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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희랍어 시간' 발췌(글有영상有)
게시물ID : readers_3272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락서
추천 : 1
조회수 : 451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8/12/06 19: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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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안녕하세요. 락서입니다.
오늘은 어제 읽었던 한강의 '희랍어 시간' 발췌를 가져왔어요.
영상으로 낭독하기도 했지만, 글로 보시기를 선호하시는 분들이 계실 거 같아 타이핑도 해왔습니다. ㅎㅎ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이고, 문장이 아름답다 생각하여 이렇게 공유해봅니다.
마지막 발췌는 원문이 이탤릭체라 기울였는데 잘 안 보이실라나요.. ㅠㅠ
읽기를 원하시면 글로, 듣기를 원하시면 영상으로 보시면 될 것 같아요! 
여러분들에게는 어떤 문장이 될지 궁금하네요.


34.

  당신의 얼굴은 어머니 쪽을 더 닮았지요.

  질끈 묶은 검은 머리채와 다갈색 피부도 보기 좋았지만, 가장 아름다운 것은 눈이었습니다. 고독한 노동으로 단련된 사람의 눈. 진지함과 장난스러움, 따스함과 슬픔이 부드럽게 뒤섞인 눈. 무엇이든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일단 들여다보겠다는 듯, 커다랗게 열린 채 무심히 일렁이는 검은 눈.

  이제 당신의 어깨를 툭 건드린 뒤 필름 한 조각을 달라고 손짓해야 하는 순간이었겠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이 두 눈에서 필름조각들을 떼어낼 때까지 그저 당신의 동그란 이마를, 거기 흘러내려 달라붙은 곱슬곱슬한 잔머리칼을, 순수한 혈통의 인도 여자처럼 조그만 보석을 붙이면 완전해질 것 같은 콧날을, 거기 맺힌 동그란 땀방울들을 지켜보고만 있었습니다.


44. 

  인간의 모든 고통과 후회, 집착과 슬픔과 나약함 들을 참과 거짓의 성근 그물코 사이로 빠져나가게 한 뒤 사금 한줌 같은 명제를 건져올리는 논증의 과정에는 늘 위태하고 석연찮은 데가 있기 마련입니다. 대담하게 오류들을 내던지며 한 발 한 발 좁다란 평균대 위를 나아가는 동안, 스스로 묻고 답한 명철한 문장들의 그물 사이로 시퍼런 물 같은 침묵이 일렁이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계속 묻고 답합니다. 두 눈은 침묵 속에, 시시각각 물처럼 차오르는 시퍼런 정적 속에 담가둔 채. 나는 당신에게 왜 그토록 어리석은 연인이었을까요. 당신에 대한 사랑은 어리석지 않았으나 내가 어리석었으므로, 그 어리석음이 사랑까지 어리석은 것으로 만든 걸까요. 나는 그만큼 어리석지는 않았지만, 사랑의 어리석은 속성이 내 어리석음을 일깨워 마침내 모든 것을 부숴버린 걸까요.


68. 

  오래전의 이런 여름 발, 그녀는 길을 걷다가 혼자 웃은 적이 있었다.

  갸름하게 부푼 열사흘 달을 보고 웃었다.

  어떤 사람의 시무룩한 얼굴 같다고, 움푹 파인 둥근 분화구들은 실망을 숨긴 눈 같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마치 그녀의 몸속에 있는 말들이 먼저 헛웃음을 터뜨리고, 그 웃음이 그녀의 얼굴에 번지는 것 같았다.

 

  하지를 갓 넘기고 찾아온 더위가 이렇게 어둠 뒤로 주춤 물러선 밤,

  그리 오래지 않은 오래전의 밤,

  그녀는 아이를 앞세운 채, 커다랗고 차가운 수박을 두 팔로 껴안고 걸은 적이 있었다.

  목소리가 다정히, 최소한의 공간으로 흘러나와 번졌다.

  입술에 악물린 자국이 없었다.

  눈에 핏물이 고여 있지 않았다.

 

79.

  지금쯤은 고백해도 괜찮을까.

  네가 연습하는 소리가 시끄럽다고 나는 투덜거리곤 했지만, 너는 다혈질의 성격대로, 오랜 시간 훈련받은 성량으로 나를 꼼짝 못하게 밀어붙이곤 했지만, 아마 넌 짐작 못 했을 거야. 서울보다 추웠던 프랑크푸르트에서 맞은 독일의 첫 겨울, 낯선 교실과 언어와 사람들에 지쳐 돌아온 내가, 아파트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네 노래를 들으며 벽에 기대 앉아 있곤 했다는 걸. 그 목소리가 어떻게 내 얼굴을 만져주었는지.

 

117.

  하지만 나는 어김없이 그 세계의 것들에 매혹되었지. 이를테면 아리스토텔레스를 강의하던 보르샤트 선생이 잠재태에 대해 설명하며 앞으로 내 머리는 하얗게 셀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죠. 지금 눈이 내리고 있지 않지만, 겨울이 되면 적어도 한번 눈이 올 것입니다라고 말했을 때 내가 감동한 것은, 오직 그 중첩된 이미지의 아름다움 때문이었어. 강의실에 앉은 젊은 우리들의 머리칼이, 키 큰 보르샤트 선생의 머리칼이 갑자기 서리처럼 희어지며 눈발이 흩날리던 그 순간의 환상을 잊을 수 없어.

 

174.

  눈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침묵이라면, 비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끝없이 긴 문장들인지도 모른다.

  단어들이 보도블록에, 콘크리트 건물의 옥상에, 검은 웅덩이에 떨어진다. 튀어오른다.

  검은 빗방울에 싸인 모국어 문자들.

  둥글거나 반듯한 획들, 짧게 머무른 점들.

  몸을 구부린 쉼표와 물음표.




출처 https://youtu.be/ToJW8mPLet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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