 것 같았다.
 

  남들에게는 말하지 못한, 내면 깊숙한 곳에 웅크리고 있던 고민을 하나둘 꺼내어 너에게 건네주었다. 너는 내 고민을 받아들고 일순간 침묵했다. 아무런 신호도 오가지 않았지만 네가 내 고민을 진심으로 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잠시 미소 지었다. 비록 너는 '물건'이지만 내게는 그 이상의 의미였다. 본인의 폭발이 가까워졌음에도 기꺼이 나의 고민을 들어주는 너를 보며 나는 나의 죽음에 조금이나마 초연해질 수 있었다. 생김새도, 살아가는 목적도 다르지만 우리는 결국 끝에서 같은 곳을 바라보게 되었다. 넋두리를 털어놓다 보니 어느새 너는 '100'이 되었다. 밖은 해가 저물어 어둠으로 가득했다. 나는 너를 안고 산을 올랐다. 막연히 산을 오르다 잠시 멈춰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은 유난히 달이 밝았다. 이따금씩 비탈진 언덕에서 발을 헛디뎌 넘어지기도 하고 아무렇게나 자란 나뭇가지가 몸 이곳저곳에 생채기를 내기도 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괜찮았다. 너의 노력과 나의 노력이 헛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하릴없이 산을 오르니 마침내 정상에 다다랐다. 너와 나 그리고 투명한 빛을 내리는 저 달만 존재하는 고요한 장소였다.
 

***
 

  나는 네가 묻힌 자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손바닥을 지나는 모래 알갱이 하나하나가 섬세하게 느껴졌다. 모래 알갱이들을 털어내고 부드러운 흙만 남은 손바닥을 한동안 사부작거렸다. 이제 얼마 뒤면 네가 '폭발'한다. 나는 너의 곁에 배를 드러내고 누웠다. 고요한 장소라고 생각했는데 가만히 귀를 기울이니 바람에 치여 빗소리를 내는 나뭇잎들과 풀벌레의 울음으로 주변이 소란스러웠다. 너는 잊혀 져서 다행이라고, 마지막까지 죽음을 담담하게 대했지만 나는 그것이 얼마나 거짓된 것인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네 곁에서 너의 폭발을 지켜보기로 했다.
 

  무연히 두 눈을 감았다. 지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차가웠던 네가 비로소 뜨거워지는 순간이었다.
 

 “네 말대로, 이제 내 고민은 사라지게 되겠구나.”
 

  그렇게 우리는 폭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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