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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알유희> 등 네 권의 책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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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빨간냄비
추천 : 2
조회수 : 577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9/03/02 21:05:25
<타르코프스키의 순교일기> (안드레이타르코프스키,1986/김창우,두레,1997)

<이타주의자의 은밀한 뇌구조> (김학진,갈매나무,2017)

<당신들의 천국> (이청준,1975)

<유리알유희> (헤르만헤세,1943/박성환,청목,1993)


책게에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런 채로 2년 가까이 지났다. 바빴다. 우선순위에 놓여야 하는 일들이 빼곡했다. 내가 보지 못하는 어떤 특정한 각도에서 이를 바라본다면, 역시 나는 알아채지 못하는 우매함이 거기 깃들어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는 현재진행형이다. 2017년 말경부터 '올해가 지나기 전에 뻘글이라도 하나 싸질러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벌써 2019년 3월이다. - 왜 꼭 책게에 글을 쓰려고 할 때마다 고-급 위트로는 승부하지 못하고 즈질 코미디로나마 관객을 웃기려 드는 3류 코미디언이 된 듯한 느낌적 느낌이 드는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코 훌쩍. 


<타르코프스키의 순교일기> (안드레이타르코프스키,1986/김창우,두레,1997)
IMG_1275.jpeg

꽤 오래 전에 절판된 후, 다시 펴내진다는 소식을 아직 듣지 못했다. 중고가격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2년 전 여름께에 도서관에서 빌려 이 사진을 찍어두었다. '사랑'에 대해 이 글에 담긴 태도가 절대적 진리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 다시 펴내진다면 제목을 바꾸는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이 책의 영어 원제는 그냥 Diary,  즉 '일기'인 것으로 알고 있다.



<이타주의자의 은밀한 뇌구조> (김학진,갈매나무,2017)

"공감 능력은 정서적이고 직관적인 측면이 강한 반면, 관점 이동 능력은 인지적이고 분석적인 측면이 강하다. 지나치게 공감에만 치우친 감정적 대응은 사회적 상황에 대한 냉철한 분석을 방해할 수 있고, 공감이 결여된 관점 이동 능력은 타인의 감정을 악용한 비윤리적 행위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합리성과 공정성의 본질은 '확실한' 완성형이 아니라 '불확실한' 진행형일지 모른다. 합리성이나 공정성을 완성된 결과나 상태로 보면 오히려 그 본질을 왜곡하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

"최근 소개된 유명한 이론에서는 우리 뇌가 일종의 '예측 기계'라고 주장한다. (중략) 우리 뇌는 신체로부터 오는 모든 내부 감각 신호들을 끊임없이 감시 또는 예측하고 있으며 이러한 예측이 어긋나는 순간, 감정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즉, 뇌가 내부 감각 신호들을 완벽하게 예측할 경우에는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하며, 오직 예측이 실패할 때에만 감정을 경험한다는 뜻이다."


고도로 발달한 문명일 수록 '공존'의 이점을 합리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뇌과학적으로 잘 뒷받침할 만한 책이다. 뇌과학은 그 자체가 거대한 정보량을 갖고 있는 학문갈래이고 나는 이에 대한 기초지식이 잘 갖춰진 편이 아니기에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이 뇌의 어느 부위에 해당하는 것인지 등을 상세히 이해했다고 말하긴 어렵겠으나, 읽으면서 크게 어렵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저자가 친절하게 예를 들어가며 '논리적 협동의지'가 어떻게 뇌를 통해 가능할 수 있는 것인지를 풀어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나처럼 관련 기본지식이 충분치 않다고 느끼지만 뇌과학에 흥미를 갖고 있는 분이라면 한 번쯤 권해 볼 만 하다.
 지금 다시 더듬어보니 위에 세 번째로 갖고 온 단락, '예측이 실패할 때에만 감정을 경험한다(는 이론)' 부분에 마음이 간다. 흔히들 이야기에는 어떤 목표를 향해 노력하지만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는 인물이 등장해야 한다고들 하는데, 해당 이론 역시 인간의 뇌의 이런 특성에서 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타르코프스키가 이야기한 '바람' 또한 이에 대한 직관과 통찰에서 나온 얘기일 수도(있고, 나라는 선무당이 사람 잡는 것일 수도 있다. 예측 실패!?).



<당신들의 천국> (이청준,1975)

"하기야 사람의 허울을 뒤집어쓰고 난 자 어느 부처님이라고 자신의 동상을 품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 것인가."

"사람들은 거개가 다 세상을 살아오면서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해낼 수 없는 일을 뜻밖에 자기 힘으로 감당해낸 기억을 한 두 가지씩 숨겨 가지고 있게 마련이거든."

"하지만 어느 날 밤엔가도 그랬듯이 상욱은 한번 열이 오르면 자신의 진실에 겨워 적당한 대목에 가서 그 열기를 가라앉히지 못하는 것이 탈이었다."

"선택과 변화가 전제되지 않은 필생의 천국이란 오히려 견딜 수 없는 지옥일 뿐입니다."




<유리알유희> (헤르만헤세,1943/박성환,청목,1993)

"소년은 아주 희미하게 흐르고 있는 음악 속에서 규범과 자유, 복종과 지배를 온화하게 융화시키는 정신적 경지를 느끼게 되었다."

"이곳에 그대로 앉아 있게나. 잠시 후 또 오겠네. 형상을 주의해서 그 음악을 마음 속으로 더듬어 보게. 하지만 억지로 하면 안 돼. 유희는 어디까지나 유희니까. 그러다가 잠이 들어도 좋아."

"너는 엄격히 훈련된 정신의 편에 서고 나는 자연의 생활 편에 서 있다."

"테굴라리우스를 지도자나 대표자, 조직자의 지위에 앉게 하면 안 된다. 그것은 그 자신이나 지위를 위해서나 불행이 될 것이다. 그의 결함은 침체 상태, 불면증, 신경통이 가끔 나타나며, 정신적으로는 조울증, 고독벽, 의무나 책임에 대한 불안, 추측컨대 자살 관념 등이 나타나는 것이다. (중략) 즉 테굴라리우스는 유감스럽게도 상급 직무를 맡기에는 부적당하지만 유희자촌의 바꿀 수 없는 보물이다. 위대한 음악가가 악기를 다루듯이 그는 유희의 기술을 익숙하게 다루면서 극히 미묘한 분위기를 묘사해 낼 줄 알았다."

"열심히 연구에 몰두하는 한 학자가 청년으로부터 이상한 동물이나 우화 속의 존재인 것처럼 경탄받는다는 것은, 이 수도원이 얼마나 학문적으로 나태한가를 나타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영재들의 신뢰도 필요하였다. 불쌍한 그 사내는 그것을 얻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새로운 체험 중의 최대의 수확은 싸움이 끝난 뒤 영재들과 신뢰가 담긴 우호적인 협력을 할 수 있게 된 일이었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혼자 있는 것이, 관직의 의무에 좌우되지 않는 학자의 생활이 그의 본래 희망에 보다 더 가까운 일이었을 것이다."

"자네는 잊었을지도 모르지. 내가 한 이야기가 자네에게는 별 것이 아니겠지만 나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이야. 자네에게는 기껏 불쾌한 일에 지나지 않았지만 나로서는 패배이고 몰락이었단 말일세." 

"바로 그것을 말하려던 참이야. 우리는 선의를 가지고 서로를 괴롭히고 애타게 만들었지. 그때는 서로 참을 수가 없었던 거야."

"명인 요제프는 위대한 예술가였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교육하고 치유하고 발전시키는 충동에 거역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수단은 문제가 되지 않았고, 아무리 작은 일에도 헌신적이었다."

"높은 지위도 경우에 따라서는 한 인간에게 체념과 속박을 의미한다는 것을 승인하는 셈이 되리라."

"그러나 늘 특권을 누리다 보면 어느 발전 단계 이후엔 부패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즉 당신은 지금의 임무 수행이 큰 망또처럼 당신을 휘감아버렸기 때문에 그 속에 파묻혀야 했던 것입니다."

"이 정신은 전문가의 정신, 기교가의 정신이며 또한 고도로 발달하고 극도로 풍부한 완숙함을 가진 정신이기는 하지만, 일상과 인간성으로부터 동떨어지고 교만한 고독 속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거부감이었습니다. 저는 오랫 동안 검토한 끝에 유희에 따르기로 하였습니다. 그렇게 한 것은 최고의 실현을 찾고 최대의 주인에게만 봉사하는 그 벅찬 희망이 마음 속에 있었기 때문이지요."

"저는 똑같은 근본에 가서 부딪치게 됩니다. (중략) 당신은 자각하는 감정을 너무나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혹은 자기 자신에 너무나 기대고 있습니다. 그것은 개성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앞에는 호수가 깊은 초록빛으로 잔물결 하나 없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 두 권의 책을 북엔드 한 쪽 끝에 나란히 세워두고 물끄러미 바라보고 싶다. 어느 책을 왼쪽에 둘까? 나는 지금으로서는 <유리알유희>를 택하겠다.

<유리알유희>는 분량이 만만치 않은 책이고, 각 장의 호흡도 긴 편이기 때문에 '마음먹고' 읽어야 하는 책에 속한다(나로선 그렇단 말이다). 꽤 오래 전에 한 번 읽은 후 2년 전부터 다시 조금씩 읽기 시작해 최근에야 다 읽어냈다. 그것도 지루한 부분은 스리슬쩍 건너뛰어가며. 나는 명인의 부름을 받을 만한 학생은 아니었던 것이다! (어디선가 유재석 씨가 '에이쑤가 아뉘었쑵니다!'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무한도전의 잠정적 종영 이후 지루해진 주말을 참다 못해 결국 내가 미쳐버린 것일까!?)
그럴 만한 깜냥이건 아니건 간에 다시 읽어볼 만한 책이다. 이 책을 읽는 것 자체가 아름다운 교향곡을 듣는 것과 같다. 거기에는 생의 순수한 기쁨과 경탄, 이어지는 갈등과 밤을 헤는 이야기들, 문명과 세계에 대한 두려움에 가득한 희망과 패배, 다름과 질투가 소용돌이를 이루는 우정과 열망이 흐르고 있다. 언젠가도 싸질렀던(..)것 같은 얘기지만, 조심스럽게 <데미안>보다는, 또는 그 이후에는 <유리알유희>를 권하고 싶다. 나는 자기객관화 역시 아름다운 예술의 중요한 덕목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여전히 이 작품에 대한 토론의 여지, 함의들에 담긴 비판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열어놓고 싶다. <유리알유희>의 내용을 단순무식하게 요약하면 롤플레잉게임에서 유망주 캐릭터를 키워내 존경과 선망을 받는 만렙 대가의 반열에 오르게 하는 것과 별다를 게 없을 수도 있다. 헤르만 헤세의 작품에 담긴 순수한 정신적 세계에 대한 열망에 어떤 '통일성'이라는 가치가 포함되는 것이 확실하다면, 선민의식 또는 인종차별주의로까지 이어질 수도 있는 파시즘의 혐의를 짚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도저도 아니고 그냥 <유리알유희>를 21세기 문화상품으로 재가공해 돈 좀 벌어보고 싶은 작자들에게 넘긴다면 상업적 퀴어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꽃돌이들의 '카스탈리엔스캔들'을 보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 두 권의 책을 함께 두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전설의 아이템들일 수록 조합이 중요한 법.



오늘은 얼마나 웃겼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화장을 지우고 돈을 세는 중이니 이제 커튼을 닫아야 할 것이다. 아디오스. 나는 이제 다시 현실의 봉우리들로 떠난다. 편지는 그쪽으로 부쳐주시길. 지금은 카톡알림창 대신 <반지의제왕>에 나오는 봉우리들을 머릿속에 그리며 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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