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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간단한 이야기
게시물ID : readers_3455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폴딩
추천 : 2
조회수 : 315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20/02/08 08:16:44
1
인생이 공격적이라는 걸 깨달은 건 어느 겨울이었다.
새삼스러울 건 없었다.
시간을 허비하기 시작한 지는 제법 오래 되었으니까.
이건 말하자면 여태 보내온 시간들에 대한 회고록이다. 아니면 참회록.


2
처음에는 며칠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만 해도 시간이 남아서 시간을 보냈다.
당시의 시간이란 어떻게 해도 결국 남는 것 같은 거여서, 무한한 시간을 아낌없이 썼다.


3
도라에몽 생각을 가장 많이 했다.
만화에서 나오는 신박한 발명품 중에는 시간을 조절할 수 있는 것도 있었는데, 지루한 시간은 저장해두고 나중에 쓸 수가 있다.
정작 시간을 허비하긴 했지만 필요할 때는 없어서 그 발명품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4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시간이 지나갔다.
남들이 으레 말하는 10km의 속도로, 그러다 고비를 넘고 20km의 속도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빠른 속도였지만 관계는 없었다.
지나가면 또 올 테니까.


5
시간을 허비하는 동안 많은 생각들이 있었지만 결국에는 모두 사라졌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데, 하는 짧은 후회마저도 결국에는 없어졌다.
꽤 많던 것들이 비워지고 나서 남은 건,

도라에몽의 발명품 하나였다.


6
인생의 전환점은 쉽게 오지 않는다.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큼은 잘 알았다.
나는 애초에 다른 무언가에 감화되기 어려운 성격이었다.

잘 믿지 못하고,
잘 따르지 못하고,
잘 설득되지 않았다.

그게 특별하다고 생각했던 시절도 있었지만 모두 지나가버렸다.


7
적기를 놓쳤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그때 그걸 했어야 했는데.
그때라도 그걸 했어야 했는데.

뒤늦게야 시간과 관련된 생각들은 모두 후회라는 걸 알았지만, 돌이킬 수는 없었다.
도라에몽의 발명품은 만화 속에서만 있었으니까.
그러는 사이 계기판이 서서히 올라가고 있었다.
머지 않아 30km의 속도로 달리게 될 것이다.


8
다행이도 해본 것은 많았다.
물론 해보지 못한 것이 훨씬 많아서, 따지자면 불행한 것도 있겠지만 굳이 생각하지는 않기로 했다.
무언가에 감화되기 어려운 만큼 고집은 있으니까.

야속하게도 추억을 떠올리는 동안에도 시간이 지나갔다.
자기 전 침대에서 생각하는 추억은 잠겨있기에는 딱 좋은 온도였다.

물론 오래 잠수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나오는 순간 몸이 젖어버린 걸 느낄 테니까.
그리고 이번 해의 겨울은 두꺼운 옷 없이 나기에는 너무 추웠다.


9
나는 참회를 시작하면서 어떤 이야기를 듣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동의도 있을 테고, 위로도 있을 테고, 어쩌면 아무 말이 없을 수도 있고, 또 어쩌면 참회록을 지워버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래도 괜찮은 걸 나는 알고 있다.
시간이 지나가면 또 다른 시간이 오니까.
그저 여태보다 조금 더 빨리 달리게 될 테니까.

한 가지 불행한 게 있다면 사는 동안 내가 속도광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십대의 끝자락은 달린다기보다는 떨어지는 것이었고, 그건 내 생각보다도 훨씬 빨랐다.


10
그것과 별개로 돌아오는 길은 항상 기억해두는 편이었다.
기억력은 나쁘지 않았는데 원체 길을 잘 못 외웠다.
처음 가는 동네에서는 길을 잃는 게 태반이었다.

그래서 한 블록씩 갈 때마다 고개를 돌려 돌아가는 길을 확인했다.
저 자장면 집이 보이면 왼쪽으로 트는 거야.
아니지. 반대로 생각하면 오른쪽이야.

그 시절에는 집 밖으로 나가는 것 자체가 모험이었다.
물론, 내가 용사였던 건 아니다.


11
고등학생 때 절친이었던 친구 하나가 결혼을 했다.
올해 일은 아니다.
작년 일이거나 재작년 일일 텐데,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결혼식에는 가지 않았다.
연락한 지는 오래 되었지만 그걸 감안하고서라도 기분이 나빴기 때문이다.

옛 친구의 결혼 소식은 카톡으로 받았다.
그것도 나를 포함해 여섯 명이 있던 카톡방에서.

A가 이번에 결혼하는데, 올 사람은 오라는 식이었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지금 A와 나는 친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10km로 달리고 있을 때의 어딘가에 친구를 두고 왔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물론 돌아갈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 글의 흐름이 그랬던 것처럼.


12
성공을 쫓던 날에는 모든 게 눈부시게 느껴졌다.
내가 성공할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반면 실패가 다가오는 날에는 모든 게 어둡게 느껴졌다.
내가 실패할 거라는 걸 확신했기 때문이다.

한가롭게 시간을 보냈을 때에는 다시 시간이 왔는데
성공을 보내고 난 후에는 실패가 오다니.

불합리하다고 생각했지만 부정할 필요는 없었다.
인생이 늘 공정하기만 하다고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13
인적성 검사에는 대부분 '매우 그렇다'와 '매우 그렇지 않다'가 들어간다.
그게 결과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늘 중도를 선택하곤 했다.
왠지 양 끝에 있는 걸 고르면 양심에 찔리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적성 검사를 할 때면 늘 작가를 골랐다.
아마 살면서 몇 번이나 했을 테지만, 늘 같은 결과가 나오도록 골랐다.

내가 하고자 하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다른 사람보다 잘 할 수 있을 거란 확신도 있었기에.
그러지 말아야 했다.
좀 더 창문을 열어두고 있어야 했다.
그때는 아직 겨울도 아니었는데.


14
기다리는 건 쉽지만 돌아보는 건 어렵다는 걸 알게 된 건 비교적 최근이었다.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기다리는 건 정면만 바라보고 있어도 되지만 돌이켜보려면 고개를 돌려야 했다.

각박한 현대인들은 몸이 대부분 뻣뻣하고, 나는 각박하지는 않은데도 몸이 뻣뻣했다.
그래서 고개를 돌리는 것도 부쩍 힘들게 느껴졌다.

아직 느리게 걷고 있을 때에는 과거 회상을 많이 했는데 요즘은 거의 하지 않는다.
처량하기도 처량하거니와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서다.

언젠가 누가 그랬다.
하늘을 본 지가 오래 되었다면 여유가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거라고.
일부러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고 다닌 적도 있다.

그리고 그때만 해도 몰랐다.
집에서 나가지 않으면 볼 하늘도 없다는 걸.


15
아마도 노력은 했다고 말하고 싶다.
이 길이 내 길이 아니었던 건 아니라고도 말하고 싶다.
문제는 그런 푸념을 늘어놓을 곳이 없고, 이야기한들 좋게 들어줄 사람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야기에는 한 가지 단점이 있다.
청자가 필요하다는 것.
독자가 없으면 작가는 될 수 없다는 것.


16
다 쓰고 나서야 이게 회고록인지 참회록인지를 생각해보았다.
결론은 회고록이었다.
참회할 만큼 긴 시간을 산 것도 아니지만, 무엇보다 미안하다는 생각이 없었다.

죽은 다음, 혹은 죽기 직전에는 미안할 수도 있겠다.
좀 더 잘 살 수도 있었잖아.
좀 더 재밌게 살 수도 있었잖아.

다만 아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다행이도 무언가에 감화되기 어려운 만큼 고집은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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