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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판타지소설]민족혼의 블랙홀 제10화 학이시습지
게시물ID : readers_3398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HK.sy.HE
추천 : 1
조회수 : 27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9/07/25 00:3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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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혼의 블랙홀

 

 

 

10화 학이(學而)시습(時習)

 

 

 

"왜 저에게만 그러십니까? 나쁜 건 저 도적놈들이 아닙니까."

 

마부가 말했다.

 

"그래. 네 말을 잘 알겠다."

 

아버지께서는 한층 초췌해진 기색이었다.

 

"네 말대로 나는 더 이상 사복시 주부(말과 수레 담당 부서의 종6품 관직)도 아니고, 따라서 네게 뭐라 할 입장이 되지 않는다.

그나마 너 스스로 옳지 못한 명령이라 생각했는데도 영주까지 말과 수레를 이끌고 와 주어, 고맙게 생각한다. 수행을 원치 아니하면 이만 가도 되느니라. 어차피 얼마 남지 않은 길이니."

 

그러자 오히려 마부가 도리질을 쳤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한양입니다요.

게다가 돌아가셨으면 모르되, 살아계신 사도시 첨정 어른을 모시고 가지 못한다면, 경을 칠 것이 뻔하지 않습니까. 비록 대대로 근본을 알지 못하는 공노비 집안이기는 하였으나, 소인 이래봬도 품계가 있는 동반(東班; 양반을 동반과 서반으로 나누는데, 왕을 기준으로 문관이 동쪽에 도열하고 무관이 서쪽에 도열하는 것에서 유래한다. 전문분야에서 일하는 공노비는 양반이 아니지만 업무에 따라 동, 서반 직급을 받기도 하였다.)의 잡직(雜職)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반 백 년 전에 상감마마께서 노비를 속량하여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미천한 소인의 조부께서는 계속 마구간에 남아 계셨습니다. 그 충성된 은덕으로, 제가 현재 종9품 미관말직이나마 수행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3대에 걸쳐 한평생 말과 함께 살아온 종9품 마부는, 질투 어린 시선으로 전직 종6품 사복시 주부와, 앞으로 청요직(조선시대 문관 고위직)을 전전하며 승진을 거듭할 예정인 명경과 병과 급제자를 쏘아보았다.

 

"이제 사도시 첨정 어르신을 버리고 내빼는 바람에 소원해졌다 하여, 여기에서 혼자 한양으로 올라간다면 그 뒷감당을 능히 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제 안해(wife)는 상의원(尙衣院) 침선비(針線婢)로서, 궐 내 높으신 어른들의 옷을 만들고 있습니다. 불똥이 처자식에게까지 튀게 둘 수는 없습니다. 비록 상황이 이렇게 되었을지라도, 저를 다시 받아주신다면 한양까지 모시고 가겠습니다. 이후 처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관직에 매여 있는 공노비가 말하였다. 스스로의 몸을 채찍으로 내리친 상처에서 피가 흘렀다.

 

"원한다면 그리 하게."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횃불이 거의 끝까지 타들어갔다.

 

일부 횃불은 다 타서 없어졌다.

 

사위가 서서히 암흑으로 치닫고 있었다.

 

"여기에서 너무 지체하였습니다. 들어가 일신을 쉬게 하소서."

 

나를 한 번 돌아본 최 생원이 말하였다.

 

"영애와 영부인 (지체 높은 양반의 아내)께서는 인근 사대부의 사가에서 묵으시면 되겠습니다."

 

어두운 밤에도, 그의 눈빛은 형형하게 빛났다.

 

☆ ☆ ☆ ☆ ☆

 

일행 거의 모두가 다치고 지쳐서, 서원이 있는 마을에서 며칠 쉬었다.

 

전직 도적이었던 갈퀴 꺽다리, 수염난 낫 아저씨, 도끼 떡대, 죽창 할아범 등과 동행했던 처자(妻子)에 대한 처분이 문제되었다.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이들이 군역을 피해 도주하고, 강도질을 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서원지기가 관가에 고()하여 법대로 처벌하자니, 이들이 실제로 해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고, 또 이들을 데리고 가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아버지의 보증이 있어, 그것은 그것대로 꺼려졌다.

 

결론적으로, 약간의 융통성(?)을 발휘하여, 양민이었던 이들의 신분을, 민씨 집안의 노비(奴婢; 남자는 여자는 ’)로 격하(格下)하는 문서를 작성하였다. 노비는 공납 납부의 주체가 아닐 뿐더러, 그가 행한 일에 대한 모든 책임은 주인에게 귀속되기 때문이다. 이로써 관아에 납부하여야 할 공납 의무 및 서원에서 제사를 도와야 할 신역 의무는 소멸되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마음이 편치 않으신 기색이었다.

 

돕는다는 것이 오히려 그대들을 노비로 만들어버렸군.”

아버지께서 사과하셨다.

 

아닙니다! 쇤네들로서는, 거두어 주신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할 따름입니다. 공납이 밀린 상태에서, 서원에서 제사를 계속 도왔다가는 모두 나가 떨어졌을 것입니다. 도적질을 계속할 짬조차 되지 않고 말입니다.”

부두목이었던 떡대가 말했다.

 

기왕 노비 문서를 작성하는 것이라면, 차라리 그대들이 나고 자란 마을의 서원에 속한다는 형식이 훨씬 낫지 않겠나?”

아버지께서 물으셨다.

 

떡대가 크게 놀라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닙니다. 저희도 사람인데, 모시는 주인을 고르고 싶지 않겠습니까? 대감께서는 도끼를 들고 생명을 위협한 우리들을 받아 주셨습니다. 그 은혜 하해와 같아, 죽는 날까지 일해도 갚을 수가 없습니다. 서원에서 계속 일했다면, 진이 다 빠져 진작 죽었을 것입니다. 제사가 워낙 많아서......”

 

우리 가문에서도 제사를 많이 지내는데, 이를 어이할꼬.”

아버지께서 걱정하셨다.

 

어릴 때부터 서원 일을 많이 도와 웬만한 제사 준비는 모두 거들 줄 압니다. 시키는 것은 무엇이든 열심히 하겠습니다!”

방금까지 제사가 많아서 힘들다던 떡대의 태도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바뀌었다.

 

허허허, 말만 들어도 고마우이. 이 문서는 그저 처벌을 면하기 위한 형식일 뿐이니, 한양에 가서 자리 잡을 수 있는 다른 일이 생기거든, 언제든 떠나도 좋네.”

아버지가 관대한 미소를 지으셨다. 아버지는 아셨을까. 이들이 그렇게 잘 떠나기만 했다면,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을......

 

☆ ☆ ☆ ☆ ☆

 

결국 찬겸(贊謙) 최 생원도 친구 몇 명과 더불어 하인을 이끌고 우리를 따라나섰다. 명분은 병약한 사도시 첨정 어르신을 한양까지 안전하게 모셔다 드린다는 것이었다.

 

과거 합격한지 이태(2)가 지났는데도, 아직도 임용을 기다리고 있다고?”

아버지께서 놀라셨다.

나랑 같이 가세. 내 비록 종4품 미관말직에 불과하나, 힘닿는 대로 소청(所請)을 올려보겠네. 그 어려운 명경과에 급제한 자가 이리 시골에서 썩고 있어서야 쓰겠나.”

 

그리하여 행렬 선두에 성남이가 검을 찬 허리에 손을 얹은 채로 경계를 살피며 걷고, 중간에는 아버지께서 나귀를 타고 가셨으며, 그 뒤에는 어머니께서 새로 생긴 (전직 도적출신) 노비가 메고 가는 가마에 타셨다. 끝에는 내가 어멈과 함께 소를 타고 갔다. , 나귀, 노새, 가마는 모두 서원에 부속된 재산이었다.

 

이 소는 송아지 때부터 쇤네가 몰고 다니며 풀을 뜯어 먹여 기른 것입죠.”

소를 끌던 소년이 내게 말했다.

서원에 와서 제사도 돕지 않고, 제사음식도 바치지 않는다면서 우리집에 와서 소를 가져갔어요. 그 뒤로 우리 식구들은 먹고 살 길이 막막하여 산으로 갔지요.”

 

아들아, 그런 말을 아씨께 해서 무엇하느냐! 잠자코 소나 몰아라.”

가마를 메고 걷던 갈퀴 꺽다리 아저씨가 말했다.

 

과거에 합격한 최 생원 도련님을 가마에 매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축하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수염 난 낫 아저씨가 말했다.

 

내 평생 살면서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과거 합격자가 드디어 우리 마을에 났으니, 마침내 우리 고을도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부질없는 희망을 품었다오.”

죽창 할아범이 말했다.

 

아버지, 말씀을 삼가십시오. 옆에 최 생원 어른이 계십니다.”

떡대가 말했다. 가마를 메느라 도끼를 풀어서 노새에 실은 상태였다. 서원에서 가는 데 필요한 식량을 꾸려 주는 바람에 짐이 늘어났다.

 

듣고 보니, 나 하나가 과거에 급제하기 위해, 서원을 꾸려 나가기 위해, 그대들이 얼마나 피를 흘려야 했는지 새삼 느껴지네. 내가 잘못하였네. 내 부덕(不德)이 이리 심할 줄 미처 몰랐네.”

최 생원이 소를 탄 내 옆에서 걸으며, 그들에게 사과하였다.

 

“......”

가마를 멘 전직 도적들은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어색해지자, 내가 말을 꺼내었다. ‘소학천자문’, ‘동몽선습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으니 최 생원과 말이 통했다.

 

호오, 연차가 아직 어린데, 여인의 몸으로 동몽선습(童蒙先習; 천자문 다음 단계 아동용 교과서)을 득() 하셨다고요?”

최 생원이 물었다.

 

엄친(嚴親; 남에게 일컫는 내 아버지)께서 지극정성으로 가르쳐주셨습니다.”

내가 대답했다.

동몽선습은 평양감사(平壤監司)로 계셨던 조상이신 민희중(閔希仲; 민제인의 자) 어른께서 저술하신 바라, 집안에서 애착이 큽니다.”

 

사람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도리란 무엇입니까?”

최 생원이 대뜸 물었다.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그리고 붕우유신(朋友有信)이 바로 그것입니다.”

 

동몽선습 계몽편(啓蒙篇)’에 있는 구절을 읊었다.

 

최 생원의 눈에 놀라움의 빛이 스쳐갔다.

 

뜻도 알고 계십니까?”

 

내가 낭랑하게 외웠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마땅히 친하여 공경하는 도리가 있어야 할 것이고(부자유친), 주상 전하와 신하 사이는 의로워야 할 것이며(군신유의), 연장자와 나이 어린 자 사이에는 서열과 질서가 존재해야 할 것이며(부부유별), 동무 사이에는 믿음이 존재해야 한다(붕우유신)는 뜻입니다.”

최 생원이 감탄했다.

 

여인으로 태어나신 것이 한()입니다. 첨정 나으리(3품 아래 당하관을 높이는 말)의 교육이 과연 지엄함을 알 수 있습니다. 사내였다면 능히 장원급제하여 어사화를 달고 가문의 영광을 빛내었을 것입니다. 말씨 또한 예법에 한 점 흐트러짐도 없습니다.”

 

당치 아니합니다.”

부끄러워하며 대답했다.

먼 곳에서 벗이 오니 그 또한 기쁘지 아니하겠습니까. 배우고 때때로 익힌 것을 알아주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벌써 논어(論語)까지!”

 

이러니저러니 대화를 주고받다 보니, 어느 덧 한양에 도달하였다.

 

-11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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