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초단편] 봄이 온다.
게시물ID : readers_3307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지인(志忈)
추천 : 1
조회수 : 288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9/01/19 22:47:16
옵션
  • 창작글

-봄이 온다. -

3일 만에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늦은 시간이라 앉을 자리는 넘쳤다. 두 명이 동시에 앉을 수 있는 자리에 앉고나서, 오른쪽 좌석에 가방을 두었다. 꽤 무거운 무게가 어깨에서 사라지자 3일 동안 누적된 피로감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지난 3일간은 ’전국 맛집 탐방'이라는 프로그램의 리포터를 2년간 하면서 가장 힘든 날들이었다. 약간의 고소공포증을 앉고 뛰어내린 번지점프, 뱃멀미로 인해 위장마저 토해 버릴 것 같은 상태에서 한 하루 동안의 어선체험, 어촌행사에서 얼큰하게 취하신 동네 어르신의 나쁜 손짓까지......

씁쓸한 웃음과 함께 지난 3일을 상기하다가 떠오른 것은 3일간 제대로 씻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킁킁” 하고 냄새를 맡아보지 않아도 몸에서는 분명 3일간의 냄새가 날 것이다. 향수, 화장품이 만들어 주는 향기를 머금고 있는 대부분의 여성에게서 점점 멀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버스가 과속방지턱을 넘으면서 덜컹하는 소리를 내자마자,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면서 고개가 완전히 숙어졌다. 오른쪽 좌석에 있던 가방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숙어진 고개는 ‘아 빨리 집에 가고 싶다’라고 되뇌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추위가 느껴져서 두 번 정도 걷어서 팔이 살짝 보이게 두었던 남방소매를 다시 폈다. 앞에서 강하게 불어오는 바람은 집으로 가는 발걸음의 속도를 낮추었다.

집에 도착하니 시간이 시간인지라 가족들은 모두 자는 것 같았다. 그들의 잠을 깨울까 봐 어두운 거실을 살금살금 지나서 내 방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불을 켜자 3일 전과 그대로인 내 방이 나타났다. 그대로 누워 누가 잡아가도 모를 정도의 상태로 자고 싶었지만, 거울 속에 비친 내 몰골을 보고 난 후에 바로 욕실로 직행했다.


샤워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가 너무 차갑다. ‘아 이놈의 보일러... 작동 시간이 너무 느리다.’ 다년간의 경험으로 볼 때 최소 5분은 지나야 욕실의 오렌지색 조명처럼 따뜻해질 것이기 때문에 차가운 폭포처럼 쏟아지는 물줄기 옆에 쭈그리고 앉아 전라 상태의 몸을 두 팔로 감싸 앉은 채 따뜻함이 몰려오기를 기다렸다.

5분이 지났는지 욕실온도가 높아졌다. 어느새 작은 욕실은 따뜻한 수증기로 가득 찼다. 안개 속에서 샤워기가 뿜어내는 따뜻한 폭포를 찾아 떨리고 있는 몸을 맡겼다. 아, 며칠간 쌓여있던 피로감이 바닥으로 쉼 없이 떨어진다. 향수, 화장품 향기가 나는 대부분의 여성에게로 다시 다가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듦과 동시에 ‘사치’를 부리고 싶은 마음이 태동했다.

세면대 위에 놓인 샴푸와 바디워시의 펌프질을 평소보다 두 배 아니, 네 배로 했다. 양손 가득한 펌프질의 결과물을 머리와 몸 구석구석이 끈적일 정도로 바르고 나서 칫솔의 머리가 부러질 정도의 양의 치약을 짜서 양치질을 시작했다. 입속 가득한 거품을 성에가 낀 거울에 뱉자마자 모자이크 처리된 것처럼 보이던 거울 안이 점점 선명해 지면서 보인 것은 얼굴을 제외하고 몸의 모든 부분이 하얀 거품으로 둘러싸인 내 모습이었다. ‘이게 될까?’라고 생각하자마자 네모난 거울안에 있던 털복숭이 하얀 양이 된 내가 사라졌다.

거품 안에서 헤엄치는 느낌은 마치 부드러운 실크스카프가 온몸에서 살짝 붙었다가 떨어지는 것을 반복하는 듯했다. 그 기분 좋은 느낌에 취한 채 헤엄치다가 조금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 보고 싶어져 고개를 숙이고 아래를 향해 두발을 있는 힘껏 찼다. 묵직한 느낌의 하얀거품을 헤치면서 계속 잠수하다가 단단함이 느껴졌다.

아마 가장 낮은 곳까지 잠수해 온 모양이다. 더는 내려갈 곳이 없어 몸의 방향 틀어 가장 낮은 곳에 두 발을 살며시 얹고 나서 두 무릎을 굽히고 두 팔을 위쪽으로 힘껏 뻗었다. 시선을 위쪽으로 돌리고 ‘이게 될까?’라고 생각하자마자 굽히고 있던 두 무릎을 제자리로 돌렸다. 온몸이 빠르게 위로 상승했다. 미끄러지듯 하얀 거품을 밀어내면서 온몸이 점점 속도를 내다가 멈췄다. 두 손으로 눈앞에 하얀 거품을 걷어내자 욕실의 오렌지색 조명이 보였다. 그것은 봄바람 같은 따스함으로 내 몸을 감싸주었다.

방으로 돌아와 화장대 앞에 앉아 네, 다섯 가지 화장품을 묽은스킨에서 딱딱한 크림 순으로 얼굴에 흡수시켰다. 작은 방에 여러 향기가 섞여 퍼져감과 동시에 머리의 물기를 말리기 위해 감싸놓은 타월을 피한 물방울 몇 줄기가 등을 따라 내려와 따뜻한 몸을 서서히 식히기 시작했다.

몸의 온기는 어느새 사라졌다. 서늘함을 줄이려고 조금 전 환기를 하기 위해 열어놓은 창문을 닫으려고 할 때 창밖에 야경이 눈에 들어왔다. 전망 좋은 고층 빌딩에서 바라보는 야경처럼 규모나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은 아닌 그저 불을 켜놓은 아파트나 주택가의 불빛이 아직 잠들지 않은 채 어둠속에 남아 있는 것일 뿐이었지만 오늘따라 나름 분위기 있는 야경처럼 느껴졌다. 그 때문일까? 이 분위기를 바라보며 달콤한 술을 한 모금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냉장고에 와인이나 칵테일이 있을 리는 없다. 분명 아빠가 채워놓은 맥주캔과 소주병만 가득할 것이다. 잠시 생각하다 ‘맥주를 와인처럼 마실 수 있는 괜찮은 아이디어’가 떠올라 부엌으로 향하기로 결정했다.

방문을 열자 어둠 속에서 전자제품들의 대기 불빛이 별처럼 빛을 내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 빛은 너무나도 작아 부엌까지 가는 길을 밝혀주지는 못하기 때문에 냉장고가 만들어내는 낮은 소음에 의지해 어둠 속을 한 걸음 내디뎠더니 발바닥과 마룻바닥의 마찰 소리가 너무 크게 느껴졌다. 자는 가족들을 깨울 수도 있다는 생각에 조금 더 부드럽게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다가 오른손에 느껴진 촉각을 움켜잡고 당겼다.

열린 냉장고 안쪽에 여러 브랜드의 맥주캔이 두 줄로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맨 앞 왼쪽 녀석을 잡아가고 그 뒤에 녀석을 맨 앞으로 옮겼더니 맥주캔들은 다시 두 줄로 서 있게 되었다. 차가운 캔을 들고 방으로 복귀하기 전에 조금 전 생각난 ‘괜찮은 아이디어’를 실행하기 위해 찬장을 열어 눈에 보이는 여러 잔 중에서 와인잔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와인잔이 내게 오면서 다른 잔들을 스치자 조용한 공간이 조금 소란스러워졌지만, 다행히 가족들을 깨우진 않은 것 같았다. 부엌에 올 때 보다 한 층 더 조심하며 방으로 향했다. 살며시 방문을 닫자마자 작은 웃음이 피어났다.

무언가를 ‘몰래’ 한다는 것이 정말 오랜만이었기 때문이다. 성인이 된 이후로 처음인 것 같기도 했다. 부모님 몰래 친구들과,친구들 몰래 나 혼자 하는 것에 스릴을 느낄 때가 많았던 학생 시절로 잠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방에 불을 끄고 취침등을 켰다. 은은한 색의 조명은 따뜻했지만, 완전히 식어버린 몸을 데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창밖에 야경을 바라보며 맥주캔을 개봉해 와인잔에 살며시 부었다. 조명의 빛과 결합된 맥주가 따뜻한 살굿빛을 내며 와인잔에 서서히 채워진다. 어느 정도 맥주를 와인잔에 따르다 멈췄더니 맥주는 스스로 거품을 내다가 잔에 넘치기 바로 직전에 멈췄다. 와인잔을 살며시 쥐고 맥주를 목구멍 아래로 내려보냈다. 입안에서는 씁쓸하고도 부드러운 느낌이 남았고 몸은 서서히 열기를 낼 준비를 한다.

남은 맥주를 들이켜자 빈 와인잔과 따뜻해진 내 몸이 나타났다. 어느새 약한 취기와 함께 더위가 느껴졌다. 창문을 완전히 열고 야경을 바라보자 차가운 바람이 몸을 스쳤지만 마치 봄바람처럼 느껴졌다. 따스한 바람을 맞으면서 맥주캔에 남은 맥주를 와인잔에 살며시 부었다. 맥주는 스스로 거품을 만들어내고, 눈에 보이는 야경의 빛은 점점 번지면서 남은 어둠을 지우고 있었다.

-fin-

글: 지인(志忈)


출처 https://www.youtube.com/channel/UCPk9ouYlHBgmi_ZaFL4_ZMQ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