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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한화를 새로 샀다
게시물ID : readers_3308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그렇기에
추천 : 1
조회수 : 34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9/01/22 04:2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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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준은 어둔 밤에 청계천을 따라 걸었다. 그는 새로 산 방한화가 바깥의 찬 공기를 잘 막아주는지 확인하고 있는 중이었다. , 평소보다 따뜻한 것 같기도 하고. 희준은 자신의 발을 감싸고 있는 보아털에 발가락을 비벼 보았다. 그래도 싸게 샀으니 말야. 그는 신발의 성능을 확인하기 위해 얼른 강바람이 몰아쳤으면 했다. 길목에 흩뿌려져 있는 작은 돌맹이도 일부러 콱하고 밟아보았다.
 

청계천의 표면엔 살얼음이 끼어 있었다. 희준은 강물을 바라보며 동치미를 떠올렸다. 동치미 같은 강물을 벌컥벌컥 마시는 거대한 입을 상상하고 있으려니 몸이 으슬으슬해지는게 느껴졌다. 동시에 조금 노곤해지기도 한 그는 으아 하고 하품을 했다. 하품을 한 희준은 그게 자신이 오늘 낸 소리 중에 가장 큰 소리라는 것을 깨닳았다. 하품으로 쥐어짠 눈물이 희준의 시야를 흐릿하게 가렸다. 가로등 빛이 눈물 때문에 움직일 때 마다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래도 희준은 눈물을 닦아내지 않았다. 벌써 몇 백번이나 걸어본 산책로다. 이 시간에 산책로에서는 사람보다 고양이와 마주칠 확률이 더 높다. 소리를 지르던, 걸음을 비틀거리던 이곳에선 이상할게 없다고 희준은 생각한다. 이상한 것을 만들어내는 것은 사람들이다. 제멋대로 걷고 있는 희준을 향해 어둠속에서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청계천 어딘가에 있는 외가리였다. 그녀석의 울음은 희준에게 경고처럼 느껴졌다. 이곳에도 주인이 있다. 예의를 지켜라. 희준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던 물가를 바라봤다. 어둠이 있었다. 어둠에도 주인이 있다는 사실에 두려워진 희준은 걸음을 빨리했다. 외가리는 어쩌면 나를 공격할지도 모른다. 그 긴 부리로 내 눈을 쪼아먹을지도 모를 일이지. 희준은 주먹을 꽉 지었다.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자신도 외가리에게 한방을 먹일 것이라는 듯이.
 

코트를 입은 한 남자가 반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육십대 정도일까? 희준은 남자의 나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노인이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희준은 그에게도 젊은 시절이 있었을 것임을 짧게 떠올렸다. 그것은 너무나 짧아서 생각을 안하니만 못한 것이었다. 희준은 자신의 미래도 꼭 그만큼 짧게 떠올리곤 했다. 그는 추운 듯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그가 걸친 코트는 한 겨울에 청계천을 걸어다닐만한 복장은 아니었다. 희준이 그의 복장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그는 어느새 희준을 스쳐지나가 버렸다. 또 다시 텅빈 산책로가 희준 앞에 있었다. 이상하게도 선명하게 있었다. 그것이 현실이라는 것이 납득이 될 정도로 선명하게. 희준은 마음만 먹으면 시청까지도 갈 수 있을 것이라는걸 알았다. 현실적으로 그럴 가능성이 존재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마장동의 소 석상을 보았고 그 앞에 있는 다리에서 뒤로돌아 이때까지 걸어온 길을 되돌아갔다.
 

희준은 신발이 추위를 잘 막아주고 있음에 만족했다. 적은 투자로도 큰 기쁨을 얻을 수 있는 법이다. 하지만 그는 그 기쁨이 곧 당연해질 것이라는 것도 알았다. 당연해지지 않는다면 좋을텐데. 희준은 멀리서 자기 앞으로 걸어가는 노인을 바라보며 당연해진 기쁨들을 떠올렸다. 고등학생을 벗어나 늦게 일어날 수 있는 자유를 획득한 일, 천장으로 게임을 하는 상상을 하다 컴퓨터를 구입한 일, 그저 마주치기만 해도 좋았던 누나와 데이트를 하게 된 일. 발을 포근하게 감싸는 털은 곧 숨이 죽을 것이다. 숨이 죽고나면 제 기능을 못하게 되겠지. 신발을 뜯어보던 희준은 그것에서 화약품 냄새가 난다는걸 알게됐다. 언젠가 그가 공장에서 맡아본 냄새였다. 희준은 그곳에서 하루에 14시간 정도를 일했었다. 하지만 퇴근은 언제나 그가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긴 시간이 지나야 가능한 것이었다. 희준은 그렇게 영원을 체험했다. 아침 조회를 마치며 외치는 구호 -불량 제로 아자 아자 아자- 를 하며 퇴근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 하지만 그 영원도 이제 옛날 일이다. 신발 냄새도 그 영원보다는 짧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여전히 희준의 앞에 있었다.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지만 그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기 때문에 희준은 냄새만으로도 그가 거기 있다는걸 알 수 있었다. 희준은 그에게 달려가는 상상을 했다. 그의 어깨를 잡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예의를 지키세요. 당신만 이곳에 있는게 아닙니다. 저도 있고... 어둠 속에도 주인이 있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희준이 달려가기엔 영원만큼이나 먼 곳에 있다. 너무 멀기에 희준은 그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지 조차 알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 담배 냄새는 무엇인가. 금연을 하고 있는 희준이 할아버지에게 화를 내기 위해 만들어낸 구실인지도 모른다. 그 옛날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를 만들기 위해 빌미를 만들어 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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