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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단편연재] 그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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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밤의작가들
추천 : 0
조회수 : 218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8/09/12 18: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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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
 
 
 
 
 그 여자를 본 날은, 내가 누군가를 죽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날만큼 짜릿한 날이었다.
 
 
 고백하자면, 내 생에서 그보다 더 짜릿한 일은 없었다. 무언가를 부수고 밟아버리는 일, 잘 가꾸어진 것들을 망쳐버리는 일은 어느 때보다 심장을 뛰게 했다.
 
 
 그러니, 머리를 뒤로 총총 땋은 그 여자의 뒷모습을 보았을 때, 그 여자가 든 물동이가 머리 위로 올라갔을 때, 나는 그 긴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물동이를 내던져버려야 했는지도 모른다. 욕지기를 내뱉고 산산조각이 난 항아리를 보며 우는 여자를 보며 비웃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게 나다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 나는 그저 서 있었다. 멀어지는 여자의 뒷모습을 보며, 연못 근처로 잔뜩 피어난 새하얀 토끼풀이 그 여자의 연분홍빛 저고리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그 여자의 뒤를 따라 걸으니 그곳은 내가 떠나온 곳이었다. 떠나온 지 몇 년이 흘렀음에도 마을은 변함이 없었다. 나의 뼈가 썰리고 피가 넘치던 순간에도 누군가의 삶은 계속되고 있었다.
 “아니, 자네 돌아온 건가?”
 참견하기를 좋아하던 노인네는 더 노인네가 되어있었다.
 “자네 다리가….”
 아마 오늘 밤이 오기도 전에 내가 돌아왔다는 사실이 온 마을에 퍼질 듯했다.
 
 
 늦여름임에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집은 썰렁했다. 관리가 안된지 얼마나 된 건지, 쥐새끼 하나 찾아볼 수 없다. 나는 지팡이를 평상에 기대어놓고 앉았다. 오래 걸은 탓인지 발이 얼얼했다. 이놈의 집도 변한 게 별로 없다. 쥐방울만 한 크기의 방이나, 제비도 찾아오지 않는 다 썩어빠진 처마, 다 뒤져버린 나무 같은 것들. 변한 거라곤 나뿐인가보다.
 산등선 너머로 뉘엿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하룻밤만 자고 이 집을 떠날 것이다. 실은 집만 살짝 보고 떠나려 했다. 이건 다 그 여자 때문이다.
 내가 평상에 눕자, 지팡이가 땅으로 툭 떨어졌다. 그 소리에 다리가 저릿하다. 언제였던가, 내가 어떤 놈을 찔렀을 때, 그놈이 했던 말이 생생하다.
 “네놈도 벌을 받을 거다.”
 결국엔 그 말이 사실이 된 건지도 모른다. 나는 시뻘건 하늘이 보기 싫어 눈을 감았다. 어서 밤이 오면 좋으련만.
 “저….”
 눈을 뜨니 그 여자가 있다. 저고리의 긴 매듭 끝이 내 코를 간지럽힌다.
 “어머니가 이거 드시래요.”
 여자는 그 말을 하고는 내 머리 위에 바구니를 내려놓는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그 여자가 돌아섰다가, 다시 몸을 돌린다. 여자는 조금은 떨리는 손길로 땅에 떨어진 내 지팡이를 들어내 머리맡에 둔다.
 “드세요.”
 내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총총거리며 뛰어간다. 여자의 치맛자락이 뜀박질에 살랑거린다. 여자는 노을 속으로 사라지고, 나는 멍하게 그곳을 한참 바라보았다. 정신을 차리고 여자가 놓고 간 자리를 보았을 때, 식어 빠진 옥수수와 지팡이가 놓여있었다.
 
 
 나는 해가 다시 떠오른 뒤에도 떠나지 않았고, 여자는 다시 찾아와 바구니를 바꿔 놓고 갔다. 어느 날은 감자였고, 어느 날은 고구마였다. 여자는 나와 마주치는 게 겁이 나는지 이른 새벽에 바구니를 내려놓고 갔다. 늘 인기척에 잠을 깼지만, 굳이 여자를 겁에 질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여자의 발소리가 사라지면 문을 열어 바구니를 확인했다. 여자의 집이 멀지 않은지, 늘 음식은 따스했다. 엽전 서너푼을 바구니에 얹어놓아 보았지만, 여자는 늘 가져가지 않았다.
 나는 매일 조금씩 걸어보기로 했다. 나는 땅에다 지팡이로 글을 쓰고 집을 나섰다.
-고맙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여자가 적은 글이 있었다.
-어머니도 고맙다고 하세요.
 다음 날 나는 또 땅에다 써놓았다.
-뭐가 고맙지?
 여자는 반듯한 글씨로 써놓았다.
-살아 돌아와 줘서요.
 다음날, 나는 왼종일 여자를 기다렸지만, 여자는 나타나질 않았다.
 
 
 여자는 누구일까.
 여자의 어미는 누구일까.
 이 마을에서 내게 살아 돌아와 줘서 고맙다 할 여인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여인은 오래전에 죽어버렸지 않던가.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아무도 내게 다가오는 사람들은 없었다. 참견하기 좋아하는 노인네들도 병이 옮는다며 나를 피할 뿐이었다. 가끔 어린애들이 내게 돌을 던지고 가도, 나는 쫓아가지도 못할 만큼 느렸다. 그런데 여자를 따라갈 수나 있을까. 항상 뜀박질로 사라지는 그 여자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마당에 글을 쓰는 일뿐이었다.
-네 어미가 누구냐.
 여자는 답이 없다.
-어머니가 뉘신지요.
 여자는 여전히 답이 없다.
-당신은 누구요.
-저는 순이예요.
 땅에 적힌 글자를 지우려다 여자의 이름에 지팡이가 멈췄다. 순이. 나는 여자의 글씨를 따라 여자의 이름 몇 번 써보았다. 여자의 반듯한 뒷모습을 닮은 순이라는 글자는 내 지팡이가 지나갈 때마다 더욱 진하고 굵게 새겨져 갔다.
 나는 여자의 글자를 지우고 써본다.
-나를 아시오?
 여자는 다시 답이 없다. 여자는 편리한 질문에만 답을 하고, 더는 글을 쓰지 않았다. 갑갑해진 나는 추궁을 멈추기로 했다.
-고맙소.
 내가 남긴 그 글자 근처에, 여자의 발자국이 이리저리 찍혀있었지만 아무런 글자도 찾을 수 없었다.
 
 
 길을 걷다 코스모스를 발견했다. 여자의 연분홍 저고리 색을 담은 코스모스는 얕은 바람에도 흔들렸다. 나는 코스모스를 한 아름 꺾어 다발을 만들어 집으로 돌아온다. 이 집에는 꽃다발을 둘 곳이 없어서 바구니에 올려둔다. 칼을 들고부터는 꽃을 밟기만하지 볼 일이 없었는데, 이상하게도 이곳은 나를 어린애로 만든다.
 다음날 새벽 어스름이 가득할 때 가벼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발소리는 평상 앞에 잠시 멈추었다. 나는 살짝 열어둔 문틈으로 여자의 얼굴을 본다. 여자가 꽃다발에 코를 박고 향을 맡으며 웃는다. 통증 때문에 잠을 잘 이루지 못하던 나는 그날 편히 잠들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올 때에도 여자는 바구니만 내려놓고 갈 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무런 글자도 남기지 않았다. 이따금 잠에 빠지지 않을 때면 열어놓은 문틈 사이로 빠르게 사라지는 여자의 뒷모습만 볼 수 있었다. 땋은 긴 머리에 연분홍색 저고리를 입은 여자. 그 뒷모습에 마음이 저릿해졌다.
 
 
 겨울이 오자 걷기가 어려워졌다. 체력은 는 것 같았지만, 바람이 거세지고 땅이 굳어갔다. 곧 눈이 올 신호다. 나는 눈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첫눈이 오던 날,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스름이 걷혀가는 새벽, 호롱불빛과 함께 서걱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달칵.”
 평상에 바구니가 놓이는 소리와 함께, 여자의 발소리가 다시 들린다. 발소리가 멀어질 때쯤, 나는 문을 열고 나온다. 눈 위에는 여자의 발자국이 새겨져 있다. 발자국이 사라지기 전에 따라가야 한다!
 눈발은 거세지 않아서 걷기가 편했다. 급한 마음에 빨리 걸으려다 넘어질 뻔도 했지만 그래도 멈출 수는 없었다. 얼마 걷지 않았지만 귀가 하늘이 점점 밝아져 여자의 발자국을 따라가기가 편했다. 집 몇 채를 지나, 발자국이 들어간 곳은 마을에서 살짝 떨어진 작은 집이다. 집에는 주홍 불빛이 세어져 나오고 있었다. 오랜만에 가슴이 쿵쾅거렸다. 누군가를 찌를 때나, 칼을 아슬아슬하게 피할 때나 느껴지던 그 쿵쾅거림이다. 나는 내 발자국을 지우며 슬금 걸어가 초가집 담벼락 옆에 섰다. 집 안에서는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왔다.
 “이 겨울은 어찌 나신대요.”
 “그러게나 말이다. 우리는 삯 바느질이라도 하지.”
 여자와 그 어미의 목소리다. 어미의 목소리를 들어도 누구의 목소리인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누구의 목소리를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이모님은 홀로 오라버니를 어찌 키우셨대요.”
 “대단한 분 아니겠니. 아들이 벙어린걸 알고 쫓겨나셨을 때 연고도 없는 이곳에 정착하신 분 아니니. 나도 언니 덕에 이곳에 올 수 있었고…. 이목 때문에 찾아가지 못해 미안하기만 하구나.”
 “아니에요, 어머니. 오라버니도 이해하실 거예요.”
 “팔다리 멀쩡한 아낙네도 건사하기 힘든 데, 그 애는 어떨지….”
 다리가 잘렸을 때도 이렇게 심장이 터져나갈 것 같았던가. 손아귀의 힘이 풀려 지팡이를 놓쳐버리자, 지팡이는 땅으로 떨어져 떼구루루 굴러가며 멀어진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새벽 어스름이 물러나고, 눈이 그치고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밤새 쌓인 눈은 점점 녹아 사라지고, 여자의 발자국도 점점 흩어지고 있었다.
 
 
 
 
written by 홀연 / 밤의작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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