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직접 쓴 초단편] 연인들을 옮긴 소묘(素描)
게시물ID : readers_3436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15번지
추천 : 2
조회수 : 33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9/11/26 20:50:44
옵션
  • 창작글
  • 본인삭제금지
  • 외부펌금지

연인들을 옮긴 소묘(素描)

 

1.

 

그의 이름은 창희나 철수쯤으로 하고, 그녀의 이름은 리나나 영희쯤으로 하자. , 현대소설에서 등장인물의 이름쯤이야 어떻게 되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어차피 사건이 나열되고, 그 사이사이에 하고자 하는 말만 잘 다듬어서 뿌려 넣으면 그만이지.

 

2.

 

지난 11월의 마지막 주 금요일이었다. 창희처럼 보이는 철수는 대구시립교향악단의 정기연주회를 감상하기 위해 걸음을 서두르고 있었다. 아이돌 콘서트라면 목을 걸고 사수하는 여자 친구를 위해 3개월 전에 미리 예약해둔 티켓이었다. 티켓을 예매할 때만 해도 여자친구에게 새로운 음악세계를 선보여주겠다는 나름의 열의가 있었지만, 일상에 떠밀려 살다보니 아침에 핸드폰 알람이 챙겨주기 전까지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늦었다. 리나는 영희보다 모던한 만큼 영희처럼 상대를 배려해주지 않는다. 누군가를 기다리며 시간을 죽일 만큼 타인에게 관대하지 않다. 어디까지나 자기중심적이다. 철수는 창희보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보려 하고, 뛰어도 보려한다. 뒤뚱뒤뚱. 노력은 가상하지만, 철수는 철수다. 티켓을 수령할 만큼 넉넉한 시간에 도착하긴 했지만, 그게 리나와의 약속 시간은 아니었다.

창희보다 매력 없는 철수를 기다리기 위해 영희보다 스마트한 리나가 흘려보낸 건 핸드폰 배터리 잔량 30%였지만, 리나를 달래기 위해 졸아버린 철수의 애간장은 철수 생명의 잔량 3할은 될 터였다.

 

한 바탕의 소란과 언급하기조차 애매한 신경전을 뒤로 하고 오케스트라 연주가 시작되었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제7, ‘레닌그라드’ 1악장. 현악기부터 차례대로 등장하며 음을 정렬하는 모습이 철수의 눈에 들어왔다. 그저 악보와 지휘자의 손끝을 따라 저마다의 악기를 연주하고 있을 뿐인데, 일제히 현을 세우는 모습이 아이돌들의 칼군무보다도 매력적이다.

, 네게 이런 걸 보여주고 싶었어. 어때, 고막이 시원해지는 것 같지 않아?

철수는 선율이 그의 가슴팍을 더 조여오기 전에, 급히 눈을 돌려 리나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썹은 미묘하게 어긋나 있었고, 손은 설 자리를 잡지 못해 애꿎은 핸드폰을 괴롭히고 있었다. 역시 이런 연주회는 영희가 더 어울리지 모른다. 리나도 철수의 시선을 정면으로 느끼면서 애써 외면한 것은 그 시선이 창희처럼 부드럽지도, 은은하지도 않아서다.

 

그래서 4악장까지 쉬지 않고 이어지는 90여분의 연주 동안 철수는 철수인 채로, 리나는 리나인 채로 굳어 있을 수 있었다.

 

철수는 현악기들이 내달리는 동안 오보에 연주자가 오보에를 정성스레 닦는 것을 보고 있었다. 리나도 뒤편의 타악기 연주자가 손에 깍지를 끼고 조심스레 작은 기지개를 펴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철수는 그런 오보에 연주자를 보며 감탄을 했다. 짧은 시간 동안 악기를 매만지고, 그 와중에도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정확히 자신의 연주 타이밍에 나타나 완벽하게 연주해 내는 모습이 너무 멋져보였던 것이다. 반면, 리나는 심벌즈가 와장창 깨지는 소리를 내도 졸음이 쏟아지는 걸 물리칠 수가 없었다. 어차피 연주자조차 뒤편에서 몰래 기지개를 펼 정도로 지루한 합주가 아닌가? 정말, 철수는 조금도 섬세하지가 못하다. 전혀 취향이 아닌 연주회를 함께 오자고 하다니.

 

대구시향을 이끄는 열정의 마에스트로, 줄리안 코바체프가 지휘봉을 내려놓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때를 맞춰서 리나는 크게 기지개를 켰고, 철수는 벌떡 일어나 박수를 치려다 말고 리나를 돌아봤다. 한 동안 관객들의 박수는 이어졌고, 둘의 시선은 또 한 차례 애매하게 상대를 찔러봤다.

 

3.

 

그 시각, 철수를 닮은 창희와 리나와는 달리 소심한 영희가 동성로에 위치한 펍(Pub)에서 만나고 있었다.

창희는 영희의 의중을 파악하고자 조심스레 영희의 손끝부터 미간까지 짚어가고 있었고, 영희는 딱히 나서서 리드해주지 않는 창희가 불안해 테이블 밑으로 숨긴 손에서 땀을 훔치고 있었다

출처 경험에서 잉태된 뇌수의 찌꺼기쯤?
꼬릿말 보기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