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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하거나 뻔한 이야기(14) / 머리는 동쪽으로 가슴은 서쪽으로
게시물ID : readers_3446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철수와영이
추천 : 1
조회수 : 24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0/01/06 00: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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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여자는 들떠 있었다. 그녀는 분명 새롭게 삶의 향기를 느끼고 있었다. 비로소 마음에 평온을 찾은 듯이 보여 남자는 여간 마음이 놓이는 게 아니었다. 언제부터인가 남자는 여자가 마주앉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빙그레 웃음을 짓는 사람이 되었다. 정말이지 누군가를 깊이 안다는 게 이렇게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을 줄은 참으로 몰랐다. 남자는 여자에게 그 누군가가 당신이라는 사실이 참으로 행복하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의 일상을 늘 마주앉아 바라보는 이가 있음으로 느낄 수 있는 이 행복감. 마침내 남자는 자기의 몸이 가볍게 허공으로 떠오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아직도 지난 밤, 쳐 지나듯한 짧은 입맞춤이 길게 여운을 남기고 있는 것 같았다. 참으로 이성이란 냉철해서 가볍게 움직이려 들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감성은 흐뭇한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보게 하고 생각하게 하고 느끼게 했다. 여자는 어느덧 남자에게 그런 존재이기에 그녀를 볼 때마다 늘 가벼운 떨림이 전신으로 퍼짐을 느꼈.
 
사무실에서 맞은편에 앉아 있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때로 깊이 껴안고 긴 입맞춤을 해주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참으로 아이 같은 마음인데도 이를 어찌할 수가 없었다. 여자로 인해 비로소 남자는 아이가 되었다. 응석받이 아이. 봄볕이 참으로 따사로웠다.
그리고 남자는 그런 여자가 사랑스러웠다. 남자는 여자의 메일을 받기 무섭게 메일로 답장을 주었다. 어쩌면 여자가 이성과 감성의 충돌로 갈등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세상을 마음가는대로만 살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행운이 어디 있을까. 우리는 어쩌면 그 행운을 잡으러 하루하루를 넘기는 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그녀도 그걸 알겠지. 남자는 여자를 토닥이고 있었다.
 
-늘 세상일이라는 게 머리는 동쪽으로 가자하고 가슴은 서쪽으로 가자하지. 우리는 늘 그 중 어느 한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어. 혹시나 저 길을 가야하지 않을까 하는 여물지 못한 마음으로... 가는 길목마다 기회를 상실한 다른 길을 기웃거리는 게 우리가 아닐까 해.
분명한 건, 우린 철부지 아이들이 아니야. 이제는 홀로 서는 세상에 불안해야 할 연륜은 더욱 아니야. 홀로는 더더욱 아니야. 이성의 터 위에 뜨거운 가슴을 올려놓아봐. 함께 바라보는 세상이 아름답다면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아름다운 탓이지 않을까 해. 함께 바라보는 세상이 향기롭다면 서로를 호흡하는 그 마음이 향기로운 탓이지. 그때 비로소 집착은 짐이 아니라 아낌이고 배품이고 도움이고 동행일거야. 그렇다면 분명 집착은 함께 하는 것이겠지. 당신과 내가 <一心>이고 <同體>라면 말이지. 어제 전화는 운동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잠깐 만나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거야. 일심이고 동체라는 말을.
 
이런 남자의 메일에 대해 여자는 둘의 만남이 우연함이 아니라 운명일지 모른다고 했다.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좋을 거야. 그때부터 둘은 그들의 만남이 결코 우연적인 일이 아니라 운명이라고 단정 지었고 그러한 단정에 대해 매우 흡족해했다.
조금씩 봄이 깊어지고 있었다. 모처럼 사무실 사람들이 단합을 과시하는 모임을 갖기로 했다. 직원들은 초저녁부터 끈끈하게 결속을 다지며 알코올을 탐닉해 갔다. 바깥의 어둠이 짙어지고 술이 거듭될수록 조금씩 대화의 폭이 한정되다가 마침내 개미 쳇바퀴 돌 듯 제자리를 맴돌았다. 그 즈음에 여자가 남자에게 눈짓을 했다. 과음을 염려한 것이리라. 여자와 남자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취기가 가득한 사람들인지라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여자와 남자는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가 자동차에 올랐다. 여자는 술을 하지 않으므로 운전은 여자의 차지였다. 여자는 차창을 조금 내리고는 천천히 차를 몰았다.
 
봄바람이 기분 좋게 차안으로 몰려들었다. 여자는 한창 개발 중인 신도시 쪽으로 차를 몰아갔다. 신도시는 갯벌을 매운 허허벌판 위에 조금씩 건설되고 있었다. 그 벌판에 하나 둘 높이를 가늠하기 힘들 건물들이 들어서고 토지개발업자들은 그것을 천지개벽이라고 했다. 갯벌이 매워지기 시작할 때부터 사람들은 광분했다. 처음에는 갯벌에서 생계를 잇던 사람들이 광분했다. 조개며 바지락을 캐던 갯벌은 이제 더 이상 없다. 그들은 삶의 터전을 잃어버렸다. 엄청난 보상이 그들의 불만을 달랬고, 마침내 갯벌이 조금씩 너른 땅덩이로 변해갔다. 그러나 보상의 대가는 컸다. 생전 처음 보는 큰돈에 그들은 더러 이성을 잃기도 했다. 아비와 아들이 갈라서고 형제가 갈라서는 일들이 일상으로 벌어졌다. 인륜이 무너지고 서로의 가슴엔 울화만 가득 남았다. 험한 꼴을 당한 사람들은 그 기막힌 현실에 저주를 퍼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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