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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단편 연재] 대신 총을 쏴 드립니다.
게시물ID : readers_3248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밤의작가들
추천 : 6
조회수 : 263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8/10/17 20:4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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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가 가게 앞에 도착한 것은 오후 2시 경이었다. 가게 주변의 가로수에선 벚꽃들이 일제히 탐스럽게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었다. 여자는 걸음을 멈추고, 어깨에 메고 있던 에코백을 다시 추켜올렸다. 봄볕이 지나치게 따사로웠는지 여자의 앞머리는 살짝 땀에 절어 있었다.
 
 ‘그래, 여기야. 틀림없어.’
 여자는 왼손에 들고 있는 명함과 간판을 번갈아 들여다보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검정색 간판에 작지만 분명하게, ‘Kitchen Tristón’이라는 노란 글자가 새겨져있었다. 다이아몬드 세 개가 나란히 붙어있는 듯한 모양의 로고도 똑같았다.
 어디선가 바람 한 줄기가 불어와 벚나무 가지를 흔들더니 부드럽게 여자의 이마를 스치고 지나갔다. 벚꽃잎 하나가 팔랑거리며 여자의 발밑에 떨어졌다.  
 여자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결심한 듯 힘차게 유리문을 열었다.
 딸랑, 종소리가 났다.
 “어서 오세요!”
 단발머리를 질끈 묶은 주인이 경쾌한 목소리로 여자를 맞았다. 가게 안은 여자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아담한 구조였다. 나무 선반과 냉장 쇼케이스에 몇 가지 식재료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가게 한구석엔 작은 테이블과 의자 두 개가 놓여있었다. 주방은 반 오픈 형식이었지만 안쪽이 잘 보이진 않았다.
 “저…, 여기가 키친 트리스…톤….” 여자는 말끝을 흐리며 손에 쥐고 있던 명함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 모습을 보고 주인은 다시 경쾌하게 응대했다.
 “네, 맞아요. 키친 트리스톤이에요. 혹시 다른 분한테 소개받고 오신 건가요?”
 “아뇨, 저기….”
 주인은 익숙하다는 듯이 상냥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일단 앉으세요. 차 한 잔 드릴게요.”
 
 둘은 유자에이드 두 잔을 테이블에 두고 마주 앉았다. 여자는 빨대로 에이드를 한 모금 쭈욱 빨아들였다. 눈이 번쩍 뜨일만한 상큼한 맛이었다. 여자는 아까보다 한결 생기가 도는 목소리로 외쳤다.
 “동화아파트 104동 1209호 김우진!”
 “네?”
 “여기서 쿠킹 박스를 주문했었어요. 1년 전에도 그랬고, 아마 거의 매주 그랬을 거고, 어쩌면, 이번 주 금요일에도 또 주문할지 몰라요. 아니, 확실해요!”
 주인은 고개를 갸웃, 하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한 번이라도 찾아주신 손님이라면 제가 다 기억을 하지만, 다른 분께 그 정보를 오픈하는 건 곤란한데요. 두 분이 어떤 사이이신 건지….” 
 여자는 고개를 푹 숙였다.
 여자의 앞에는 살짝 구겨진 명함이 놓여있었다. 작년 이맘때쯤, 그의 집 식탁 밑에서 주운 명함이다.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이 명함을 주워 간직했었지. 행복의 한 조각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무슨 보물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소중하게…….
 명함 위로 투둑, 물방울이 떨어졌다. 어느샌가 여자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바람을 피웠더라고요.”
 여자는 울먹이며 말했다.
 “무려 1년 동안이나. 저는 까맣게 몰랐어요. 항상 회사일이 바쁘고 야근이 많대서, 지금까지 그 말을 그대로 믿고 의심 한 번 못 해본 거예요, 바보같이. 근데 알고 봤더니 주말마다 여자를 집으로 불러들여서 놀았더군요. 이 여자 저 여자 매주 바꿔가면서요. 다들 저처럼 속은 거겠죠, 처음엔 다정한 사람이거든요. 집으로 초대해서 요리를 해주고, 와인과 함께 근사한 분위기를 만들고, 둘이 꼭 달라붙어서 밤새……. 저한테 해줬던 것처럼 모든 여자들한테 그랬던 거예요. 그 사실을 알고 나서 얼마나 충격이었는지…. 근데 이 새끼는 당황하지도 않더라고요? 저는 정말 힘들게, 진짜 힘들게, 헤어지자는 말을 겨우겨우 꺼냈는데, ‘그래, 그럼.’ 이게 다였어요. 너 따위, 아쉽지도 않다는 듯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주인이 말없이 휴지를 건넸다. 여자는 휴지로 눈두덩을 누르며 마음을 진정시켜보았지만 또 눈물이 주르륵 새어 나왔다.
 “저는 아직도 이렇게 눈물이 나요. 매일 잠도 못 자고…. 자꾸 그 새끼 SNS를 들여다보게 돼요. 한 번 깨닫고 나니까 이젠 훤히 보이더라고요. 철저하게 계산해서 찍은 사진 하나, 사소한 듯 의미심장하게 남겨진 댓글 하나, 그 속에서 이 여자 저 여자한테 뭔가를 흘리고 있었단 걸요. 예쁘장한 여자들한텐 벚꽃 보러 가자는 말까지 먼저 하더라고요? 억울해요. 내가 가자고 할 땐 꽃가루 알러지 있어서 안 된다더니. 난 그래서 사귀는 내내 꽃구경 한 번 못 해봤는데……. 이번 주 금요일에도 여자랑 약속이 있을 거예요. 뻔해요. 메뉴는 또 ‘감바스 알 아히요’겠죠. 저한테 처음 해준 요리도 그거였거든요. 귀찮은 건 딱 질색하는 사람이니까 분명 그 요리를 할 때마다 여기서 재료를…”
 여자는 말끝을 흐리면서 주인의 눈치를 살폈다.
 “네, 매주 쿠킹 박스를 주문하시는 분, 동화아파트, 감바스 알 아히요, 알고 있어요. 이번 주 금요일 주문도, 이미… 하셨구요.”
 기다리던 대답을 들은 것인지, 아니면 듣고 싶지 않았던 대답을 들은 것인지, 여자는 고개를 떨구고 흐느꼈다. 여자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한참 만에 여자는 눈물을 닦고, 코를 팽 소리 내어 풀었다. 그리고 에코백에서 검정 비닐봉지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왔어요. 쿠킹 박스에, 이걸 넣어주셨으면 해요.”
 “이게 뭔가요?”
 주인의 물음에, 여자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평범한 새우예요. 그냥…, 실온에 좀 오래 있었던? 아무리 생각해봐도 다른 방법이 없더라구요. 그 사람 배라도 아프게 해야 제가 덜 억울할 것 같아요. 부탁드려요.”
 주인은 봉투를 열어보지도 않고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저흰 규모는 작지만, 이래 봬도 좋은 재료만 골라서 양심껏 장사하는 곳이에요. 손님들께 상한 재료를 보낼 수야 없죠.”
 “역시, 그렇겠죠….”
 여자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신,” 주인의 눈빛이 묘하게 반짝였다.
 “저한테 맡겨주세요. 제가 시원하게 총 한 방 쏴드릴게요.”
 “네?”
 “하하, 농담이에요, 농담. 설마하니 진짜 총이라도 쏠까봐서요? 걱정 말고, 일단 맡겨주세요. 백 프로 확신할 순 없지만, 제대로만 된다면 분명 만족하실 거예요.”
 
 
◇◇◇
 

 금요일 저녁 6시 30분, 남자는 아일랜드 식탁 앞에 서서 쿠킹 박스를 열었다. 곧 찾아올 새로운 여자를 위해.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여자와 보낼 뜨거운 하룻밤을 위해. 쿠킹 박스 안에는 꼬리만 남기고 껍질을 벗겨놓은 새우, 바삭하게 잘 마른 페페론치노, 두툼하게 편으로 썰어놓은 마늘, 올리브오일, 레몬 반 개, 어슷하게 썰어놓은 바게트가 각각 밀봉되어 아이스팩과 함께 들어있었다. 자세한 요리법이 적힌 종이도 —그리고 물론, 검정색 명함도— 그 안에 있었다.   
 
 남자는 늘 해왔던 것처럼 자신 있게 무쇠 팬을 꺼내 올리브오일을 따랐다. 불을 약하게 조절하고 팬에 마늘을 넣었다. 페페론치노는 양손으로 잘게 부숴서 탁탁 털어 넣었다. 마늘이 노르스름해지자, 남자는 미리 밑간 해 두었던 새우를 팬에 넣고 벽시계의 시간을 확인했다. 그 순간, 펑! 소리와 함께 기름이 튀었다. 
 “아씨, 뭐야? 이거 왜 이래?”
 새우 꼬리에 붙어있는 물총이 제거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남자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달궈진 기름 속에서 새우는 팡팡팡, 신나게 연발탄을 쏘아댔다.
 “앗 따거!”
 남자의 손등 여기저기에 기름이 튀었다. 남자는 얼굴을 찌푸린 채 아이스팩을 손등에 갖다 대었다. 새우가 발갛게 익을 때까지 팬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다가, 겨우 다가가 불을 껐다. 이번엔 레몬을 오른손에 쥐고 즙을 짜냈다. 그러자 레몬즙 한 방울이 엉뚱한 방향으로 튀었다. 남자의 눈이었다.
 “아 시발!”
 남자는 황급히 눈을 비볐다. 하지만, 페페론치노를 만졌던 손이었다. 눈가를 비비면 비빌수록 점점 더 맵고 따가워져서 눈물이 찔끔 흘러내렸다. 싱크대에서 물을 틀어놓고 한참을 헹궈내도 눈물은 쉽게 멎지 않았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남자는 눈이 새빨개진 채로 문을 열어 여자를 맞았다.
 “오빠, 뭐야 왜 그래?”
 빨간 미니 원피스 차림의 여자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어어, 별거 아니야. 이쪽에 앉아.”
 
 남자는 여자에게 와인 한 잔을 건넸다. 그리고, 자신이 정말 고생해서 만든 요리라는 걸 생색이라도 내려는 듯 과장된 몸짓으로 식탁 한가운데에 무쇠 프라이팬을 내려놓았다.
 “짜잔! 오빠가 만든 안주야. 이게 오빠가 스페인 여행할 때…”
 “오빠, 나 갑각류 알러지 있는 거 몰라?”
 여자가 남자의 말을 자르고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남자도 욱하고 짜증이 올라왔지만, 여자의 달싹거리는 도톰한 입술과 봉긋한 가슴에 자꾸 눈길이 가는 바람에 일단은 여자를 살살 달랠 수밖에 없었다.
 “에이, 오빠가 오늘 얼마나 힘들었는데. 맛이라도 좀 봐봐. 이따가 딴 거 시켜줄게, 응?”
 “뭐야, 오빠? 나 알러지 있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지금까지 다 흘려들은 거야? 짜증 나, 진짜! 나 갈래. 지훈 오빠가 영화 보러 가자고 했었는데, 이게 뭐야. 괜히 거절했어.”
 여자는 현관으로 가서 하이힐을 신고는 신경질적으로 스마트폰을 두드렸다. 그리고 남자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그대로 집을 나가버렸다.
 
 남자는 허탈한 듯 한숨을 쉬면서 의자에 걸터앉았다. 포크로 새우 하나를 찍어서 입에 물은 채로 스마트폰으로 식탁 사진을 찍었다. 새우를 우물거리면서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업로드하고 팔로워 목록을 뒤지다가, 이번엔 카카오톡에서 채팅 목록을 휙휙 올렸다. ‘아… 누구 지금 올 만한 애 없나….’ 중얼거리던 남자는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고 있었다. 목구멍이 점점 부어오르는 것 같았다.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캑캑거리면서 목과 턱 주변을 더듬거리다가 입가에까지 손이 닿은 남자는 거울 앞으로 달려갔다. 입술도 팅팅 부어있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지겹도록 새우를 먹어도 아무렇지 않았었는데, 오늘 처음으로 갑각류 알러지 반응을 일으킨 것이다.
 남자는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 부어오른 기도가 가라앉고 다시 편히 숨 쉴 수 있기를 기다렸다. 몸 구석구석엔 두드러기가 번지고 있었다. 미칠 듯이 가려웠다. 남자는 새우처럼 등허리를 굽힌 채로 이곳저곳을 벅벅 긁느라 밤새 한숨도 잘 수 없었다.
 
 날이 밝아올 무렵에야 겨우 알러지 반응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하지만 안도하기엔 일렀다. 남자의 손등엔 화상자국이 선명하게 남겨져 있었다. 작은 상처 서너 개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려 했지만, 잊을 만하면 자꾸 화끈거려 수시로 연고를 발라야만 했다.
 손등이 완전히 나으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 남자는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실연당한 여자의 상처가 완전히 아물 때 즈음, 그때 즈음이 되어야만 남자의 손등에 남은 흔적도 비로소 좀 옅어질 터였다. 그때까지 몇 주가 걸리든 몇 달이 걸리든, 남자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눈물이면 눈물, 고통이면 고통.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이 ‘키친 트리스톤’의 원칙이니까.
 

◇◇◇
 

 손님 한 명 한 명의 사연에 맞춰 정성껏 쿠킹 박스를 만들어 배송해주는 키친 트리스톤. 그곳에선 특별한 능력을 가진 주인이 늘 당신의 주문을 기다리고 있다. 자기 자신을 위한 혹은 다른 누군가를 위한 특별한 요리가 필요한 순간이 찾아온다면, 언제든지 키친 트리스톤의 문을 활짝 열어보기를.
 아, 혹시 주문하지 않은 쿠킹 박스가 문 앞에 놓여있더라도 너무 겁먹지는 말고.
 
 
 
 
 
- written by 설탕연필 / 밤의 작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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