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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단편 연재] 치킨 런
게시물ID : readers_3216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밤의작가들
추천 : 1
조회수 : 225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8/08/16 23: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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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69년생 K씨의 이야기
 
 그녀에게 무언가 일이 생겼음을 직감한 건 2주 전, 금요일 자정이었다. 지난 1년 간 그녀는 매주 금요일이면 어김없이 내게 전화를 걸어왔었다. 단 한 주도 빼놓지 않고, 정확히 저녁 9시 정각마다. 하지만 그날은 9시가 되어도 이상하게 전화가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먼저 연락을 할 수는 없었다. 나는 늘 그녀가 먼저 연락주기만을 기다려온 입장이니까. 그러나 10시, 11시가 지나도 전화벨은 울리지 않았고, 밤 12시가 되자 불안한 예감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나의 불안은 점점 커져갔다. 나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다시 금요일이 돌아오면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이 전화를 걸어줄 것이다, 라고 되뇌며 애써 마음을 진정시켜봤지만 모두 허사였다. 지난 금요일에도 그녀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금요일마다 들었던 그녀의 목소리가 아직 귓가에 선했다. 그녀의 현관문 앞에서 보았던 수줍은 미소도 눈에 어른거렸다. 1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나는 얼마나 그녀에게 의지해왔던가. 그녀가 있어 힘든 시기도 이겨낼 수 있었다. 더 이상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수는 없다. 혹시 그녀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긴 거라면, 이젠 내가 적극적으로 나설 차례였다. 그러다 오늘 오후, 은행을 다녀오는 길에 우연히 그녀를 보게 된 것이다.
 한눈에 보기에도 그녀의 얼굴은 수척해보였다. 그녀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로 힘없이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고, 우락부락한 사내 둘이 그녀의 뒤를 따라 걷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들을 미행하기 시작했다. 길모퉁이를 돌아 그들은 어떤 건물로 들어갔는데… 이런, 젠장!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유리문 너머로 살펴본 그곳은 마치 악마의 소굴 같았다. 험악해 보이는 사내가 그녀에게 무언가 명령을 내렸고, 그녀는 고분고분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이를 악물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사내가 여태껏 그녀를 가둬두고 괴롭혔을 거란 생각을 하니 분노가 치밀었다.
 그녀에게 자유를 되찾아주고 싶었다. 나는 몇 번을 망설이다, 마침내 주먹을 꽉 쥐고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험악한 얼굴의 사내를 향해 용기내어 외쳤다!
 “저……. 3개월 등록하려면 얼맙니까?”
 
 

 81년생 H씨의 이야기
 
 나란 놈은 정말이지 대가리 속에도 근육만 들어찬 게 분명하다. 도무지 생각이란 걸 할 줄 모른다. 꼬꼬치킨 사장님이 3개월을 일시불로 등록하겠다고 찾아오셨을 때 의심을 좀 해봤어야 했는데. 멍청하게도 나는 한 동네에서 장사하는 사람끼리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실실 웃으면서 D/C까지 해드리지 않았나.
 첫날만 해도 얌전히 PT를 받고 집으로 돌아갔던 사장님은 다음 날부터 서서히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입구를 오가는 회원님들께 치킨집 전단지를 나눠줄 때까지만 해도 그러려니 했지만, 벤치프레스에서 100kg를 치고 있는 회원님께 다가가 전단지를 들이밀 때에는 슬그머니 짜증이 밀려왔다. 여자 회원님들 중에 치킨집 단골도 있었던 모양인지, 반갑게 인사하면서 쿠폰을 열 장씩 건네기도 했다. 어쨌든, 좋다, 참을 수 있다. 나도 매일 한 시간씩 길거리에 나가 전단지 돌리는 입장에서 손님 한 명이라도 모으고 싶은 그 마음 이해 못할 것 없다. 나는 사장님의 영업활동은 그냥 못 본 척 하고, PT 강도를 높여나가는 데에만 신경을 쓰기로 했다. 다행히 사장님도 점점 운동에 재미를 붙여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오늘, 나의 인내심은 한계에 다다르고 말았다.
 헬스장으로 들어오는 그의 손에 치킨 한 박스가 들려있는 게 아닌가! 그 꼴을 본 순간, 입에서 쌍욕이 나올 뻔 했다. 이 인간이 진짜 미쳤나! 이런 거 들고 오시면 안 된다고 최대한 정중하게 말려봤지만 고소한 기름 냄새가 스멀스멀 퍼져나가는 것까지 막을 길은 없었다. 퍽퍽한 닭가슴살이나 달걀흰자, 단백질 셰이크 같은 걸로 연명해오던 회원님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결국 몇몇이 좀비처럼 우르르 몰려와서는 저마다 치킨을 손에 들고 정신없이 뜯기 시작했다. “야, 생맥도 있음 좋겠다 그치?” “이따 한 잔 할까?” “이젠 운동도 지겹다. 그냥 지금 가지 뭐!”그런 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카운터 위로 닭 뼈가 툭툭 떨어졌다.  
 이제 도저히 참을 수 없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사장놈을 쏘아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회원님, 오늘은 점프 스쿼트부터 시작하시죠. 제가 자세 봐드릴게요.”
 30분 뒤, 사장놈의 다리는 완전히 풀려있었다. 나는 땀으로 흠뻑 젖어있는 사장놈의 등 뒤에 대고 여유만만하게 큰소리로 외쳤다!
 “자, 이제 열 세트 더요!”
 그리고는 한 걸음 더 다가가 목소리를 낮춰서 덧붙였다.
 “사장님, 제가 나중에 꼬꼬치킨에서 회식 한 번 할 테니까요, 이제 제 사정 좀 봐주세요. 제발요…….”   
   
 
 
 93년생 C씨의 이야기
 
 오늘도 몸무게엔 변함이 없었다. 하, 진짜, 이러면 안 되는데……. 불금마다 꼭꼭 빼놓지 않았던 ‘1인 1닭’의 행복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다이어트를 시작했지만, 살들은 여전히 내 몸에 찰싹 들러붙어 떨어질 줄을 모르고 있다. 코앞으로 다가온 웨딩 촬영 날짜를 떠올리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런닝머신의 속도를 높였다. 런닝머신에 부착된 소형TV 속에서는 연예인들이 닭다리를 뜯느라 정신이 없다. 그 바삭바삭한 튀김옷을 상상하면서 나는 벨트 위를 달리고 또 달린다. 서럽다. 마지막으로 치킨을 먹어본 게 언제였던가. 참, 그러고 보니 꼬꼬치킨 사장님도 나랑 같은 헬스장을 다니신다. 나를 알아보시고는 쿠폰도 주셨었는데, 웨딩 촬영이 끝날 때까지는 쓸 수가 없어서 우울하다.   
 이제 얼마 안 남았어, 조금만 더 참자! 나는 꼬꼬치킨 사장님을 생각하면서 마음을 다잡아본다. 꼬꼬치킨 사장님이랑 헬스장 사장님은 항상 엄청 열정적으로 PT를 하신다. 그래, 그렇게 나이가 있으신 분도 운동을 열심히 하시는데 내가 벌써 지치면 안 되지. 꼭 완벽한 웨딩드레스 핏을 만들고 말겠어! 앗, 오빠한테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웅, 오빠. 나 운동해. 힘두렁. 아 진짜? 오늘이 복날이야? 안 돼앵, 나 다이어트 하잖아. 흐잉, 살 안 빼도 이쁘다고? 몰라아, 오빠는 진짜 닭살이야. 웅 알았엉. 이따 봐~”
 
 
 
- written by 설탕연필 / 밤의 작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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