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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냉소적 삶에 이르게 된 경위진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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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마틴K
추천 : 2
조회수 : 29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9/02/11 22:3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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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삶의 방향성을 충고하는 무수한 강연과 자기계발서들이 말해주는 것은 단 하나이다.

발화자가 가지고 있는 인생에 대한 일개의 견해(doxa).

나이가 지긋한 스님이 와서 삶에 대해 설파하더라도

젊은 나이에 스타트업으로 막대한 부를 벌어들인 사업가의 연설이더라도

그들의 의견은 일종의 견해에 불과하다.

삶은 삶일 뿐 다른 무언가로 비유될 수도 없고 설명될 수도 없다.

가능성을 보였던 사람들은 삶을 예술로 치환하려던 니체와 유미주의자들인데 이들은 이미 정신적으로 파산했다.

한편, 해명될 수 없는 삶에 직면한 견해들은 필연적으로 타인의 견해와 충돌하게 된다.

문제는 느긋한 쾌락주의자와 착실한 성과주의자의 견해는 양쪽 다 제 나름대로 합리적이고 옳다는 점이다.

그러나 왜 우리는 모두 합리적으로 행동하는데 세상은 지옥인가. 이를 삶의 역설, 패러독스(para+doxa)라 부른다.

따라서 특정 견해와 그를 표상하는 인물을 무작정 숭배하는 것은 우스꽝스럽고 부질없는 짓이다.

그러나 특정 견해를 가지지 않고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랑 불가능한 일이다.

이미 삶이란 게임에 내던져진 인간에게 삶의 객관성을 파악하려는 시도는 삶에 아무것도 추구할만한 가치가 없음을 보여줄 뿐이다.

삶이란 본질적으로 공허하고 목적성을 결여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삶의 견해에 '옳음'을 판단하려는 시도는 부질없는 짓이다. 참과 거짓을 판단할 수 없는 명제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사람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데도 신에게 신탁을 받으려는 자를 닮아 있다.

이것은 일종의 광기이다. 보들레르가 취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 말한 것은 여기에서 비롯된 절망적 몸짓이다.

출구 없는 지옥이라면 즐거운 지옥으로 만들자는 그의 태도는 진취적이라기보다는 씁쓸하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높은 지능으로 말미암은 자기 인식이 저주이자 자기 혐오의 원인일수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발사의 역설을 생각해보자면, 내가 말한 이 내용도 삶에 대한 견해에 불과하므로 나의 냉소적 가치관을 반영한 글일 뿐이다.

결국 삶은 자신을 비춰보는 거울이나 원하는 대로 모양을 바꾸는 것에 불과한 것인가.

그렇다면 삶은 더더욱 공허하다. 

답은 자살이다. 바이닝거는 과정은 틀렸을지 몰라도 답은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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