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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5) 발렌타인 데이
게시물ID : readers_3117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윤인석
추천 : 3
조회수 : 325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8/02/16 10:28:26
오랜만에 그녀의 연락을 받았다. 나도 모르게 '그래'라고 말하고 나와 버렸다. 병신 같은 대답이었다.

'친구끼리 밥 한번 먹는 일이야.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괜찮다고 다독여 봐도 자꾸 주위를 살피게 된다. 그래선 안 되는 거였는데. 지금이라도 일어나야 할까?

"어머. 진철아. 나도 일찍 나온다고 나왔는데 벌써 와 있었네."

막 일어나려고 할 때 그녀가 레스토랑 문을 열고 들어와서 인사를 건넸다. 

아름답다. 허름한 옷을 입고도 빛나던 미모였다. 고급지게 치장하고 나니 날개를 단 듯 더 빛을 발하고 있었다.

"목소리가 참 경쾌하네. 좋은 일 있었어?"

하지만 나도 모르게 뾰족한 목소리가 나왔다.

"호호호. 좋은 일? 있었지. 아참. 여기 발렌타인데이 초콜릿. 미안해. 시간을 맞추려고 했는데 하루 늦어버렸네."

그녀가 내 날 선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핸드백에서 초콜릿을 내밀었다.

"...이러지 마. 밥이나 한 끼 먹자."

"왜? 좋아하는 사람에게 초콜릿 주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어?"

"넌 진짜!"

울컥 화가 치밀어서 내지른 소리가 레스토랑에 울렸다. 주위 시선이 모여드는 게 느껴졌다. 점장인 듯한 사람이 주의를 줄까 말까 고민하는 표정을 하고 있는 게 보였다. 난 그쪽을 향해 슬쩍 고개를 숙여 보이고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불법이지. 간통죄가 사라졌어도 불륜은 불법이야. 손해배상 청구가 가능해."

내가 화를 누르며 말했다.

"어머나. 우리 진철이 그런 건 어떻게 알았어? 날 생각하면서 찾아본 거지? 그렇지? 호호."

"...상식이야."

정곡이었다. 난 무슨 상상을 하며 그런 것을 알아봤던 걸까? 저렇게 빙글거리는 얼굴을 보니 짜증이 솟구쳤다.

올해 초, 5년 동안 사귄 나를 두고 청첩장을 내밀 때도 그녀는 이렇게 웃고 있었다.

그래. 저런 애를 좋아한 내가 병신이다. 내 통장 잔액와 남자 재산을 보고 다 이해가 가서 아무 말 못 한 내가 병신이고, 부른다고 또 나와서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내가 병신이지.

"나 먼저 일어난다."

"잠깐."

그녀가 내 팔을 잡았다.

"괜찮아. 진철아. 받아도 돼."

그녀가 초콜릿을 내밀었다.

"넌 괜찮을지 몰라도 난 아니야."

"호호. 사별한 미망인의 재혼은 불법이 아니니까 괜찮아."

"뭐?"

싱글벙글 웃고 있는 그녀의 미소를 잠시 멍하니 바라봤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보다 빨리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아까 시간을 맞추려 했다는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너... 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후후. 알고 싶어?"

그녀가 나를 자리에 앉히고 내 옆자리로 옮겨 앉았다.

"그냥 몰라도 돼. 지금 중요한 것은 우리가 다시 함께한다는 거잖아. 잠시 네 옆을 비운 대신 내가 정말 잘해 줄게. 기대해도 돼. 그동안 나 보고 싶지 않았어? 후후."

그녀가 내 팔짱을 끼고 귓가에 속삭였다. 팔에 그녀의 부드러운 가슴이 느껴졌다. 달큰한 숨결에 익숙한 체향이 실려 얼굴 근처를 간질였다.

"너 대체 누구야? 너... 좀 제멋대로긴 했지만 이러진 않았잖아.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내가 그녀를 떨쳐내며 말했다. 내가 알던 그녀는 이렇지 않았다. 안하무인에 남의 기분 안 살피고 항상 싱글벙글하긴 했지만 이런 여자가 아니었다. 

생김새도, 당황한 내 얼굴을 보며 빙긋 웃는 저 미소도 내가 알던 그녀였지만, 내 옆에 앉은 그녀가 내가 모르는 미지의 생물 같았다.

"후후. 진철아? 모르겠어? 말없이 결혼한 것도 지금 말 안 하는 것도 다 오빠를 위해서야. 그냥 날 안아주면 안 돼? 다 잘됐다고. 응? 진철아. 우리 지금을 즐기자. 오빠아."

그녀가 다시 내게 안기며 애교를 부렸다.

"안돼. 지금 말하지 않으면 다신 널 보지 않을 거야. 정말 네가...그랬어?"

난 그녀를 어깨를 붙잡고 밀쳐냈다.

"하여간 너는. 후후. 그래. 그런 게 또 오빠의 매력이지. 그래. 다 끝난 일이니 이제는 문제없을 것 같아."

그녀가 뾰로퉁한 표정을 짓더니 금세 다시 웃어 보였다. 예쁘다. 이 상황에서도 문득 그렇게 생각한 내가 혐오스러웠다.

"진철아. 내가 화학과 나와서 XX 화학 회사 연구원으로 취직했었잖아."

"그래."

"그런데 거기 회장님이 날 한번 보더니 비서실로 발령내더라고. 네가 보듯이 내가 좀 예쁘잖아. 연구원복 입어도 어쩔 수 없이 눈에 띈 거지."

"너 그런 말 안 했잖아."

"그거야. 의도가 뻔한데 네가 좋아할 리 없잖아. 애써 입사했는데... 일단 그만둘지 말지 조금만 지켜보고 결정하려고 했었어. 평상시엔 별다른 일 없었어. 그냥 비서 일 했지. 그래서 그냥 예쁜 꽃으로 뽑혀 왔나 싶었어. 그 정도면 나쁠 게 없잖아? 월급도 올랐고... 어머. 그런데 회장이란 인간이 주사가 장난이 아닌 거야."

그녀는 어머 하며 입을 손으로 가렸다. 다채로운 표정과 연기가 동화 구연을 하는 것 같았다.

"술만 마셨다 하면 앉혀 놓고 술 따르라 하고 여기저기 막 만지고. 아우. 정말. 못된 인간이었다니까. 그렇지?"

"X새끼! 불알을 걷어차고 당장 그만뒀어야지."

나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다음 순간 아차 했다. 그 회장은 지금 그녀 손에 고인이 되어 있는 것이었다.

"호호. 역시 우리 진철이 밖에 없어."

그녀가 다시 기대왔다.

"...그래서 그랬어? 네가 네 손으로?"

"어머. 난 사실 아무 죄 없어. 끝까지 들어봐."

그녀가 내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난 꼼짝 못 하고 침을 삼켰다. 죄가 없다니. 그저 사고일지도 모른다.

"나도 그만두려고 했지. 그런데 하루는 이 인간이 작정했는지 늦게까지 야근을 시켰어. 그리고는 술을 진탕 먹고는 날 회장실로 부르지 않겠어? 그리고는 뭐... 힝. 당해버렸지. 그런데 일이 끝나고 찢긴 블라우스를 다시 집어들다가 문득 든 생각이... 옷이 너무 허름한거야. 갑자기 우리 진철이 구멍이 늘어난 허리띠도 생각나고. 그 순간에도 난 우리 진철이 생각뿐이었다니까."

그녀 손길이 이제 얼굴까지 올라왔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게 해 눈을 맞추었다. 코끝이 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아. 우리 진철이 예쁘기도 하지. 후후. 왜 이렇게 얼어있어? 괜찮아. 다 지난 일이고 잘 됐어. 그래. 그때든 생각이 이런 허름한 옷을 입고 있어서 당하는구나. 그리고 이 회장이란 인간은 좀 당해도 괜찮겠구나. 였어."

"아깐 죄가 없다며?"

난 다시 그녀를 밀어내며 말했다.

"아이참. 끝까지 들어봐. 그래서 집어 든 구질구질한 블라우스를 놓고 다시 안겼어. 호호. 이렇게 웃으면서. 머릿속에 회장을 정말 사랑하는 가상의 나를 하나 만들었지. 그렇지 않으면 토할 것 같았으니까. 남자들은 잡은 고기에는 먹이 안 준다지만 그거야 웬만큼 예쁜 여자에게 그렇지. 나만큼 예쁜 여자가 자기를 죽어라 사랑하기까지 하는데 어느 남자가 안 넘어가겠어? 회장이 살살 녹아서 결혼까지 하는데 한 6개월 걸렸나?"

"너... 그때부터였던 거야?"

확실히 그때쯤부터 잦은 야근에 연락이 안 되는 일이 잦았다. 회사가 바쁘다며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었다.

"응. 그런데 제 버릇 개 주는 것도 아니고 날 만나면서도 애인 한둘은 있는 눈치더라고. 그럴 줄 알았지. 모른 체하고 정력제랑 정력에 좋은 음식까지 챙겨줬어. 어찌나 좋아 하던지. 후후. 그리고 결혼하고서는 다른 애인들에게 줄 법한 선물까지 챙겨 줬지. 거래처에 선물하실 데 있으면 쓰시라고 목걸이에 팔찌에 내가 직접 제조한 향수까지."

"그... 복상사로 죽기라도 한 거야?"

"어머! 진철아! 너 머리 좋다. 호호. 역시 내 남자야. 비슷해. 70점 줄게. 호호.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언제 네게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잖아. 난 네게 발렌타인데이 초콜릿을 주고 싶었단 말이야. 그래서 열심히 준비했지. 화학과 나와서 배운 것 중에 신기한 것들이 많아. 따로 떨어져 있을 때는 전혀 유독하지 않은데 합쳐지면 큰일 나는 친구들이 많거든. 나눠 먹더라도 체내에서 만나면 위험한 것들도 있어. 몸 속에서 쾅! 하는 거지."

그녀가 테이블에 있는 초콜릿과 휴지 한 장을 집어 들고 부딪히는 시늉을 해보였다. 장난스러운 태도였다.

"그걸 정력제에 조금, 향수에 조금 나눠 담았어. 소량이라도 두 가지를 함께 '먹으면' 큰일인 친구들이야. 하지만 내가 무슨 죄가 있어? 지금도 그날 같이 벌거벗고 있던 여자'들'만 경찰에 시달리고 있어. 걱정 마. 몸에 뿌린 향수는 이미 증발해 버렸을 테고. 혹시 정력제와 향수병에든 성분을 알아내더라도... 설마 아내가 준 향수라고 말하면서 애인에게 줬으려고? 호호. 마지막으로 설령 그렇다 해도 난 설마 두가지를 같이 먹을지는 상상도 못 한거야. 하나 하나는 무해하고 향수와 정력제에 어울리는 물질이거든. 보통 정력제를 먹고 거래처에 선물한 여자 항수를 먹을 일이 뭐가 있겠어? 그렇지 않아? 난 아무 죄가 없어. 진철아."

"너... 어떻게 그런 일을..."

"호호. 진철아. 난 지금 기분이 좋아. 일도 다 계획대로 끝났고. 너도 이렇게 다시 만났고. 같이 기뻐해 줄래?"

혼란스러웠다. 그녀가 겪었던 일과 회장의 죽음. 정말 괜찮다 해도 되는 일인가?

"후후. 진철아. 난 예전처럼 그냥 예쁜 여자가 아니야."

그녀가 초콜릿 포장을 벗기며 예쁘게 웃었다.

"300억과 중견 기업 주식을 상속받은 예쁜 여자야. 애써 준비했는데 이거 안 먹을 거야?"

그녀가 초콜릿을 토막내 입에 살짝 물었다. 그리고 내 뺨을 잡고 아주 천천히 다가왔다.

입술과 함께 넘어온 초콜릿이 천천히 우리의 입안에서 녹아갔다. 달콤 쌉싸름한 맛이었다.

"후후. 우리 진철이 착하다."

그녀가 입술을 떼고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걱정 마. 우리 진철이는 착해서 바람 같은 건 안 피울테니까."

난 남은 초콜릿을 꿀떡 삼키고 병신같이 머리를 끄떡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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