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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단편 연재] 흘러가는 시간을 어찌해야 할까요
게시물ID : readers_3262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밤의작가들
추천 : 1
조회수 : 197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8/11/16 18:4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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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흘 전쯤이었나, 손녀딸아이에게 오랜만에 전화가 왔어요. 여름휴가를 내기가 쉽지 않다면서요, 추석 때는 꼭 내려올 테니 한복을 차려입고 공원으로 나가 같이 바람도 쐬고 사진도 찍자고 하더군요. 갑자기 사진이라니요, 난 썩 내키지 않았답니다. 타지에서 일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나를 챙기려는 손녀의 마음 씀씀이는 고마웠지만, 이제 와 사진은 찍어 무얼 하겠어요.
 당신은 일찍 세상을 떠났으니 이런 내 맘을 모르겠지요. 그래요, 무심한 당신, 참 이르게도 떠났습니다. 나를 혼자 내버려 둔 채로 액자 속에서 밝게 웃고 있는 당신이 야속하기만 합니다. 사진 속 당신 얼굴은 어찌 그리 주름 하나 없이 깨끗한지. 나는 이제 거울 보기도 싫어졌답니다. 목욕을 갈 적마다 동네 아줌마들이 다 모여들어 피부 결이 어쩜 이리도 고우냐며 시끄럽게 떠들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 내 몸은 파삭하게 마른 나뭇가지 꼴이지 뭐예요. 
 
 영정 사진을 준비해두어야 한다는 것쯤이야 나도 알지요. 한 번은 복지관에서 연락도 왔었답니다. 무료로 사진을 찍어주는 행사가 있다고요. 옆집 할멈도 흰 머리를 곱게 빗어 넘기고 복지관으로 가 사진을 찍었을 겝니다. 사람들 참 미련도 하지. 영정 사진을 꼭 늙은 모습으로 해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답니까? 나는 젊은 날에 찍어둔 사진 중에서 골라두기로 마음을 먹었어요. 당신과 마주 앉아 밥을 먹던 예전의 모습으로요. 매일 아침 세수를 하고 크림을 찍어 바를 때 보는 거울 속의 내 얼굴은 그저 나 혼자 보는 것으로 족합니다.
 
 손녀딸아이에게 전화가 걸려온 그다음 날에, 장아찌를 한 통 담갔답니다.
 입맛은 없었지만 달걀이라도 한 판 사둘까 싶어 동네 마트에 간 것이 시작이었지요. 마트에 진열된 양파가 유독 탐스럽더군요. 갓 제철을 맞이한 햇양파는, 꼭 우리 첫째 젖먹이 시절 볼처럼 통통한 것이 윤기가 자르르 흘렀습니다. 덜컥 양파 한 망을 사서 집에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보니 장아찌를 담가야겠다 싶었어요. 속이 단단하게 여문 제철 양파의 맛을 손녀딸아이에게도 맛보여주려면, 장아찌가 답이었지요.
 
 당장 다시 길을 나섰습니다. 한 조각만 씹어도 입맛이 확 살아나는 장아찌를 담그려면 청양고추가 필요했거든요. 이번엔 마트가 아니라 길 건너 은행 옆 골목을 따라 쭉 늘어선 난전으로 갔어요. 마트 청양고추는 어디 공장에서 찍어내기라도 하는 건지 풋내만 나고 통 맵지가 않아요. 난전 두 번째 자리의 할멈만이 내 맘에 쏙 들게 제대로 매운 고추를 팔곤 했지요.
 한데 여름 햇살이 어찌나 지독했던지, 고추는 쪼글쪼글 다 말라가고 있더군요. 이렇게 시들시들해서 어찌 쓰냐며 새 걸 내놓으라고 타박을 하고 싶었지만 이내 생각을 거두고 이천 원을 내밀었습니다. 뜨거운 햇볕에 그을려 파삭파삭 말라가는 것이 고추만은 아니었으니까요. 양산을 든 채로 신호등을 기다리며 서 있는 잠깐의 시간 동안에도 등에선 땀이 줄줄 흐를 정도였으니, 온종일 난전에 나와 있는 그 할멈은 오죽 했겠습니까.
 
 오늘쯤에는 장아찌 국물을 다시 끓여야 해서, 장아찌가 들은 유리단지를 냉장고에서 꺼내 뚜껑을 열었습니다.
 싱그러웠던 채소들이 생기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 보이네요. 양파와 오이의 희고 푸른 살결에 서서히 갈색이 스며들고 있습니다. 건더기를 체에 밭치고, 국물만 따라내어 불에 올렸답니다.
 간장물을 끓여 식히고 나면, 다시 원래 있던 용기에 부을 차례예요. 며칠 만에 세상의 빛을 만나 한숨 돌리고 있던 양파와 오이, 그리고 청양고추는 다시 어둠 속에 잠기게 될 테지요.
 채소들 위로 간장물을 붓고 있자니, 문득 내가 이들을 가을로 데려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유리단지 안에 우수수 쏟아졌던 여름의 조각들이, 이제 하나둘 낙엽이 되어가네요. 이 유리벽 안의 시간은 나를 둘러싼 공기보다 빠르게 흘러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나 며칠 밤이 지나면 이 낙엽들은 가을에 멈춰 서서 가만히 나를 기다려주겠지요. 추석 즈음에는, 손녀딸아이와 내가 마주 앉은 밥상에 이 장아찌가 오르게 될 거예요.
 
 국자에 남은 간장물을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봅니다. 시들어버린 고추가 그래도 제 역할을 톡톡히 했는지, 맵싸한 것이 입맛을 당기게 하네요.
 채소를 갈무리해 저장 음식을 만드는 건, 자연의 한순간을 간직하는 일이라 생각했었습니다. 자연의 열매가 반짝반짝 빛을 내뿜는 순간에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재우고 끓이고 졸여서, 두고두고 만끽하기 위함이라고요. 한데, 실은 그게 아니었나 봅니다.
 세월 앞에 시들어가는 것들을 좀 더 붙들어보려는 노력이, 이 장아찌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잖아요? 이 한 계절, 아니 당장 오늘 하루조차 넘기기 어려울 정도로 마지막 숨을 토해내고 있는 작은 생명들을 다음 계절까지 붙잡아두기 위해, 우리는 이렇게 바지런히 손을 움직여 장아찌를 담그고 잼을 졸이는 게 아닌가 싶어요.
 
 당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날, 그날 우리는 사진관으로 향했었지요. 의자에 앉아 등을 꼿꼿이 세우고 카메라를 쳐다보는 당신의 모습을, 나는 먼발치서 바라보며 그저 눈물만 흘렸답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아채고 미리 찍어둔 그 사진 덕분에 우리는 지금 이렇게 함께 있네요. 액자 속 당신의 시간은 30년 전에 멈춰 있고 야속하게 나의 시간만 흘렀지만, 그래도 사진 덕분에, 나는 당신을 생생하게 추억할 수 있어요.
 
 장아찌에 누름돌을 얹으려다 말고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서랍 속에서 옥색 저고리를 꺼내 몸에 대어봅니다. 거울에 비친 옥빛이 참 곱기도 하네요.
 그래요, 이 저고리를 꺼내어 입고 사진을 찍어야겠어요. 시들해졌다고 마냥 초라하게 여길 것만은 아니니까요. 더 늦기 전에, 우리 손녀딸아이가 두고두고 꺼내어볼 수 있는 사진 한 장, 만들어주어야지요.
 당신, 그곳에서 혼자 외롭더라도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손녀딸아이가 추억할 사진을 많이, 아주 많이 만들고 난 후에야 나는 맘 편히 당신 곁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으니까요.
 
 나의 시간이 멈춘 후에도 사진만은 손녀딸아이의 곁에 남게 되겠지요. 하루 뒤, 또 하루 뒤, 짧은 하루가 차곡차곡 쌓인 후에 닿게 될 어느 곳에서, 우리는 똑같이 눈가에 주름이 진 모습으로 서로를 마주 보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그러고 보면, 사는 게 그리 쓸쓸한 일만은 아니다 싶네요. 오늘은 찬물에 밥 한술이라도 든든히 먹고 자야겠어요.
 안녕히 주무세요, 당신.
 많이 보고 싶습니다.
 
 
 
 
- written by 설탕연필 / 밤의 작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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