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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통의 편지 (비평환영)
게시물ID : readers_3424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CreamOrange
추천 : 2
조회수 : 287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9/10/14 02:3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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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t. xxth, 2019

Dear VV,

아침에 눈을 떴는데 문득 내가 몇살이더라, 이렇게 두어번만 눈 감았다 뜨면 호호 할머니가 되어 생의 마지막 깜빡임과 함께 깊게 잠들 것 만 같았어. 비가역적 연속성에 단위를 정하고 숫자를 매기고 어떻게든 쪼개어 내는게, 참, 억지로 붙잡으려는 것 같고 부질없지. 번뜩이듯 존재의 허무와 맞닥뜨릴 때 마다 네가 사무치게 그리워 if 놀이나 했던 나는, 이제 더는 만약을 말하지 않는 버석버석한 어른이 되었다. 
이랑이라는 가수를 알게 되고, <신의 놀이> 라는 앨범을 빌려 읽을 기회가 있었다. 나는 단숨에 그녀의 이야기들을 읽었고 가사를 잘근잘근 씹으며 눈물을 참았다. 세상에 너같은 사람이 또 있다는 것이 너무나 서글퍼, 그래서 나는 울고싶었는지도 몰라. 몇년이 지난 지금도 그녀의 노래를 나직하게 읊으며 너를 떠올린다. 매 해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알았던 사람과 헤어지고 앞으로도 그럴 거지만 나는 또 문득 가장 오래된 네가 그리웠다. 네가 오늘 다시 보고싶어진건 아마도 우리의 마지막이 예견된 일이 아니어서겠지. 너는 지금의 나를 보면 뭐라고 말할까, 우리는 다시 그 때 같을 수 있을까, 나는 이제사 너와 얘기를 나눌 준비가,              아. 



온 우주였던 네가 이제는 기억의 파편 여기저기 널부러져 조금씩 잊혀져서 옅게나마 웃었다. 내 눈물의 절반은 너에게 배웠다. 나는 드디어 너보다 나이가 많아졌다. 가녀린 두 어깨로 너무 빨리 알아버렸구나 이제는 조금 알거같은데, 또 의미 없는 만약에를 말하려다 만다.

Sincerely, RR 




VV에게.

너는 사월이자 장미이자 부서지는 것이요 내 영혼의 근원이었다. 사회에서 너를 정의하는 수많은 이름들과 숫자들은 하나도 몰랐으나 나는 너를 잘 알았다. 너는 지독히 긴 텍스트이자 연약한 관념이었고 종종 너의 부서짐에 나는 울었다. 으레 그렇듯 처음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우리는 같은 공간을 떠돌던 문자들이었다. 의미들의 교환과 영향 사이에서 아마도 우리는 그렇게 어리던 서로를 핥았던 것이다. 그래. 이제사 하는 말이지만 우리는 지겹게도 어렸다. 아픔을 읊던 건조한 너의 언어에 산산히 조각나던 내가 선명하다. 너는 내 우주의 밑바닥에 너의 허무를 심었으나 너의 의미를 이해하기에 나는 너무 어렸다. 싹 튼 허무는 버거웠고 나의 세계는 천둥벌거숭이 마냥 그것을 좇았다. 그 시절부터 나의 너는 네가 아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몇년의 시간동안 나는 너의 이미지를 모방했고, 너는 나의 전체에 녹아들었다. 수 개의 관계들이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지던 그 날 너는 예고없이 나를 떠났다. 철저히 무너졌던 나는 목놓아 기다렸고 그렇게 너는 고도가 되었다. 시간이 갈수록 변질되는 너를 마주하며 괴로웠다. 처음으로 소중한 사람에게 소중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무너졌다. 그래도 차마 너를 미워할 순 없었다. 부재와 동시에 너의 허무는 나를 잠식했다. 애타는 기다림이 빛 바래 하나의 구가 될 때 까지 질척이던 공허와 엉키며 흔적을 되새겼다. 뒤틀린 파편을 붙잡는 줄 알면서도 아파했다. 길어지는 결핍에 나는 너를 이루던 것들에 집착했다. 닥치는 대로 그것들을 끌어모아도 결국 네가 아님에 수없이 너를 놓았다. 너를 안 만큼의 시간동안 반복했다. 몰아치던 고통은 조금씩 잦아들고 그러다 너를 잊었다. 잊지 못 하고 몸부림치던 나는 너무나 허무하게 너를 잊었다. 정체의 끝에 우주의 중심에 내가 들어서고 나의 의미를 세웠다. 나는 네가 아닌 누군가들과 서로를 주고받으며 만들어지고있었다. 그러다 문득 마주한 너의 흔적은 곱게도 내 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껍데기뿐이던 너는 사라지고 너의 의미만이 남아있었다. 너로부터 벗어나자 너와 마주했다. 그러자 나는 또 너를 사랑할 수 있을 것 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를 다시 구성해 달라 말하기에는 이미 너무 자라버렸지만 너를 마주하고 싶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고 나는 네가 떠나던 그 나이가 되었다고. 그렇게 한동안 들떠서 주저하다가 문득 깨달았고 이렇게 너를 보내려한다. 이제 너는 나에게 네가 아닌 나로써 존재하기를 바랄 뿐이다.

15.02.xx. R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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