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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 붉고 푸른 입술 /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이야기입니다.
게시물ID : readers_3160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공백의시간에
추천 : 1
조회수 : 932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8/04/29 00:2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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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고 푸른 입술 


등장인물 

양금덕   (99세)
소녀     (14세)
여자     (37세) 
여배우   (26세)
남배우   (45세)

무대

세 개의 문이 달려 있는 방. 마당 장독대에는 장독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장독 뚜껑에는 돌이 올려 져 있다. 양금덕, 전기장판이 깔린 이불속에서 끙끙 앓는 소리를 낸다. 문 두드리는 소리 수시로 들리지만 일어나지 않는다. 다락방이 있는 천장에서 쥐들이 뛰어다니는 소리 들린다. 그녀, 전등 스위치를 찾아 벽을 더듬거린다. 전등, 오래 깜박이다가 켜진다. 양금덕, 지팡이를 들고 다락방으로 올라갔다가 쥐덫에 걸린 쥐와 함께 내려온다. 양금덕, 수저가 꽂힌 가운데 문을 열고 쥐를 풀어준다. 오랫동안 문을 닫지 않고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리는 밖을 걱정스럽게 내다보다가 다시 수저를 문고리에 꽂는다. 다시 이부자리에 눕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구식텔레비전이 놓인 서랍장으로 기어가 채널을 돌린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볼륨을 높인다. 지지직거리는 소리 커진다. 

소녀  : 할머니, 주무세요? 할머니, 느티나무 집 셋째 딸인데요, 할머니, 문 좀 열어 주세 요.


 수저가 꽂힌 세 개의 문 모두 들썩인다. 양금덕, 텔레비전을 끄고 지팡이를 들고 문 앞에 선다. 왼쪽부터 차례로 문을 열다 마지막 남은 문 앞에서 숨을 헐떡이며 멈춰선다. 


소녀  : 할머니, 주무세요? 할머니, 느티나무 집 셋째 딸인데요, 할머니, 문 좀 열어 주세요. (목소리 커진다) 할머니, 주무세요? 할머니, 느티나무 집 셋째 딸인데요, 할머니, 문 좀 열어주세요. 


 임신한 소녀의 실루엣 창호지 문에 비친다. 양금덕, 창호지 문에 구멍을 뚫고 밖을 내다보다가 깜짝 놀라 바닥으로 나자빠진다. 


양금덕: 귀, 귀신이면 물러가고 사람이면 들어와라. 
소녀  : 할머니 주무세요?
양금덕: 너는 도대체 누군데 문을 열면 물러나고 문을 닫으면 문을 열라 성화인거냐?
소녀  : 할머니, 느티나무 집 셋째 딸인데요, 
양금덕: (문을 열고) 그 놈의 징글징글한 느티나무! (지팡이를 휘두르다가 문 밖으로 내던진다)
소녀  : (졸리는 목소리로, 방으로 들어오며) 할머니 주무세요. 
양금덕: 썩을 년! 너 때문에 입 돌아가시겠다. (문을 열어둔 채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찬바람이 쌩쌩 분다)
소녀  : (이불을 뒤집어쓰며) 할머니 불 좀 꺼주세요.
양금덕: 너는 손이 없냐? 발이 없냐?
소녀  : 느티나무 집 셋째 딸인데요. (코를 골며 잔다) 
양금덕: 느티나무는 무슨 (불을 끈다) 


 코고는 소리 들리다가 순각 뚝 꺼진다. 불 다시 켜진다. 양금덕, 이불 속에서 벌떡 일어나 소녀가 누웠던 이부자리를 들춘다. 휑한 방. 문풍지를 두드리는 바람. 


양금덕: (문을 닫으며) 고얀 년! 올 때는 온다고 하고 잠도 못 자게하고 갈 때는 간다고 말 도 안 해 곤한 잠을 깨우네. (수저를 문고리에 꽂으려다 말고, 문밖을 내다보며) 밤도 깊었는데 하룻밤 자고 아침에 갈 것이지. (문을 닫는다, 문고리에 꽂을 수저를 비녀마냥 꽂고 주저앉아 먼 산을 보는 표정으로 손거울을 들여다본다) 머리는 허옇게 세었으나 얼굴은 붉고 윤이 나는 것이, 오래 전 잃어버린 사진 한 장 다시 찾은 것 마냥 반가운 것이, 참말로 이상하다, 이상해. 


 양금덕, 조명을 온몸으로 받는다. 등 뒤로 느티나무 가지 그림자 축 늘어진다. 날이 밝는다. 그림자 사라진다. 양금덕, 앉아서 졸고 있다. 


여자  : (문을 열고 들어와 양금덕,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살아계셔요?
양금덕: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나며) 아이고, 깜짝이야. 애기 떨어지겠다, 이것아. 
여자  : 누워서 주무시지 않고, 왜, 또, 앉아서 주무세요?
양금덕: 잠을 자려고 하면 잠이 안와. 
여자  : 허리도 안 좋으신 분이 그리 주무시다가 허리라도 나가면 어쩌려고 그러시는지.
양금덕: 지팡이 짚다가 안 되면 휠체어 바퀴라도 밀고 휠체어 바퀴라도 밀다가 안 되면 관 뚜껑이나 닫아야지, 어쩌겠나? 
여자  : 관에 못질은 누가하구요?
양금덕: 네 년이 하면 되지. 
여자  : 관 뚜껑에 흙은 누가 뿌리죠?
양금덕: 그것도 네 년이 하면 되지.
여자  : 그 안에서도 졸음이 확 달아나면 어쩌시려고요?
양금덕: 뜬 눈으로 저승길로 뜨내려가지, 뭐. 
여자  : 장례비는 누가 내구요?
양금덕: 집…보증금…받아서 네가 내면 되지. 
여자  : 월세도 밀리셨다면서요.
양금덕: 왜 싫으냐?
여자  : 싫은 건 아닌 데 좋은 것도 아니네요. (사이) 다른 건 모르겠고, 저승 밥은 꼭 챙겨 드릴게요. 
양금덕: 저승 밥 싸가지고 다닐 일 없다. 
여자  : 그럼 이승 밥이라도 저희 집에서 같이 드세요. 
양금덕: 일 없다!
여자  : 어제 저녁도 못 드셨잖아요. 
양금덕: 속도 메스껍고 골이 핑핑 도는 것이. 
여자  : 닭백숙도 있고 뭇국도 있고 홍시도 있고.
양금덕: 닭백숙도 일 없고 뭇국도 일 없고 홍시도 일 없다. 
여자  : 밥을 일이 있어야 먹나요? 
양금덕: 밥은 먹을수록 슬퍼지는 법이다. 
여자  : 그러니 같이 먹어야지요. 
양금덕: 간신히 혼자 잘 참고 버티던 것도 다 같이 하는 버릇을 하면 견딜 수 없는 일이 되는 법이다. 
여자  : 밥을 굶는 게 견딜 수 없는 일이 되어야 맞는 것 아닌가요? 밥을 꼬박꼬박 챙겨 드셔야 약발도 잘 서죠. 
양금덕: 밥이든 약이든 많이 먹으면 죽을 때 힘들어지는 법이다. 
여자  : 죽을 때 힘든 것보다 살 때 덜 힘든 게 좋은 것 아닌가요? 
양금덕: 살날이 더 많은 사람과 죽을 날만 기다리는 사람이 같겠느냐? 
여자  : 다를 건 또 뭐가 있겠어요. 
양금덕: 다를 것도 없지만 같은 것도 없다. 


 양금덕, 돌아눕는다. 여자, 한 참을 내려다본다.


여자  : 석가께서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자마자 일곱 발자국을 걸어가 외친 한마디가 뭔 줄 알아요?


 양금덕,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다. 


여자  : (문 밖으로 나가며) 엄마, 배고파, 밥 줘, 라고 했데요. 
양금덕: (짧은 침묵) 참내, 어이가 없어서…헛웃음이…다 나오네. 밥은 내가 알아서 챙겨 먹을 테니, 너는 네 할 일이나 하면서.


 여자, 없다. 양금덕, 닫힌 문을 불안하게 바라본다. 이 때 방안은 어두컴컴하고 문 밖은 훤하다. 양금덕, 문 밖으로 나가면 방안 다시 환해지고 문 밖은 어두컴컴해진다. 아궁이에 나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 부지깽이로 토닥토닥 불을 다스리는 소리, 닭 잡는 소리, 칼등으로 마늘 다지는 소리 경쾌하다. 양금덕, 밥상을 들고 방안으로 들어온다. 밥상위에 수저가 없다. 양금덕, 머리에 꽂은 수저를 은장도마냥 뽑는다. 


양금덕: 까마귀밥이 따로 없다. 그지?

      사이, 텔레비전 켠다. 생중계 마이크를 든 여배우 텔레비전 앞에 선다. 경직되어 있다. 

양금덕: 까마귀들도 혼자 밥은 안 먹어. 

      사이, 여배우 밥상 아래를 내려다본다. 입맛을 다시다가 다시 경직된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본다. 남배우 목소리 작다. ‘일본의 정재계 인사 무려 3100명이 중국을 방문했습니       다. 일간 센카쿠 영유권 분쟁 이후 최대 규모입니다. 아베 총리의 친서를 시진핑 중국       주석에게 전달하고 기업과 문화 교류 등을 확대할 방침이라고 하는데, 우리보다 더하       면 더 일본을 싫어하는 중국이 실리 외교로 방향을 잡은 뒤 중일 관계로 물꼬를 트고       있습니다. 진달래 기자입니다.’ 여배우, 멀뚱멀뚱 서있다. ‘진달래 기자…진달래기자?’ 양       금덕, 볼륨을 높인다. 

여배우: (깜짝 놀란다) 이, 일본…자민당…내 친 중파…니…카이도시히로……(목소리를 가다듬는다) 니카이도시히로 총무회장이 국회의원과 기업인 등 문화계인사 등으로 꾸려진 3100명 사절단을 이끌고 중국을 찾았습니다. 센카쿠 영유권 분쟁이 본격화한 이후 3년 만에 최대 규모의 사절단입니다. 문화 관광교류라는 목적을 내걸었지만, 실질적으론 정치 관계 개선을 위한 움직임이라는 분석이 짙습니다. 6일간의 방중 기간 중 니카이 회장은 시진핑 주석의 후계자로 유력한 후춘화 광둥성 당서기를 접견하고, 시진핑 주석과도 만나 아베총리의 친서를 전달할 예정입니다. 중국 측에서도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대규모 환영 행사를 열기로 하며 반기는 모습입니다. 양국은 지난해 11 월 양제츠 외교담당 국무위원과 야치 쇼타로 국가안보국장이 관계개선 4대원칙에 합의하며 대화의 물꼬를 튼 후, 지난달엔 시진핑 주석과 아베 총리가 만나 관계 개선의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한때 전운이 감돌던 중일 관계가 대규모 민간 교류로 해빙기에 들어선 모습입니다. (화면 바뀐다) 
        

 남배우 텔레비전 앞을 가린다. ‘요즘 이른바 순한 술을 선호하는 애주가가 늘면서 이제는 알콜 도수가 14도인 소주까지…….’ 양금덕, 채널을 돌린다. 남배우 퇴장. 


양금덕: 막장드라마나 볼까? 
      
      사이

양금덕: 아침대절부터 욕이나 하려고?

      사이

양금덕: 욕이나 하면서 보는 게 드라마야. 

      사이

양금덕: 울화병이나 도지지 않으면 다행인 게 드라마지.

      사이

양금덕: 잘 만 보면서 또 그런다. 

      사이

양금덕: 뭔 놈의 광고가 이리 길어, 했던 거 또 하고 또 하고. 

      사이

양금덕: 뭔 놈의 말이 그리 많아.

      사이
      
양금덕: 입이 심심해서 그렇지.

      사이

양금덕: 그러면 닭다리라도 들고 씹던가.

      사이

양금덕: 이 없다.

      사이

양금덕: 그러면 닭 껍질이라도 입속에 넣고 있던지. 

      사이

양금덕: 마늘은 뒀다 뭐하려고 그러는지, 생닭비린내가 진동한다, 진동해. 

      사이

양금덕: 그리 심하면 콧구멍에 휴지라도 쑤셔 박고 먹든지. 

      사이

양금덕: 일 없다. 

      사이 

양금덕: 누구를 닮아 입이 그리 짧은지. 


 드라마, 시작된다. 여배우, 위안부 소녀상과 같은 복장 같은 자세로 마루에 앉아있다. 양금덕, 밥을 꾸역꾸역 먹다, 말다, 한다. 


여배우: 꽃이 피어 분다. 돌에서 꽃이 피어 분다. 사시사철지지 않는 만년 꽃이어라. 
남배우: (무대 위로 뛰어 들어온다, 목소리를 낮추며) 어여, 들어가! 누가 보문 어짤라고 그래 나와쌌냐?
여배우: 아부지, 쥐구멍에 눈 들어가문 보리농사 흉년이랍디다. 
남배우: 이, 가시네가 더위를 처묵었나. (주변을 살피며) 야야! 그라고 있으문 큰일 나분께, 어여, 들어가. 싸게싸게 들어가야. 너 그라고 있다가 일본순사가 잡아가 불면 어쩌크름 할라고 그래쌌냐?
여배우: (사방을 둘러보며) 이러코롬 캄캄한디 누가 본다고 그런다요. 


 고양이가 운다.


남배우: 까불지 말고 들어가야.
여배우: 가심아데기가 아파가꼬 못 들어가겄시라. 
남배우: (손목을 잡아당기며) 주댕이 닥치고 들어가부랑께. 
여배우: 아부지, 구시 통만 한 구멍 속에 몸 개린다고 앙겄더니 몸이 돼가지고 시방은 못 들어 가겠당께, 그라요. 
남배우: 앗따, 어찌아스까나. 
여배우: 마루 밑을 낙낙허게 파불든가, 그럴거 아니문 깃말말고. 
남배우: (마루 밑으로 기어 들어간다) 째깐한게, 까시롭게끔. 
여배우: 아부지, 급하게 하지 말고 찬찬히 해야. 
남배우: 냅둬야. 
여배우: 성가시럽다고 구녕을 나찹게 파지 말고 야물게, 깨껏허게. 
남배우: 따대기지 말고 저리 가부러야. 
여배우: (마루 밑을 들여다본다) 심들지라. 
남배우: 비가 올맹기로 삭신이 다 쑤셔분다. 
여배우: (하늘을 올려다보며) 달이 붉은 것이 내일은 바람도 없이 가물겄시라. 
남배우: 다 파불었다. 
여배우: (마루 밑을 들여다본다) 아부지, 대그빡에 가리메가 안보일 만큼 파부소. (떠날 사람 마냥 집을 찬찬히 둘러보다) 발도 좀 뻗게 귀영치도 좀 널찍허니 파불고. (고무신을 신으며) 그래 가꼬 되겄소잉. 내도 안보일 만큼 구녕을 파불어부러야 순사가 와도 못찾지라. (마루 밑에 구멍을 수시로 확인하며, 말을 하다말다 하다가, ) 아부지, 아까녁에 간나구가 왔다갔소. 
남배우: 뭐라 씨부리는겨. 잉?
여배우: 집구석 싹 더터갖고……가불었다, 안하요. 
남배우: 시방 뭐라고 하는 겨? 내는 하나도 안 들려 분다. 
여배우: (마루 밑을 들여다본다) 간나구 새끼가 왔다갔당께. 
남배우: 왜눔 앞잡이 새끼? 걔가 와? 설마 들켜분겨?
여배우: 구녕에 쪼그려 앙겄는디 배가 꼬르륵꼬르륵 거려가꼬. 
남배우: (한 참을 말이 없다) 참 말이여? 
여배우: 아부지 오늘따라 기똥차게 달이 밝아부러야. 
남배우: 참말이냔께. 
여배우: 거지깔인것 같기도 허고 참말인 것도 같고. 
남배우: 근께, 참말이란겨, 거짓깔이란겨?
여배우: 집구석 싹 더터갖고 그 새끼가 왔다갔는가, 부텀 참말이요. 
남배우: 글문? 그란께, 니 말은……(나오려고 발버둥 친다) 아가, 손 좀 디밀어봐라. 
여배우: (제 손을 움켜잡으며) 쌔쌔쌔, 라도 할라 그라요. 근께 구녕을 파불드라도 나올 맹큼 파부러야재. 안하요? 
남배우: 귀싸댕이를 날려불라. 어서 되도 않는 소리여? 
여배우: (깔깔깔 웃는다) 그 구녕에서 귀싸대기를 어찌 날려불라요. (마루 밑으로 기어들어 간다) 
남배우: 니 나가 역서 나가기만 하문 디지는 수가…있어. 나가 못나가 불 것 같은가 본디, 고것은 참말로 오산이여. (사이, 나무 덮개에 돌 올리는 소리 들린다) 워매매, 시방 너 뭐다냐? 우짤라고 뭐땜시 그러는 것이여? 
여배우: (온몸을 땀으로 범벅을 한 채 마루 밖으로 기어 나온다, 숨을 헐떡이다 숨을 고르게 가다듬으며) 오늘 날씨 한 번 허벌나게 덥구마잉. (나무 덮개 들썩이는 소리 듣다가) 아부지. 
남배우: 와?
여배우: 미안허요. 
남배우: (들썩이다 말고) 간나구 새끼가 왔다갔다드만 참말인갑네. 글문 도망가야재, 니 와 그러고 나와 있는겨? 잉? 내는 와 이리 해부르고………안 돌아가는 대그빡은 왜 굴리고 지랄이냐, 이 말이여. 
여배우: 다 디진답디다. 
남배우: 무신 소리여? 디지긴 누가 디진다고……재, 재구?
여배우: 망루에 목매달아불고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발겨서 강생이 밥으로 준답디다. 
남배우: 재구, 금마를……. 
여배우: 간나구가 그러든디 나가 어처크름 하느냐에 따라 오라버니를 죽여 불수도 살릴 수도 있답디다.  
남배우: 거지깔이여. 
여배우: 거지깔이든 참말이든 어처크름은 해봐야지라. 
남배우: 니, 참말로, 모지래분다.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알아불것냐? 무담시 골로 갈라고…….
여배우: 거지깔로 디지든 참말로 디져불든 걱서거기문 버둥거려봐야지라. 
남배우: 그 새끼 싸가지 없능거, 무신 소리로 니를 꼬셔불었는가, 모르겄지만 서도. 개똥밭에서 굴러봤자, 다 개똥인 것이여. 
여배우: 그건 그라제. 
남배우: 근께 아부지 환장하게 하지말아불고…….
여배우: (무대 정면을 보며) 근디 아부지, 간다구가 와부렀소. 내 맨사댕이 보고자퍼         와부렀소. 내 맨사댕이 보둠고 보새기에 빠알간 피 담그게 해주믄 첩살이라도 시켜준답디다. 그라믄 오라버니도 디지게 않고 아부지도 디지지 않게 해준답디다. 내는 암시랑 안헌께 걱서 쪼매만 얌전히 있어불지라. 


 마루, 들썩인다. 여배우, 흔들바위마냥 마루에 앉아있다 방으로 들어간다. 불 꺼진다. 방문만 훤하다. 마루 밑에는 일본군화와 꽃신 놓여있다. 고통에 가득 찬 신음소리, 매 맞는 소리, 울음소리 뒤섞이다 멈춘다. 간신히 마루 밑에서 기어 나온 남앵커, 낫을 들고 방문을 응시하다 문이 슬며시 열리자 마루 밑으로 들어가 몸을 숨긴다. 불 꺼졌다 켜진다. 여기자 방문을 열고 힘없이 걸어 나와 마루에 털썩 주저앉는다. 


여배우: 아부지, 겁나게 덥쟤. 
남배우: (긴 침묵) 아따, 겁나게 더워, 디져불겄다.
여배우: 아부지, 겁나게 배고프쟤. 
남배우: (마루 밑에서 기어 나오며) 수박 통하나 따다가 수저로 긁어먹어 불자. 
여배우: (짧은 침묵) 아부지, 다, 봤쟤. 
남배우: (하늘을 올려다보며) 보긴 뭘 봐야. (사이) 쏘내기가 내려 불겄는디. 싸게싸게 밭에 갔다와야쓰겄다. (무대 밖으로 뛰어나간다)
여배우: (긴 침묵) 야문 놈으로 가져와부소. 


 정적. 여배우, 멍하니 앉아 있다가 빨갛게 물든 새하얀 속바지를 들춰본다. 발목 아래로 피가 흘러내린다. 남배우, 수박을 들고 나온다. 여배우 치마를 내리고 옷매무새를 가다듬는다. 


여배우: 아짐챤하게 시리 덜 익었고만. 
양금덕: (텔레비전 볼륨을 낮추며) 쪼매 덜 익었다. 
남배우: (수박을 마루에 내려놓고 반으로 가르며) 쪼매 덜 익었다. 
양금덕: 수박에 설탕이라도 좀 쳐불어야쓰겄는디.
여배우: 수박에 설탕이라도 좀 쳐불어야쓰겄는디. 
남배우: 소금이라도 뿌려불까?
여배우: 짜게끔시리. 
남배우: 쪽국 놈들은 수박에 소금 뿌려 먹는갑드라. 
양금덕: 닭고기도 아니고 소금을 찍어 먹는 건 또 뭐래. 
남배우: 염빙하게도 먹어불쟤? 
여배우: (수박을 수저로 박박 긁어 먹으며) 솔차니 시원허요. 
남배우: (수박을 수저로 박박 긁어 내밀지만 차마 눈은 마주치지 못한다) 달아불쟤?
여배우: (고개를 푹 숙인 채 수저로 수박을 박박 긁어댄다) 다디달아서 혀도 녹아 불겄네. 
양금덕: 징합다. 혀가 녹아 불믄 쓰나. 
남배우: 징합다. 혀가 녹아 불믄 쓰나. 울고 잡고 원망하고 잡고 하믄 해야. 뭐땜시 참아부냐? 
양금덕: 씨롭쟤? 
남배우: (양금덕이 앉은 자리를 안쓰럽게 바라보다) 씨롭쟤? (여기자 손을 맞잡는다) 
여배우: (양금덕이 앉은 자리를 아프게 바라보다) 암시롱 머땜시물어보냥께. 어색시럽게…….
양금덕: 암사타내야.
남배우: 아부지 옆에 뽀짝뽀짝 앉아봐야. 
여배우: (손을 뿌리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배고프쟤. 나가 퍼뜩 밥을 지어 올려불랑께. 쪼매만 앙거서 기다려부소. 
남배우: 달래야, 나가 할랑께, 니는 몸 개볍게 나댕기지 말고 가만히 좀 있어야잉. 애비 가심애피게 하지 말고.
여배우: (뒤돌아서서 훌쩍이며) 나가 언제 헤프게 굴었다고 그래분다요. 
양금덕: (소매자락으로 눈물을 훔치면서) 카만두면 될 것을 무담시 건드러 울려 분다냐?
남배우: 아따, 아부지 말은, 거시기가 거시기 헌께, 거시기 하란 말이잖여. (달래듯이) 아부지 말을 곡해해서 듣지 말고, 잉?, 나 말은 거시기가 거시기해서 쪼매 씨로운께, 거시기 뭐냐, 발정난 갠댁이 마냥 앓는 소리 내지 말드라고……(사이) 그니께, 나 말은 그 거시기가 거시기가 아니랑께. 근께 그래 울어 불지 말고. (보듬어 안아주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잠시 망설이다 부엌으로 들어간다) 나가 화딱지가 나서 못 살아불겄어서……, 그래야. 참아 볼라 캐도 천불이 나서 못 살아 불겄다, 안하냐? (닭 잡는 소리, 장작 태우는 소리, 물 끓는 소리) 미안해야. 근께, 울음 뚝 끊어 불고 그 뭐시냐, 그 거시기로 넘어가불자. 앞산 넘어 불고 뒷산 밀어 불고 산을 밀어 가는 강 마냥 가다 불면 있잖여. 
양금덕: (텔레비전 볼륨을 끈다, 남앵커 립싱크를 하듯 입을 움직인다) 간장·된장·고추장……, 고춧가루·김치·깨·소금……같은, 사람 사람 시람들이 이리만내고 저리 만내고 살믄서 큰 독을 뒤쪽에 둬불고 작은 독은 앞쪽에 놓아 불고 감나무가 감똥을 떨구면 떡을 쒀 묵을까, 차나 맹글어 묵을까, 나차운 담장 아래 평상에 앙거서 작은 절에 괴가 두 마리라, 작은 절에 괴가 세 마리라, 작은 절에 괴가 네 마리라, 작은 절에 괴나 세면서(사이, 소녀 마당을 기웃거린다)……그러코롬……그람시로……그라면, 그라제. 


 텔레비전 꺼진다, 여배우 남배우 퇴장. 


소녀  : (장독 안을 일일이 들여다보며) 어디어디 숨었나? 꼭꼭 숨었네, 어디어디 숨었지? 꼭꼭 숨어라 꼭꼭 숨어라. 텃밭에도 안 된다 상추 씨앗 밟는다. 꽃밭에도 안 된다 꽃모종을 밟는다. 울타리도 안 된다 호박순을 밟는다. (대빗자루를 들고 발뒤꿈치를 들고 살포시 마루로 향한다, 마루 밑을 들여다보면서) 꼭꼭 숨었네. 꼭꼭도 숨었다. (대빗자루로 마루 밑을 훑는다, 검은색 고무신, 흰색 고무신, 고무신 안에 털이 달린 신발이 마루 밖으로 굴러 나온다) 종종머리 찾았네, 마루 밑에 숨었네. 까까머리 찾았네, 마루 밑에 숨었네. 빨간 댕기 찾았네, 문짝 뒤에 숨었네. 
양금덕: (화면이 까맣게 꺼진 텔레비전을 손바닥으로 내려치며) 썩을 년! 
소녀  : (풍만한 배를 어루만지며) 작은 여자 뱃속에 괴가 두 마리라, 작은 여자 뱃속에 괴가 세 마리라, 작은 여자 뱃속에 괴가 네 마리라, 작은 여자 뱃속에 괴나 세어가면서……

        
 무대 고요하다. 텔레비전 까만 화면을 한참 동안 응시한다.


양금덕: (목소리를 높이며) 오메, 이런, 개만도 못한 연놈들을 봤나. 
소녀  : 남은 밥 좀 주세요. 
양금덕: 에고, 에고, 그래도 사람이 개를 물면 쓰나. 
소녀  : 할머니, 제 말 안 들리세요?
양금덕: 아내는 목 졸라 죽이고 차는 강에 빠뜨리고……, 잘하는 거라고는 오입질밖에 없는 놈이, 돈 맛은 또 알아가지고. 
소녀  : 할머니, 배고파서 죽겠어요. 
양금덕: 저런 호랑이가 물어갈 놈! 
소녀  : 저는 괜찮은데 뱃속에 아가가 며칠 째 굶었어요. 
양금덕: (문을 슬며시 열며) 홀몸도 아닌 것이. 
소녀  : (걸신들린 사람마냥 닭 뼈를 핥으며) 맛있네요. 
양금덕: (물그릇을 밥상위에 갖다 놓으며) 체할라, 천천히 좀 먹어라. 
소녀  : (소복한 밥그릇을 내민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파요. 애기가 몇이나 들어 선 건지. 
양금덕: 한 숟가락이라도 뜨고 그런 말을 하든가. 
소녀  : 네? 
양금덕: 아니다, 아니야. (소복한 밥그릇을 밥통에 엎고 주걱으로 밥을 새로 뜨며) 밥은 많으니까 더 먹고 싶으면 말해. 
소녀  : 할머니도 좀 먹어요. 
양금덕: 나는 네가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불러. 
소녀  : 하긴…….
양금덕: 응?
소녀  : 다 까맣게 까먹었으니 배부를 수밖에. 
양금덕: 응?
소녀  : 서울말도 곱상하게 잘하고 내 얼굴도 기억 못하는 게 꼭 다른 사람 같아요. 
양금덕: 그러는 너는……. 
소녀  : (소복한 밥그릇을 밥통에 엎고 주걱으로 밥을 새로 뜨며) 드셔요. 
양금덕: 배부르다니까, 그러네. 너나 좀 많이 먹어라. 어째 밥 한 숟가락도 뜨지 않고……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프다고만 그러는 것이냐?
소녀  : 할머니가 먹어야 저도 배가 부르죠. 
양금덕: 참말이지? (밥 한 그릇을 꾸역꾸역 해치우며) 이제 배부르냐?
소녀  : 거지깔인데, 그걸 믿어요? 바보같이. 
양금덕: (헛구역질을 하며) 썩을 년!
소녀  : (헛구역질을 하며) 가슴에 묻은 건 억울하고 원통해서 썩지도 못해요. 
양금덕: 뭐가 그리 억울하고 뭐가 그리 원통하냐?
소녀  : (양금덕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뒤돌아서며) 뭐, 그런 게, 있어요. 
양금덕: (소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뒤돌아서며) 뭐, 그런 게, 어디 있는데?
소녀  : (관객석을 보며) 말하고 싶지만 듣고 싶어 하지도 않잖아요. 
양금덕: (관객석을 보며) 누가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나는 듣고 싶으니까, 억울하고 원통한 거 있으면 속 시원하게 털어놔봐. 
소녀  : 거지깔! 꿈에도 생각하고 싶지 않으면서……, 꿈속에라도 나올까봐 잠도 못         자면서……, 눈 감으면 꿈이라도 꿀까봐 죽지도 못하면서……. 
양금덕: 그래, 그렇지. (사이) 그런데……, 글문, 그러코롬 잘 알아불믄서 니는, 와, 내 방문 앞에서 뭐땜시 구신마냥 알짱거리냐, 이 말이여. 밥이나 묵으러 와부렀으믄 그럭이나 깨껏허게 비우고 가불든가, 제기그릇에 흰밥올려 분 마냥 와먹는 시늉만 해부냐, 이 말이여. 시람 참 깝깝허게 시리. 묵을 것도 아님서, 허천병 걸린 사람마냥 자꾸 밥 달라고 가만있는 시람, 맬갑시 건드냐, 이 말이여. 내 말이. 
소녀  : (깔깔깔 웃다가 웃음을 뚝 그치며) 다 까먹은 줄 알았는데 다 안 까먹었네요. 
양금덕: 뭘?
소녀  : 아니에요. 
양금덕: 껄적지근헌년! 
소녀  : (방문을 활짝 열고 나와 마루에 걸터앉으며) 날도 괜히 멩고롬허고, 허리도 쑤신 것이, 비설거지해야 쓰겄네요. 
양금덕: (소녀 옆에 앉는다) 쪼깐한 것이 쑤실 허리가 어데 있다고……. 
소녀  : 째깐해도 애 엄마인데 못하는 소리가 없네요. 
양금덕: 아 ―가  아 ―를 낳는 고만. 골반도 쪼꼬매가꼬 아, 낳다가 아, 죽어불믄 어찌아쓰까나. 
소녀  : 아, 눈에는 아, 만 보이고 어, 눈에는 어, 만 보인데요. 
양금덕: ‘아’다르고 ‘어’다른 것 아니고?
소녀  : 아기 눈에는 아기만 보이고 어미 눈에는 어미만 보여요. 
양금덕: 근께, 니 말은 나가 얘기란 말이여?
소녀  : 다 늙으면 애가 된데요. 
양금덕: 바람 빠진 풍선마냥 쪼글쪼글한 애도 있다더냐?
소녀  : 바람 빠졌으면 바람 빵빵하게 불어 넣어주면 되죠. 뭐. 
양금덕: 고라지 찐 마냥 허연 터럭은 어째 불고?
소녀  : 글쎄요. 허연 터럭이 다 날아가부르게 ‘펑’하고 터질 때까정 입으로 불어 볼까요? 
양금덕: 얼척없다 정말. 


 소녀, 양금덕, 마루에 앉아 똑같이 발을 올렸다, 내리기를 반복한다. 


양금덕: 활짝 피어 꽃잎이 뒤로 되바라지지 않아야 보기 예쁘지. 
소녀 : (하늘을 올려다보며) 민들레꽃 지면 얼마나 예뻐요. 봄바람이 불어오면 하얀 꽃술이 붓 볕 속에 풀풀 흩날리는 것이 얼마나 보기 좋았었나요. (사이) 민들레 홑씨 잡아두고 싶겠지만, 잡아두지만 않으면, 볕이 들지 않는 그늘에도 노랗게 꽃이 펴요. 
양금덕: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나는 눈이 침침해서 하나도 안 보인다. 


 불 꺼진다, 소녀 없다. 양금덕, 방으로 들어가 밥상위에 소복하게 남은 밥 한 공기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양금덕: 자리 없는 사람하나가 머리 셋 팔 여섯인 나타마냥 성질을 부리는구나. (밥 한 공기를 밥통에 비우며) 죽을 날이 가까워, 노망이 든 게지. 

 
 텔레비전을 켠다. 소리는 들리는데 화면은 나오지 않는다. 목소리 “군위안소는 1932년 상하이 사변을 계기로 상하이 주둔 일본 해군이 설치하기 시작해 1945년 패전 할 때까지 운영한 바 있습니다. 당시 10~20대에 끌려간 피해자들은 80여년이 흐르는 동안……,” 양금덕, 채널을 돌린다. 목소리 “지난 26일 정부는 국무회의를 열어 일본과 정보보호협정을 체결하기로 의결했습니다. 해방 후 첫 군사협정이라고……,” 양금덕, 채널을 돌린다. 목소리 “괜한 반일 감정으로 자극하는 것은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을……,” 양금덕, 채널을 돌리고 돌린다. 목소리 빠르게 바뀐다. “이미 끝난 배상문제는 거론하지 않는 것이.”  “일본은 특히 위안부에 관련된 문제는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으므로 외교적으로 부딪히는 것은.”  “강제로 끌려갔고 강제로 빼앗겨야했던.”  “나 살자고 내 잘못으로 생긴 암세포들 죽이는 짓 안 할래요. 안 받으면 6개월 못 넘긴 다면서요. 암세포들도 어쨌든 생명이에요. 내가 죽이려고 하면 암세포들도 느낄 것 같아요. 이유가 있어서 생겼을 텐데…….” 초인종 소리 들린다. 양금덕, 텔레비전을 끈다. 


여배우: 할머니 살아 계시죠?
양금덕: 그럼 살아있지, 죽었을까. (사이) 너도 내가 죽었으면 좋겠지? 그렇지?
여배우: 누가 할머니더러 죽으래요? 누가 그래요? 이것들을 확! 
양금덕: 사람들은 내가 옆에 있으면 노인 냄새 나서 싫은가봐. 
여배우: (관객석을 보며) 그럴 리가 있겠어요. 
양금덕: (관객석을 보며) 거짓말. 
여배우: 저는 할머니 냄새 구수해서 좋던데요. 
양금덕: 여시 같은 년! 할 말 있으면 얼른 하고 볼 일 있으면 얼른 보고 가. 
여배우: (안기며) 오늘은 우리 할머니 보고 싶어서 그냥 왔어요. 
양금덕: (싫지 않은 듯) 다 큰 년이 징그럽게시리. (사이) 도랑가에 앉아서 빨래하는 사람, 마루 밑에 숨어 숨죽이고 있는 사람, 죄다 모아다가 일본군 막사로 끌고 갈 거면서. 거기서도 드라마 촬영인지 뭔지 한다고 괴롭히다가 일 끝나면 구 해주지도 않고 그냥 갈 거면서……(사이) 맘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말고 촬영 할 거 있으면 얼른 찍고 날 어둡기 전에 집에 퍼뜩 들어가. 
여배우: 참말로 보고 싶어서 온 건데. 
양금덕: 너 그러다 밥 줄 끊긴다. 배우라는 애가 연기도 못하고 뭐해먹고 살려고 그러냐? 왜? 드라마고 뭐고 다 그만두고 돈 많고 착하고 잘생긴 놈 하나 물어서 시집이라도 가게?
여배우: 할머니는 드라마를 너무 봤어요. 돈 많고 착하고 잘생긴 사람이 저 같은 재연배우를 왜 만나겠어요?
양금덕: 하긴. 
여배우: (짧은 침묵) 그나저나 집에 누구 왔어요? 마루 밑에 신발은 하나인데 목소리는 여럿인 것 같은 것이. 
양금덕: 실없는 소리 하지 말고. (냉장고에서 음료수 캔을 꺼내 두 손으로 힘들게 따서 건네주며) 다 나오라고 해. 
여배우: 네? 
양금덕: 그래야 비디오도 찍고 녹음도 하고 하지. 그 뭐시냐. 은박지 붙인 판자때기하나 들고 이래저래 돌아다니는 놈도 나오라고 하고 매일 같이 5분 전, 3분 전, 1분 전, 30초 전, 15초 전 큐, 하는 놈도 나오라고 하고 마이크 달린 긴 막대기 들고 하루 종일 서있는 놈도 나오라고 하고 카메라 달린 크레인타고 댕기던 놈도 얼굴 보고프니까 다 나오라고 그래. 
여배우: (당황하며) 누, 누가 있다고 그래요. 보고 싶어 왔다니까, 자꾸 그러신다. 
양금덕: 네가 언제부터 날 보고 싶어 했다고. 
여배우: (눈치를 살피다가) 그, 뭐냐, 부산의 고무공장에 취직시켜 준다는 말에 속아 남양군도로 끌려갔다가온 할머니 있잖아요. 
양금덕: 황선순,이? 걔가 왜? 또 어디 아프데?
여배우: 어젯밤에 돌아가셨어요.
양금덕: 옥할매는?
여배우: 그젯밤에 돌아가셨죠. 
양금덕: 부산에서 아사마마루를 탔다는 금분이는, 살아있지?
여배우: 엊그제 돌아가셨죠. 
양금덕: 그럼 나만 남았나?
여배우: (안도하며) 그렇게 됐어요. 
양금덕: 한풀이 하고 가겠다더니…다들 먼저 고향집에 돌아가는 고만. (짧은 침묵) 달래야. 
여배우: 네, 할머니. 말씀하세요. 
양금덕: 예쁘더냐?
여배우: 네?
양금덕: 가는 길에 꽃단장은 하고 갔냐고.
여배우: 아, 네, 어찌나, 곱고, 예쁘던지, 눈을 뗄 수가 없었어요. 
양금덕: 분가루 바를 때 일어나지는 않고?
여배우: 새색시 마냥 얌전히 있다가 얼굴만 붉어졌죠. 
양금덕: 달래야!
여배우: 네, 할머니.
양금덕: 엄마라고 한 번 불러봐. 
여배우: ……
양금덕: 왜 싫으냐?
여배우: 엄마라고 부르면 관 뚜껑이나 닫아 달라고 할 거잖아요. 
양금덕: 달래야!
여배우: 왜요? 왜?
양금덕: 봉선화 따다가 손톱, 발톱에 물 좀 들여 줄래?
여배우: 요새 봉선화를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데요. 
양금덕: 옛날에는 가로수나 집 담벼락 밑에 많이 자랐었는데.
여배우: 매니큐어는 싫으세요?
양금덕: 알코올 냄새나서 싫어.
여배우: 싸구려나 그렇죠. 비싼 건 또 안 그래요. (핸드백에서 화장품 상자를 꺼내 건네며) 금가루도 들었데요. 

       양금덕, 화장품 뚜껑을 열어보다, 다시 되돌려준다. 

양금덕: 손톱위에 심홍색 빛이 붉어지면 귀신도 뱀도 두려워한다더라. 
여배우: 알았어요. 알았어. 
      
 여배우, 미적거리다가 나간다. 양금덕, 손톱발톱을 들여다본다. 


양금덕: 손톱 깎기로 자르고 또 잘라도 하얗고 누렇고 우둘투둘 한 것이 시퍼렇게 멍들었다가 싯누렇게 피는 고만. (사이) 그런데, 늙어서, 피도 안나. 


 여배우, 다시 들어온다. 새빨간 봉숭아 꽃잎과 잎줄기를 작은 손절구에 넣고, 백반가루와 소금을 간하듯 넣고 쿵쿵 찢는다. 


여배우: (손톱 위에 고약 붙이듯 얹고 비닐봉지로 싸맨 뒤 무명실로 친친 동여 메며) 손톱위에 봉숭아물 빨개도 몇 밤만 지나면 질 터인데…….
양금덕: (발등을 내보이며) 꽃잎이 떨어지지 않으면 열매도 안나. 
여배우: (못들은 척) 거 좀, 움직이지 좀 마요. 다 떨어지겠네. 


 양금덕, 여배우 모두 정지한다. 봉숭아 꽃잎이 마르는 동안, 조명 점점 붉어진다. 


여자  : 누가 하늘에 빨갛게 봉숭아물을 들일까?
소녀  : 누가 무명실로 친친 동여 메여 줄까요?


 조명 어두워진다. 빗소리가 잔잔히 들린다.


여배우: 비가 오네요. 
양금덕: (문 밖을 내다보며) 무슨 비가 온다고 그래?
여배우: 빗소리 안 들리세요?
양금덕: (지팡이로 천장을 힘껏 때리며) 비는 무슨……. (빗소리 그친다)
여배우: (천장을 올려다보며) 뭐죠?
양금덕: (혼잣말) 누군가 쥐를 잡아줘야 할 텐데. 요놈의 쥐새끼들은 잡고 또 잡아도 끝이 없어. (사이) 어제 문, 밖에 풀어준 애미를 찾나?
여배우: 네?
양금덕: 응? 아니다, 아니야. 그나저나 날도 어둑어둑한데 집에 안가?
여배우: (눈치를 살피다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밤에 할머니 혼자 있으면 무섭잖아요. (천장을 올려다보며) 설마 저기서 내려오지는 않겠죠?
양금덕: 문고리에 수저를 꽂으면 들어 올 일 없어. 
여배우: (방안을 둘러보다, 텔레비전 뒤편을 내다보며) 쥐구멍에도 수저를 꽂아요? 
양금덕: 응? 그나저나 너는 사람이 말하는데 자꾸 어딜 보는 거야? 
여배우: 무서워서 그래요. 무서워서. 
양금덕: 뭐가 무섭다고 그래. (사이) 많이 무서워? 그리 무서우면 네 엄마라고 생각하고 네 옆에 바싹 붙어 있어. 그러면 좀 괜찮을……
여배우: 그럼, 뭐, 오랜만에 엄마 젖가슴이나 주물럭거리면서 자야겠다. 
양금덕: 젖가슴이 배에 붙어서 만질 것도 없어. 
여배우: 그럼, 제꺼 만지고 주무세요.
양금덕: (비웃으며) 너나, 나나. 
여배우: (핸드폰을 들여다보다) 잠도 안 오는데 할머니 옛날이야기나 좀 해주세요. 
양금덕: (뒤돌아 누우며) 피곤해 불 꺼. 


 붉은 색 조명 점점 어두워진다. 칠흑 같은 어둠. 여배우 초에 불을 붙인다. 양금덕, 두 눈을 질끈 감고 요광에 앉아있다. 


여배우: 불도 안 켜고 볼일을 보세요?
양금덕: 느티나무 집 셋째 딸인데요.
여배우: 네?
양금덕: 닭백숙도 있고 뭇국도 있고 홍시도 있고, 닭백숙도 일 없고 뭇국도 일 없고 홍시도 일 없다. 
여배우: (혼잣말) 정신이 오락가락 한다고 하더니, 진짜네. 아아, 마이크 좀 꺼줘요. 네? 그냥 가자고요? 깨울까요? 아, 네. (어깨를 흔들며) 할머니! 어디 아픈 건 아니죠? 정신 좀 차려 봐요. 괜찮으세요? 
양금덕: 응?
여배우: 무슨 잠꼬대를 그리 하세요.
양금덕: (요광을 바닥에 엎고 일어나며) 내가 무슨 잠꼬대를 했다고 그래? 
여배우: (떨떠름한 표정으로 있다가, 얼굴 표정을 바꾼다. 걸레로 바닥을 쓱쓱 닦으며) 담에 이상이 생기면 잠꼬대가 심하데요. 손발톱에 줄이 가기도 하고 목이 쉬기도 하고. 
양금덕: 그건 늙어서 그런 게지.
여배우: 얼굴색도 푸르뎅뎅해지고 얼굴거죽이 팽팽하게 당겨져 눈꼬리가 빨래집게로 씹은 것 마냥 올라가고요. (사이) 뭐, 할머니가, 그렇다는 이야기는 아니고요. 
양금덕: (마른 눈물을 닦아내며) 그건 죽어가고 있어서 그런 게지. (무겁게 한 걸음 한 걸음 떼어내며 걷는다) 한 걸음, 두 세 걸음. 
여배우: 할머니, 아니, 엄마, 그러니까, 내 말은 그런 게 아니라니까, 그러시네. 
양금덕: 달래야. 
여배우: 네, 엄마. 
양금덕: 내가 죽으면 관 뚜껑…….
여배우: 아, 또 그 소리. 알았어요. 알았어. 관 뚜껑에 금칠도 하고 다이아도 박을 테니, 죽겠다는 소리 좀 그만해요. 
양금덕: (여기자의 손등을 어루만지며) 관 뚜껑은 방문을 떼어다가 달아다오. 
여배우: (긴, 침묵 양금덕은 보지 않고 다른 곳을 보며 국어 책을 읽듯이) 문살에 창호지 바른 문으로 관 뚜껑을 만들면 얼마 못가 구멍이 숭숭 뚫리고 말걸요. 
양금덕: (귓속말로) 나는 보지도 않고 누구랑 이야기하는 거야? 생방이여? 녹화여? 


  어색한 침묵. 카메라 테이프 가는 소리 들리다 만다. 


양금덕: (뒷머리에 꽂힌 수저를 뽑아, 건네며) 관 뚜껑에 못질은 하지 말고, 문고리에 수저나 꽂아다오. 


  어색한 침묵. 천장에서부터 바닥까지 바스락거리는 소리 들린다. 머리카락이 허리께까지 풀어헤쳐진 양금덕, 천장을 툭툭 치면 아주 잠시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가 다시 바스락거리는 소리 반복된다. 여배우, 천장을 올려다본다. 


여배우: (한 손에는 수저를, 다른 한 손에는 요광을 들고 멍하니 서 있다가) 야옹!
양금덕: (어이없어 쳐다본다) 그리 울어가지고 쥐가 신청이나 하겠어? 
여배우: (앙칼지게) 야, 야, 옹. (눈치를 살피다가) 쥐약이라도 사올까요?
양금덕: 쥐들도 살자고 저러는 건데, 죽일 것까지야. 
여배우: (집안을 둘러보며) 곳곳이 쥐구멍이에요. 
양금덕: 왜, 문이라도 달아 줄려고?
여배우: (수저는 가방에 넣고, 요광은 제자리에 갖다 놓으며) 자고 있는데 귀를 물거나 하지는 않겠죠? 
양금덕: (한쪽 귀를 내보이며) 그거야 내 귀를 보면 알겠지.


 여배우, 촛불을 양금덕 귀에 가까이 갖다 댄다. 양금덕, 촛불을 ‘호’하고 불어 끈다.


양금덕: (어둠속에서) 자?
여배우: (어둠속에서) 지금 막 자려던 참이에요.
양금덕: (긴 침묵 뒤 어둠속에서) 자?
여배우: (어둠속에서) 안자요. 
양금덕: (어둠속에서) 쥐…잡는 날…이야기 해줄까?
여배우: (어둠속에서) 졸려요. 
양금덕: (어둠속에서) 쥐새끼가 뜯어 먹다만, 내 귀 좀 만져볼래?
여배우: (어둠속에서) 알았어요. 알았어. 쥐 잡는 날 이야기나 해봐요. 
양금덕: (초에 불을 붙이며) 정월 첫 쥐날이 되면 논이며, 밭이며, 들이며, 하는 곳에서 쥐들이 뱀처럼 일렬로 이동을 하고는 했어. (사이) 오빠들이 쥐불을 놓을 걸 어찌 알았는지……. 
여배우: (피곤한 목소리로) 아이고, 고거 참, 신통방통하네요. 
양금덕: 어찌나 영악한지 통방이를 놓아도 소용없고 올가미를 놓아도 소용없었지. 
여배우: 아, 그랬구나.
양금덕: 그래도 아버지가 만든 통방이에는 쥐가 수도 없이 걸려들고는 했어. (사이) 자?
여배우: 아니요. (사이) 아버님이 솜씨가 좋으셨나보네요.
양금덕: 특별히 솜씨가 좋았던 건 아니고.
여배우: 그럼요?
양금덕: 아버지는 안방 문을 쪼개서 통방이를 만들었었어. 
여배우: 네? (눈을 비비고 일어나서) 왜 그런 거래요? 
양금덕: 안방 문을 쪼개서 만들었으니까, 쥐들도 별 수 있나.
여배우: 네?
양금덕: (안방 문을 애잔하게 바라본다)
여배우: 그게 왜요?
양금덕: (꿈을 꾸듯) 나무통 안에 미끼를 넣지 않아도, 후리채로 앞문을 걸어두지 않아도, 아버지가 만든 통방이에는 쥐들이 바글바글 했었어. 
여배우: 말도 안 돼. 
양금덕: (꿈을 꾸듯) 한 번 들어오면 아버지가 올 때까지 통방이 밖으로 나가는 법도 없었었어. 
여배우: 쥐들이, 안방이라고 생각 했을까나. 
양금덕: 아버지가 만든 통방이가 아랫목 같이 뜨뜻했던 게지. 
여배우: 아궁이도 놓았다고 그러시지 그래요?
양금덕: 아궁이를 놓기에는 땔감이 모자라니까.
여배우: (짧은 침묵,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며) 자야겠어요. (촛불을 끈다)
양금덕: (어둠속에서) 어머니는, 쥐는 살찌고 사람은 마른다고 하면서도 아버지가 애써 잡은 쥐를 죄다 풀어줬었지. (사이) 어디에다가 풀어줬는지는 아무한테도 말해주지 않았지만……오빠들도, 나도, 아버지도, 다, 알 수 있었어. 


 창호지 문이 환해진다. 여배우,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꾸벅 졸고 있는 양금덕 손을 어루만진다. 봉선화 물이 든 손톱을 잠시 동안 내려다보다 화장품 박스위에 편지를 두고 나온다. 양금덕, 조금 오래 누워있다. 전화벨소리 울린다. 양금덕, 몽유병 환자처럼 일어나 전화를 받지만 한 마디 말이 없다. 무대 눈부시게 밝다. 


양금덕: (눈을 잔뜩 찡그리며) 몇 시야? (수화기를 내려놓고 돋보기안경을 쓴다)
여자  : (문 밖에서) 그런다고 시간이 보여요?
소녀  : (문 밖에서) 할머니, 안주무셨구나. 느티나무 집 셋째 딸인데, 들어가도 되죠?
양금덕: (문고리에 수저를 꽂으며) 방도 안 치웠는데 내일 와라. 
여자  : 그러지 말고 우리 집에 와서 셋이 함께 아침밥이나 같이 먹어요. 
양금덕: 일 없다. 
여자  : 밥도 혼자 먹으면 맛이 없어요. 
소녀  : (불룩 나온 배를 두 손으로 매만지며) 같이 먹어요. 
양금덕: (불같이 화를 내며) 일 없다니까! 
여자  : 애라도 떨어지면 어쩌려고. (소녀를 보며) 많이 놀랐지?
소녀  : 괜찮아요. 
여자  : 괜찮긴, 뭐가, 괜찮아. (사이, 중얼거림) 먹으라는 나이는 안 먹고 성질만 쳐 잡수셨나.
소녀  : 나이를 먹으면 애가 된데요. 

       사이
 
양금덕: 왜? 네 년들은 썩지도 않고 매일 같이 나를 찾아와. 나를 이리 놀리고 저리 놀릴 궁리만 하는 것이냐? 

       사이 

여자  : (말투를 흉내 내며) 왜? 네 년들은 썩지도 않고 매일 같이 나를 찾아와. 나를 이리 놀리고 저리 놀릴 궁리만 하는 것이냐? 
소녀  : (말투를 흉내 매며) 왜? 네 년들은 썩지도 않고 매일 같이 나를 찾아와. 나를 이리 놀리고 저리 놀릴 궁리만 하는 것이냐? 

       사이

양금덕: (지팡이로 방바닥을 몇 번이고 내려치다가, 숨을 헐떡이며) 저 년들의 입을 확 꿰매 버리든지, 내가 죽든지 해야지 이거 원. 


 여자, 소녀, 양금덕, 모두 숨을 헐떡이다가 쥐죽은 듯 조용해진다. 


소녀  : 할머니, 주무세요? 
여자  : 살아 계시죠?
양금덕: (말없이 서 있다가 텔레비전을 켠다)
소녀  : 미안해요.
여자  : 이제, 그만 놀릴게요. 화 풀어요. 
양금덕: (텔레비전을 볼륨을 높인다) 
여자  : 또 막장드라마 보세요? (사이) 울화병이 도지지나 않으면 다행인 게 드라마라면서요. 
소녀  : (산통이 나서 몸부림치면서) 할머니, 느티나무 집 셋째 딸인데요. 문 좀 열어주세요. 
양금덕: (텔레비전 볼륨을 높이지만, 드라마는 보지 않는다, 잠시 망설이다 문고리에 수저를 빼고 다시 제자리에 돌아가서 앉는다) 


 여자, 소녀 방안으로 슬며시 들어온다. 소녀, 이불 위에 드러누운 뒤 두 다리를 벌린다. 신음 소리 계속 되지만 아기 울음소리 들리지 않는다. 여자, 소녀의 치마 속으로 두 손을 집어넣는다. 


여자  : 너무 급히 옷을 입고 나서려다가 한 가랑이에 두 다리를 넣고 말았네. 
양금덕: (텔레비전을 끄고) 응? 
여자  : 다리부터 나왔어요. 
양금덕: 머리부터 나오게 다시 집어 넣어봐.
여자  : (주머니 속의 물건을 꺼내듯이 뒤적인다. 진방남의 꽃마차 흥얼거리며) 하늘은 오렌지색 꾸냥의 귀걸이는 한들한들. 순풍금 소리 들려온다. 방울소리 울린다. 한강물 출렁출렁 숨 쉬는 밤하늘엔 별이 총총. (갑자기 심각해진 표정을 지으며, 소녀 치마 속에 고개를 집어넣는다) 색소폰 소리 들려온다. 노래 소리 들려온다.
양금덕: 왜 그래? 뭐가 잘못 됐어?
여자  : 아기가 울지 않아요.
양금덕: 거꾸로 뒤집어 놓고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막 때려봐. 
여자  : 숨 한 번 쉬어보지도 못했네요. 
양금덕: (소녀, 치마 속에 얼굴을 파묻으며) 어디 봐봐.  
여자  : (양금덕, 치마 속에 얼굴을 파묻으며) 어째 탯줄이 돌처럼 딱딱해 졌을까나. 
양금덕: (소녀의 치마 속에서 짱돌을 꺼낸다) 돌계집이 돌계단을 놓는구나. 짠하다 짠해.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가슴 아파 더는 못 살겠다. 
여자  : 짠하다 짠해. 무릎 아파서 더는 못가겠네. 
소녀  : (잠꼬대 하듯이)  짠한 것들. 


 정적. 쥐들이 기둥뿌리를 갉아먹는 소리 들린다. 


양금덕: 살자고 태어나야하는데 죽자고 태어났구나. 
소녀  : 우리 모두 죽겠다고 태어난 거예요. 
양금덕: 태어나기도 전에 죽는 법도 있다더냐?
소녀  : 죽겠다고 사는 것보다는 낫죠. (사이) 차라리 잘 됐어요. 
양금덕: 에구, 이 불쌍한 것. 일부러 그런 모진소리 할 필요 없다. 울고 싶으면 울고 웃고 싶으면 웃고 화가 나면 화내야지. 그리 살면 몸도 마음도 병들어. 
소녀  : 그리 살고 있는 건 할머니에요. 
여자  : 그리 살고 있지 않는 건 우리죠. 
양금덕: 그리 살았든 살지 않았든, 내 나이에 그것이 뭐가 그리 중요하겠냐? 
소녀  : 거짓말.
여자  : 거짓말. (양금덕의 치마를 걷어 올리며) 죽은 아기를 눕힌 이불보를 잘라 만든 속바지를 다 산 마당에도 입고 있으면서…울고 싶으면 울라니, 웃기고 웃겨서…화를 내지 않을 수가 없네요. 
소녀  : 진자리에서 숨을 거뒀으면 진자리를 걷어내라고 했어요. 
여자  : 그리 사니까, 밥을 먹어도 아무 맛도 안 나는 걸지도 몰라요.

  
 양금덕, 말없이 문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손가락 굵기 정도의 새끼를 꼬아 숯과 생솔가지를 꽂는다. 


양금덕: (빨간 고추를 손에 쥐고) 고추여? 조개여?
소녀  : (여자를 바라보며) 당연히, 떡두꺼비 같은 아들이죠.
여자  : (두 손을 내려다보며) 딸인 것 같기도 하고 아들인 것 같기도 하고. (사이) 기억 안나요? 
소녀  : 다 살았다고 이제 다 잊어버리셨나?
여자  : 다 죽었다고 이제 다 필요 없어졌나?
양금덕: (금줄에 빨간 고추를 꽂으려다 말고) 그리 뺏겨 내 손으로 묻어주지도 못했으니 딸이었겠지. 
여자  : 옆으로 배가 둥글면 아들이고 앞으로 배가 볼록하게 나오면 딸이라는데.
소녀 : 꿈속에서 꼭지가 달린 과일을 따면 아들이고 앵두나 석류처럼 빛이 곱고 맛이 달고 새콤한 것은 딸이라는데. 
양금덕: 까마귀 고기를 삶아먹었는지 기억이 안나. 
여자  :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 거죠. 
소녀  : (천장을 올려다보며)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데요. 
양금덕: 응?


 무대 고요하다. 


여자  : 아들이었는지, 딸이었는지, 그리 궁금하면 날아가는 새도 한 번에 넘지 못하고 쉬어가는 곳으로, 우리 다 같이 가서, 한 번 물어보는 게 어떨까요?
양금덕: 거기가 어딘데?
소녀  : 석수들과 역부들이 돌을 뜨고, 나르다가……, 느티나무 그늘에 잠시 앉아 땀을 식히는 곳이었죠. 
여자  : 산후통으로 눈이 먼 까마귀 어미를 위해 어린 새끼들이 먹이를 물어다 주는 곳이기도 했어요. 
소녀  : 여자들에게 다리를 벌리고 앉지 말라고 하는 남자들도, 없어요.  
여자 : 손가락에 침 발라가며 신혼 방 창호지 문에 구멍을 뚫다 봉초를 꼬깃꼬깃 넣은 할머니 담뱃대에 얻어맞던 어리숙한 남정네들은, 있어요. 
양금덕: (구깃구깃한 담배를 꺼내 입에 물며) 그래봤자, 다,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얘기지. 
여자  : 그래봤자, 다, 옛날얘기지.
소녀  : 그래봤자, 다, 옛날얘기였었나. 
양금덕: 도리깨에 휘추리를 잡아맬 아버지도 없고, 서로마주보며 디딜방아를 발로 밟을 언니들도 없고, 삼 껍질을 가늘게 꽈서 만든 삼신을 신겨 줄 오빠도 없고, 참빗으로 머리를 빗겨주던 어머니도 없고, 주판알 두드리던 친구들도 없는데……. 아들이든, 딸이든, 누가 알아봐줄까?

       
  찍찍 거리는 소리 커진다. 셋 다, 조용히 집 천장을 오랫동안 올려다본다. 


여자  : 구질구질하게 싯누런 벽지 좀 봐요. 
소녀  : 형광등 불빛만 환하네요. 
여자  : 콘센트와 전등 스위치도 싯누렇고……. 
소녀  : 벽지가 벗겨진 벽에서는 아스팔트 까는 냄새가…….
여자  : 비가 새는 건지.
소녀  : 꺼무튀튀한 것 좀 봐요. 
여자  : 어째 이런 데서 사는 건지.
소녀  : 나이를 먹을수록, 좋은 집에서 살아야하는 법인데. 
여자  : (방문 창호지를 뜯어내며) 노랬던 나무가 새까매 진 것 좀 봐요. 
소녀  : 이러니, 누가, 좋아하겠어요?
여자  : 때가 다 가시도록 물걸레로 쓱쓱 닦아 내야해요. 
소녀  : 알록달록 꽃무늬 벽지로 도배도 새로 하고 바닥은 폭신폭신한 장판으로 새로 까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여자  : 그래야, 할머니가 어디가고 없을 때, 누가 집에 찾아와도, 더럽다고, 흉보지 않죠. 
소녀  : 세숫대야에 밀가루를 풀어다가 풀을 쒀 둘 까요? 
여자  : (문 밖으로 나가면서) 새하얀 광목천 위에 따뜻한 풀도 먹이고 창호지도 바르고 천도 바르고 문풍지를 발라 소한추위에 핀 겨울 꽃을 따뜻하게 지켜주다가……, 
소녀  : (문 밖으로 나가면서) 봄이 오면 새색시 마냥 족두리도 쓰고……, 
 
       사이 

양금덕: 꽃가마도 타고?

       사이

양금덕: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받아낸 외나무다리를 지나…….

       사이

양금덕: 늦은 밤……. 

       사이

양금덕: 고향 땅 뒤에 멀리 두고 낯선 땅으로…….
      
      사이 

양금덕: 한 걸음 두세 걸음…….

      사이

양금덕: 꽃가마 타고 왔다가 꽃가마 타고…….

      사이

양금덕: 느티나무 집 셋째 딸이 살았었던 고향땅으로……, 

      사이

양금덕: 아가야! 울지 말고 웃어야지, 아가야! 열꽃을 피워 내듯 웃어야지, 아가야! 네가 울면 네 엄마가 얼마나 힘이 들겠니? 아가야! 그렇다고 마냥 웃지만 말아. 화살나무처럼 버티는 일로 당겨져야지. 그래야, 허리가 꼬부라져도 노란색 조그만 꽃들이 조롱조롱 매달리지. 아가야! 울지 말고 잠자야지, 그리 울면 내가 죽어도 제대로 눈도 못 감고…허리가 꼬부라져서…너무너무 힘들고 아파서, 잠도 못자고…아가야! 나는, 너를 위해 팔베개를 당겼다 놓았다. 아가야 울지를 말아. 나는 정말 다 살았다. 다 잊었다. 꽃다운 나이에 야자림 움막으로 끌려가 하루에 수십 번 꽃대가 꺾여 지고 꺾여 진 것도, 꽃밭에 꽃 꺾으러 줄을 선 군인들이 ‘나와삐-’, ‘조선삐-’ 뿌리 채 뽑아 불사르던 것도…등잔 밑이 어둡듯, 내게 너무 가까워서, 다, 잊었다. 다, 안 보인다. 

        
 무대, 등잔 밑처럼 어둡다. 양금덕,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뜬다. 무대 조명 꺼졌다가 켜진다. 꽃무늬 벽지. 


여배우: (문 앞에서) 할머니, 살아 계시죠? 
양금덕: (달력 뒷면에 글씨를 쓰고 또 지우기를 반복한다)
여배우: 계셔요?
양금덕: (연필 끝에 침을 묻힌다)
여배우: (창호지에 구멍을 뚫고 방안을 살펴보면서) 주무시나?
양금덕: (문을 활짝 열며) 기껏 문에 창호지를 새로 발라났더니, 창호지에 침을 발라 손가락으로 구멍을 뚫고 눈을 갖다 댈 건 또 뭐냐?
여배우: 아, 그게, 저는, 혹시나, 싶어서.
양금덕: 됐다. 그런데 또 찍을 게 남았어?
여배우: (국어책 읽듯이)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러네요.
양금덕: 발 연기 하고는……그래 어설퍼서 먹고 살긴 하겠어? 
여배우: (못들은 척 방으로 슬며시 들어오며) 방은 언제 또 이렇게 꾸미셨어요. (사이) 누가 보면 여자아이 방인 줄 알겠어요. 
양금덕: (달력을 벽에 걸며) 들어 왔으면 앉을 것이지. 뭘 볼게 있다고 멀뚱멀뚱 서있어?
여배우: (자리에 앉으며) 가만 보자, 그러고 보니, 우리 엄마 예쁘게 화장도 다하셨네. (사이) 어디 좋은 데라도 가시나?
양금덕: 좋은 데는 무슨, 좋은 데를 간다고 그래. 
여배우: 우리 엄마, 얼굴 빨개지는 것 좀 봐. 
양금덕: (고개를 돌리며) 네가 언제 얼굴이 빨개졌다고. 
여배우: 소녀 같으셔요. 
양금덕: 소녀는 무슨 소녀 같다고 그래. 
여배우: 우리 엄마야 늘 예쁘죠. 그런데…….
양금덕: 그런데 뭐?
여배우: 엄마 화장품 몰래가져다가 바른 여자아이 같아요. 
양금덕: (거울을 들여다보며) 예쁘기만 하구만. 
여배우: (클렌징크림으로 얼굴화장을 바득바득 지운다) 분가루 뜬 것 좀 봐요. 
양금덕: 예쁘다고 할 때는 언제고.
여배우: 화나셨어요?
양금덕: 화는 무슨…….
여배우: 우셔요?
양금덕: 내가 언제 울었다고 그래? (귓속말로) 뭐냐, 그, 거시기, 대본에, 지금, 울어야 된다고 써져 있어? (눈물을 훔치며 국어책 읽듯이) 눈에 뭐가 들어가서 그래. 
여배우: (리무버에 면봉을 적시며) 화장은요, 하는 것보다, 지우는 것이, 중요해요. 엄마같이 쌍꺼풀은 또렷하고 코는 오뚝하고 입술은 도톰하고 얼굴형은 어미닭이 오래 품은 달걀마냥 따뜻하고 화사한 사람일수록, 한꺼번에 쓱쓱 문지르지 말고, 더욱더 세심하게, 더욱더 부드럽게, 피부 결대로 살짝살짝 눌러 주면서……. 
양금덕: 언제 끝나?
여배우: (귓속말로) 할머니, 거, 좀, 가만히, 있어보세요. (사이) 눈썹은 눈썹 칼로 깔끔하게 정리하고, 비워진 부분은 브러시에 파우더를 묻혀 눈썹 라인을 따라 꼼꼼하게 메워주고, 펜슬로 눈앞머리에서 눈꼬리 모양으로 부드럽게 아이라인을 메워주듯 그려주고, 입술은 밖으로 번지지 않게 파우더 퍼프로 고르게 한번 씩 눌러주면서, 색감을 더하기 좋은 시원한 입매를 만드는 것이 좋고, 눈언저리에 두두룩한 곳은 무난한 오렌지 계열로, 속눈썹은 반달 모양으로 뷰러로 여러 번 나누어서 집어 올리고, 밝게 웃을 때 잡히는 광대뼈는 귀에 걸 듯 바깥쪽으로 펴주면서……
양금덕: 잘 닦이고 잘 입히고?
여배우: 네?
양금덕: (가방 속에 대본을 뺏으며) 귀에 들어가면 귀가 꽉 막혀 들리지 않게. (사이) 염포로 잘 싸서 보기 좋게. 
여배우: 죄송해요. (귓속말로) 저 좀 살려주세요. 
양금덕: 장롱 속에 어여쁜 소녀 한복도 관속에 넣어주고, 장롱 속에 꽃무늬 원피스도 관속에 넣어주고, 장롱 서랍장 속에 신문지로 꽁꽁 싸둔 비취노리개도 넣어주고, 소매 끝에 색동이 들어간 저고리는 달래 너 시집갈 때 입고, (손가락에서 옥가락지를 힘들게 빼내며) 하나는 네가 끼고, 다른 하나는 신랑에게 주고…….
여배우: 자꾸 움직이니까 입술을 못 그리겠어요. (사이) 그렇다고 입술을 꽉 다물지는 말고요. 
양금덕: 눈도 감지 말고 웃지도 말고 울지도 말고?
여배우: 누가 그러래요? (사이) 다 끝났어요. 
양금덕: (거울을 보며) 바람을 타면 흩어져 버리고 물에 닿으면 머무는 것이 뭔 줄 알아?
여배우: (머리를 곱게 빗어주며) 글쎄요. 
양금덕: 그런 것이 사람얼굴이야. (사이) 달래야! 얼굴 거죽 벗겨지겠다. 그만 좀 잡아 당겨. 
여배우: 네, 엄마, (눈치를 살피다가, 빗질을 멈추며) 아니, 할머니. 
양금덕: 나는 이제 더 이상 도망치고 싶지도, 피하고 싶지도 않다. 
여배우: (얼굴은 안 보고 다른 쪽을 보며) 봄을 타시나? 얼굴도 전보다 해맑으시고……, 
양금덕: (두 손으로 여기자 얼굴을 붙잡고 무섭게 바라본다) 너는 내 말은 안 듣고 내 얼굴만 보냐?
여배우: (곤욕스런 표정으로) 바람을 타면 흩어져 버리는 게 얼굴이라면서요. 
양금덕: (거울을 보며) 긴 흰 털을 덮어쓰고 있는 것이 할미꽃이 따로 없구나.
여배우: 염색도 하고 비닐 캡도 씌워드릴까요?
양금덕: 염색약 냄새 독해서 싫어. (사이) 새벽에 머리 감으러 갈래?
여배우: 목욕탕이 몇 시에 문을 열죠?
양금덕: 다섯 시에 문을 여니까, 네 시 반에 집에서 나가면 되겠다. 
여배우: 꼭두새벽인데. 
양금덕: 왜? 싫으냐?
여배우: 아니에요.
양금덕: 새로 받은 물로 씻어야 몸도 개운하고 기분도 개운한 법이야. 
여배우: 깨울 때 안 일어나기만 해봐요. 
양금덕: 깨울 때 일어나기나 해라. 


 조명, 어둡다. 자명종소리 한참 동안 울린다. 여배우, 뒤척이며 일어났다가, 옆자리에 시체처럼 누워있는 양금덕을 보고 다시 눕는다. 한참 뒤, 자명종소리 다시 울린다. 여배우, 방 불을 켠다. 


여배우: 꼭두새벽부터 머리 감으러 가자고 하시더니.


 시퍼런 조명, 양금덕을 비춘다. 여배우, 방 문고리에 걸린 수저를 내려다본다. 여자, 소녀 문 앞에서 서성거린다. 


여배우: (방문을 열며) 누구세요?
여자  : 깨울 때는 일어나지도 않더니, 이제는 또 모른 척이네. 
여배우: 네?
소녀  : 살아 있을 때는 살았냐고 묻더니 죽었을 때는 죽었냐고 묻지도 않네. 
여배우: 무슨 말인지?
여자  : (봉숭아물들인 손톱을 내밀며) 손가락에 옥가락지도 빼서 줬는데.
소녀  : (봉숭아물들인 손톱을 내밀며) 소매 끝에 색동이 들어간 저고리도 내어줬는데. 
여자  : 하나는 네가 끼고. 
소녀  : 다른 하나는 신랑에게 주고. 
여자  : (꽃무늬 원피스를 입으며) 장롱 속에 꽃무늬 원피스도 관속에 넣어주고.
소녀  : 소매 끝에 색동이 들어간 저고리는 나한테 양보하고 (저고리에 달린 비취노리개를 떼어내며) 요것은 네가 가지고 있다가 자식들한테 물려줘라. 
여배우: (양금덕을 바라보며) 네.
여자  : 잘 먹고 잘 살아라.
소녀  : 잘 먹고 잘 살게 해준다고 아무데나 따라가지 말고. 
여배우: (양금덕의 손등을 쓰다듬으며) 네. 
소녀  : 사이공에 끌려가고 자바로 끌려가도.
여자  : 배를 타고 왔는지, 기차를 타고 왔는지, 인천으로 왔는지, 부산으로 왔는지.
소녀  : 군표는 받아서 다 갖다 주었는지, 바로 돈을 바꿔 받았는지, 어땠는지. 
여자  : 애기가 배를 타다가 죽었는지, 기차를 타고 죽었는지, 인천에서 죽었는지, 부산에서 죽었는지.  

     
  무대 적막하다.


양금덕: (이부자리에 이불을 개며) 죽어라고 나만 원망하면서 따라붙어도 보이지 않아서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여배우: 정신이 드세요?
양금덕; 가까이 있지만 얼마나 가까워야 가까운 것인지 알 수 없어. 
여배우: 제가 곁에 있잖아요.
양금덕: 나는 나도 안 보인다.
여배우: (팔짱을 끼며) 나는 보여요. 
양금덕: 나는 까마귀 고기를 삶아먹었다. 
여배우: 네?
소녀  : 까막눈이지.
여자  : 뼈도 까마귀처럼 까맣지. 
양금덕: 까맣게 까먹었지. 


 양금덕, 팔을 늘어뜨리고 한 쪽 다리는 뒤로 쭉 펴고 머리를 위아래로 흔든다.


양금덕: 새하얀 눈물을 흘려도 새카맣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어제 앉은 데 오늘도 앉아. 
소녀  : 까악, 까악
여자  : 까악, 까악
양금덕: 느티나무가지 꼭대기에 알둥지는 점점 커지고. 
여자  : 까악, 까악
소녀  : 까악, 까악
여배우 (관객석을 보며) 다들 무섭게 왜 그러셔요.
양금덕: 까마귀 날에. 
여자  : 까마귀 날에.
소녀  : 까마귀밥이나 남겨다오. 
양금덕: 까막바늘까치밥나무에.
여자  : 밥 한 숟가락.
소녀  : 얹어주렴. 

 여자, 소녀, 양금덕, 모두 퇴장. 여배우, 양금덕이 누워있던 이부자리를 내려다보다, 퇴장한다. 빈방, 이부자리에 등이 굽은 느티나무 그림자 하나 드리운다. 상여 종소리 울려 퍼진다. 요령잽이와 상여꾼들 소리 모두 할머니다. 

소리  : 이제가면 언제 오나.
소리들: 어~허노 어~허노 어~허노야 어네~~
소리  : 머나먼 저승 가는 저 영혼아 노자라도 두둑히 두둑히 가지고 가소.
소리들: 어~허노 어~허노 어~허노야 어네~~


 여배우, 다시 돌아와, 문고리에 수저를 뽑는다. 안방 불 꺼진다. 


양금덕: 이제가면 언제 오나.
소녀  : 어~허노 어~허노 어~허노야 어네~~
양금덕: 머나먼 저승 가는 저 영혼아 노자라도 두둑히 두둑히 가지고 가소.
여자  : 어~허노 어~허노 어~허노야 어네~~
양금덕: 저승길이 멀다 허더니 대문 앞이 저승이라.
여자  : 어~허노 어~허노 어~허노야 어네~ 
양금덕: 흰 머리 가름하게 곱게 빗고. 
여자  : 어~허노 어~허노 어~허노야 어네~
소녀  : 아침에 밭에 갔다가 저녁에도 집에 못 들어오네. 
다함께: 어~허노 어~허노 어~허노야 어네~


 무대 불 꺼졌다가 다시 켜진다. 새하얀 고무신 무대 중앙에 놓여있다. 문고리에 수저가 꽂힌 안방 문, 밖으로 나있다. 원고지 모양의 벽지에 위안부 할머니들 이름 새겨져 있다. 돋보기안경을 쓴 양금덕, 벽지에 말린 꽃잎을 붙인다. 무대 불 꺼진다. 어둠속에서 들리는 목소리 각기 다르다. 


목소리: 말린꽃에는 나비도 벌도 앉지 않아.
목소리: 난 눌러서 말린 꽃잎이 죽었다고 생각 안 해. 줄기가 꺾이고 말라 비틀어졌지만 오히려 색깔이 더 곱고 생화보다 오래 가잖아. 
목소리: 못다 핀 꽃은 피지도 못하고 말려지겠네. 
목소리: 햇볕을 가져다가 눌러두지 뭐.
목소리: 그런다고 꽃이 필까?
목소리: 나비도 벌도 잡아 눌러두지 뭐.
목소리: 그런다고 나비가 날고 벌이 날까.


       그때, 까마귀 떼 울음소리 들린다. 


목소리: 떼까마귀 무리 속에 흰 까마귀 한 마리. 
목소리: 떼까마귀 무리 속에 흰 까마귀 한 마리.
목소리: 떼까마귀 무리 속에 흰 까마귀 한 마리. 
목소리: 떼까마귀 무리 속에 흰 까마귀 한 마리.
목소리: 떼까마귀 무리 속에 흰 까마귀 한 마리.
목소리: 떼까마귀 무리 속에 흰 까마귀 한 마리. 


 목소리, 점점 작아진다. 무대 조명 켜진다. 마루 아래에 하얀 고무신들, 가지런히 놓여있다. 방문 열린다. 소녀, 방문을 열고 나와 하얀 고무신들 다 거두어 방으로 들어간다. 방문 닫힌다. 문고리에 수저 꽂는 소리 들린다.


목소리: 나의 작은 몸 안에 가만히 앉았다가 날아갔다. 


 무대 조명 어두침침하다. 
    

*


 무대 중앙에 붉은 색 고무대야 놓여있다. 양금덕, 김이 모락모락 나는 무쇠주전자 를 들고 나온다. 목욕 물 온도를 맞춘다. 때수건에 물을 적시고 몸 구석구석을 닦다가 관객석을 바라본다. 


양금덕: 등 좀 밀어줄래?


 자명종소리 울리다가 그친다. 양금덕,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다 철수세미로 바닥을 박박 문질러 닦는다. 무대 환해진다. 양금덕, 없다.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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