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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판타지연재소설]민족혼의 블랙홀 제9화 왜 나만 갖고 그래
게시물ID : readers_3397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HK.sy.HE
추천 : 1
조회수 : 318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9/07/24 02:2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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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혼의 블랙홀


제9화 왜 나만 갖고 그래

"첨정 나으리의 말씀이 구구절절 옳습니다."
최 도령이 말했다.
"저 역시, 잠도 못 주무시고 날이 새도록 바느질을 하시며, 이웃집 잔치에 손을 보태어, 호구지책으로 부친과 소관을 평생 부양하신 어머님을 두고 있습니다. 다행히 운칠기삼(運七技三; 운이 70%, 실력이 30%라는 시험계의 전설)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임용될 날만을 기다리고 있으나, 여기 모인 이들 중 태반은 아직 급제하지 못하였나이다."

뒤에 있던 선비들이 침음(沈吟)을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저의 젊은 혈기(血氣)가, 백성의 도망을 부추겼음을 뉘우치나이다. 과거시험장에서는 백성을 살리기 위한 방도를 일필휘지(一筆揮之; 단숨에 막힘없이 쓰는 만점짜리 명문장)로 줄줄이 써 내려갔으면서도, 제 눈앞에 있는 실제 백성을 헤아릴 줄은 몰랐습니다.”

앞서 아버지의 말씀이 이어지는 동안, 갈퀴 꺽다리, 수염 난 낫 아저씨, 도끼 떡대, 죽창 할아버지는 계속해서 들것을 들고 다리를 후들거리며 서 있었다. 성남이가 제압하는 과정에서 낸 상처 일부에서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결국 우리 서원에서 그대들을 도적으로 내몰았네그려. 정말 미안허이. 많이 다친 것 같은데, 들어가서 상처라도 치료하세나.”

아버지의 말 몇 마디에 서원 관리자의 태도가 겨울에서 여름으로 바뀌자, 갈퀴, 낫, 도끼, 죽창은 크게 당황하였다.

“아, 아닙니다...”
“저희가 어찌 감히...”
“살려주신 것만 해도 감사......”

그 와중에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부두목이자, 들것을 만드느라 도끼를 들었던 떡대가 용기를 쥐어 짜내어 외쳤다.
“어르신을 공경해야 하는 것이 도리이니까 면전에서 말씀은 그렇게 하시지만, 첨정 어르신이 가고 나면, 저희에게 응당한 처벌을 가할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만 뜻대로 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기 계신 첨정 어르신께서, 저희를 머슴으로 삼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 한쪽 구석에서 풀이 죽어 있던 마부(馬夫)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도적떼들을 머슴으로 삼으신다고요? 첨정 어르신, 부디 아니라고 말씀해주십시오!”

성남이의 반듯한 이목구비에 균열이 생겼다.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가까이 있는 자가 아니라면 거의 듣지 못할 음성으로, 냉기가 물씬 도는 화살을 날렸다.
“가장 먼저 도망간 네가 할 말은 아니지.”

마부가 폭발했다.
옆에 누가 있든 없든, 더 이상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면 아버지께서 도적에게 자비를 베푼 것에 더하여, 도망간 자신도 서원 관리자의 면전에서 감싸 주었으니, 더 이상 처벌 받을 일이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네! 그렇습니다. 제가 가장 먼저 도망갔습니다. 저는 사복시(司僕寺; 조선왕실에서 말과 수레를 담당하던 부서)에서 일하고 있던 도중에, 사도시(쌀을 관장하는 기관) 첨정 나으리를 모셔 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예, 저도 첨정 나으리께서 인복이 두터우시어, 위로 제조(정1품~종2품 당상관)에서부터 아래로 말단 노비들밖에 안 되는 차비노(差備奴; 말과 수레로 구성된 행차를 준비하는 노비), 근수노(跟隨奴; 어가에 따르는 노비)에 이르기까지 인망이 두터우신 것은 잘 압니다. 하지만 아무리 첨정 나으리께서 이전에 사복시 주부였다고 하셔도, 지금은 엄연히 부서가 다를진대, 설사 병환(病患)이 위중하시다 하더라도, 사복시에서 주상전하가 쓰실 말과 수레를 사사로이 빼어 첨정 나으리를 모시고 오는 것은 부당하다고 사료(思料; 깊이 생각)되었습니다. 그러하나 하찮은 일개 마부의 몸으로 어찌 고관대작(高官大爵) 영감(令監; 종2품, 여기에서는 총 책임자 사복시제조를 가리킴)께 말대꾸를 하겠나이까. 한양에서 영주까지 오는 길에, 역(驛; 역참)에 말은 없고 길에는 도적이 들끓어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무사히 말과 수레를 이끌고 영주까지 도착한 것에는 물론 하늘의 도우심이 있었겠지만, 어찌하여 소관 부서의 일도 아닌 명령에 계속해서 제 목숨을 걸어야 하옵니까? 저도 안해(아내를 가리키는 옛 말)와 자식들이 있습니다. 제 책임소관은 말을 관리하는 것이지, 말을 탈취하러 오는 강도떼로부터 다른 부서에 속한 사도시 첨정 나으리를 구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게다가 누구 하나라도 빨리 가서 도움을 청해야 우리 모두가 강도떼로부터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마지막 말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뻔 했다. 성남이의 기세가 흉흉해졌다. 무(武)의 극의(極意)를 깨달은 자에게서 나오는 분위기만으로, 상대방을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빨리 가서 도움을 청한다, 라. 그렇지만 너는 포졸을 동원할 수 있는 마을 수령에게 읍소하지도 아니하였고, 첨정 어르신과 그 가족이 죽든말든 방치하였다. 더구나 한참 시간을 끌다 해가 진 다음에 서원에 들어가 ‘경위서’를 써 달라고 했지. 강도가 든 현장에 동행을 요청하면서, 한양에 경위서를 제출하러 가자고까지 말했다고 들었다.”
성남이가 조목조목 짚었다. 동시에 살기(殺氣)를 한층 더 크게 분출시켰다.
“바른대로 고하지 않으면, 사복시든 뭐든 그냥 죽여서 길에 버리고 갈 거다. 네 말대로 길이 험하니, 오는 길에 죽었다고 보고하면 되겠지.”
성남이가 정말로, 말단이긴 하지만 나랏일을 수행하던 관노(官奴)를 죽이고 입막음을 할 성정(性情; 타고난 본성)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성남이의 인품을 겪어본 적이 없던 마부는 협박에 넘어갔다.
“그...그건! 한참 뛰다 보니, 이미 첨정 어르신이 돌아가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뭡니까? 아까 전 까지만 해도, 유언을 남기고 계셨지 않습니까? 오는 길에 첨정 어르신이 돌아가셨다고 보고하면, 이 일이 모두 제 책임이 될 것이고, 수령에게 강도가 들었다고 보고하면, 당신(當身; 3인칭 극존칭) 관할에서 귀찮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묵비(默祕; 숨겨 말하지 않음)하고자 저를 해칠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더구나 제가 모시던 첨정 어르신이 강도한테 당했는데 저 혼자 멀쩡한 것도 남들이 이상하게 볼 것 같고, 그래서......”

“채찍으로 스스로 몸에 상처를 내느라 지체하였고, 책임소재를 피하고 유리한 점만 보고하기 위해 서원에 가서 도움을 청했다고?”
성남이가 깔끔하게 정리했다.

“네, 바로 그것......이 아닙니다!”
마부가 항변하려 들었다.
“첨정 어르신을 모시러 영주로 갈 적에, 이곳을 지나다 최 생원(과거 제1차 시험인 소과 종장 합격자)께서 명경과(明經科) 별시(別試) 병과(丙科)에 11등으로 급제하셨음에도, 아직도 임용을 기다리면서 서원을 지키고 계시다는 말씀을 우연히 전해 들었습니다. 과거에 급제하신 분이니 한양으로 곧 올라가실 것이고, 또 이렇게 대단하신 분을 미천한 소인이 모시고 올라가 경위서를 제출하면, 설혹 사도시 첨정 어른을 제대로 모시지 못한 죄가 있어도, 다소 면책되어 가벼이 여김을 받을까 하여 그리하였습니다.”

마부가 그 뛰어난 처세술을, 시 낭송하듯 술술 읊었다.

“듣자하니, 스스로의 목숨만 살겠다고 첨정 나으리를 버리고 도망한데다, 소관(小官)까지 엮어서 책임을 면피(免避)하고자 잔머리를 쓰는 천하의 소인배입니다. 마땅히 엄벌하여 관리의 기강을 바로 세우셔야 하옵니다.”
최 도령이, 아니, 최 생원이 말했다. 눈빛이 형형했다.

“왜 저만 벌하십니까?”
마부가 억울한 듯 소리쳤다.
“천벌을 받을, 저 강도 놈들이 먼저 잘못하지 않았습니까? 첨정 어르신을 먼저 공격한 저들에게는 자비를 베풀어 두둔해 주시고, 머슴으로 삼아주시면서, 부서도 다르고 타당하지 아니한 공무인데도,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고자 죽음을 무릅쓰고 영주까지 개고생을 하여 첨정 어르신을 모시고 돌아온 저에게는 이리 대하셔도 되는 것입니까?”

-제10화에서 계속-
출처 https://blog.naver.com/dankebitte/22159374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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