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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각장애인의 서툰 에세이2 - "기분의 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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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노웨어맨
추천 : 2
조회수 : 28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0/03/17 22: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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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의 온도

 

 


 

    기분이라는 건 단단하게 어딘가에 고정되어 있는 건 아니라서 이리저리 휘둘리고, 가라앉고, 붕 뜬다. 때때로 어딘가에 묶여있는 건 아닌데 수면에 떠 있듯이 제 위치를 유지하고 있기도 한다. 완전 제멋대로다.

    오랫동안 기분에 대하여 관찰한 바로는, 이렇게나 제멋대로 흩날리면서도, 제 온도를 지키려는 고집이 있어서, 잘 달궈졌다가 순식간에 차갑게 식어버릴 때는 머릿속이 하얘지거나 굼떠진다. 급격하게 온도가 바뀌면 정신과 육체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아무리 날고 기어도 기분 하나에 웃고, 기분 하나에 울게 되어 있는 모질지 못한 종이다. 기분을 잘 느끼는 사람은 작은 기분 하나에 하루가 전부 달라져버리기도 하고, 하루의 느낌을 단정지어버리기도 한다. 우리가 스스로 기분을 통제할 수 없게 되면 소중한 하루를 망쳐버릴지도 모른다.

 

 

    스스로 기분을 통제할 수 있는 법을 알아야겠다고 느끼게 된, 해질녘 부산 남포동의 시끌벅적한 거리를 기억한다. 그리고 친구 민과 현이를 기억한다.

    현이와 민은 온라인 게임을 하다가 알게 된 친구들이다. 온라인에서 알게 된 사이는 종종 서로의 모습을 실제보다 과소평가하거나 혹은 과대평가하곤 한다. 청각장애가 있다는 점을 미리 알렸지만, 게임도 잘하고, 성격도 좋고, 채팅만으로도 소통이 잘 되니까 청각장애를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 같다.

 

 

    부산에 사는 현이를 만나러 부산행 KTX에 몸을 실었다. 민은 대구에 살았지만, 내가 부산으로 놀러간다고 하니까 따라갔다. 현이는 부산 토박이, 민은 대구 토박이다. 낯섦과 편안함이 혼재하는 친구들을 만났다.

    민의 말소리는 알아듣기 편했다. 대구 사투리 특유의 강한 억양 덕분에 발음이 분명하고 깨끗했다. 단어 하나하나가 쏙쏙 귀에 박혔다. 현이의 말소리는 비교적 알아듣기 어려웠다. 부산 사투리 때문이 아니라, 현이 자신이 조용하고 나긋나긋하게 말하는 스타일이었다. 표정과 입모양이 크지 않아서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놓치기 쉬웠다. 너무 나긋나긋해서, 다른 사람들은 현이 사투리가 심하다고 하는데 나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현이보다는 민의 목소리가 대화하기 편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민을 중심으로 대화가 이어지게 되었다. 나와 현이 모두 민에게만 말을 걸고 대화하는 불편한 모양새. 사실 현이의 말을 전부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현이와 나 사이에서는 대화가 매끄럽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 순간부터 서로 굳이 대화를 이어갈 노력과 의지가 사라져버린 듯했다. 두 사람 다 좋은 친구라고 여겼던 나는 이 편향적인 관계가 아쉬웠다.

 

 

    그 날 오후, 막 배가 허기지려고 하는 참이었다. 셋 다 같은 생각을 했는지 뭘 먹을지에 대해 고민했다. 아이폰으로 맛집을 찾던 현이가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 현이의 말을 놓치지 않으려고 벌어지는 입에 집중했다.

    “민아, 노웨어맨한테 뭐 먹고 싶은지 한 번 물어봐봐.”

    “, 노웨어맨. 너 먹고 싶은 거 있냐?” 듣자마자 냉큼 민은 나에게 물었다.

    “? ... 글쎄.”

    당황스러운 마음에 대충 얼버무렸다.

    이 순간에 느낀 내 기분을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머릿속이 하얘진다. 현이의 말을 알아듣기 어려워도 끝까지 노력해야지. 현이의 말을 귀담아듣고 꼭 대답해주리라. 하지만 현이의 말은 나를 향해 직선으로 오는 게 아니라, 한 바퀴 빙 돌아서 왔다. 기껏 알아들었는데 대답해줄 수 없었다. 현이와 나 사이의 불편한 기류를 나만 느끼는 것은 아니었구나, 현이도 느끼고 있구나. 서글펐다.

    “그걸 왜 민이한테 물어봐, 나한테 물어봐야지.”라고 당당하게 대응하지 못했던 나의 소심함이 미웠다. 알아듣지 못한 척하고서 민의 질문에 대충 얼버무리기만 했던 그 순간의 내가 비참했다.

    말 한 마디로, 기분 하나로 하루가 전부 달라져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그 때 알았다. 조금은 낯설었지만 마냥 즐겁고 행복하기만 했던 남포동 골목은 와장창 산산조각이 났다. 존재하는 현실이 모두 무너져 내리는 기분. 부산은 활기차고, 내 옆의 친구들은 열띤 맛집 토론을 이어가고 있다. 무기력하게 추락하는 기분을 느끼는 나만 빼고.



    친구들과 헤어지고 서울로 돌아가는 KTX에 몸을 싣고 자리에서 눈을 감아버렸다. 밖으로 분출되지 못한 감정은 살 껍질을 뚫지 못해 되돌아와 마음을 공격했다. 스스로를 상처 입히기 시작했다. 자괴감과 자기혐오의 늪에 발이 푹푹 꺼졌다. 숨을 크게 들이쉬어도 답답했다.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은 자기혐오. 종종 느껴본 기분이어서 잘 알았다.

    반드시 이 감정을 해소해야 한다. 그래야만 했다. 부정적인 기분에 너무 심취하면 자괴감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애꿎은 타인에게 비난과 원망의 화살을 돌리게 되리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내 마음을 알아채주지 못했다고 해서, 아무런 잘못도 없는 현이를 미워하게 될지도 모른다. 마음은 드러내야 안다. 표현해야 전해진다. 말해야 했다. 나는 현이를 아끼기 때문에.

 

 

    쓸데없이 예민하게 군다고 생각해도 상관없었다. 내게는 중요한 문제였다. 한 번의 기분만으로 현이를 그렇게 단정할 순 없다. 관계를 개선할 여지가 남아있으리라고 믿었다. 확신했다. KTX에서 현이에게 카톡을 남겼다.


    [현이야, 뜬금없이 진지한 카톡 보내는 거 미안해. 꼭 말하고 싶어서. 아까 오후에 남포동에서 뭐 먹을지 고를 때, 사실 네가 민이한테 하는 말을 알아들었어. 나한테 밥 뭐 먹을 건지 물어보라던 말. 기분이 확 다운되더라구. 너는 내가 어렵구나... 우리는 뭐가 먹고 싶은지 그 간단한 대화조차 직접 할 수 없는 거구나... 그게 너무 섭섭했어.]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던지, 카톡의 숫자 1이 곧장 사라졌다. 현이 읽고 있었다.


    [내가 귀가 불편해서 이 상황이 쉽지만은 않다는 거 알아. 네가 느끼는 거랑 다르게 내가 별 것도 아닌 걸 진지하게 받아들이네,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도 각오했어. 나한텐 너무 중요한 문제였어. 우리 관계가 내 귀 때문에 이렇게 되는 게 싫어. 너랑 대화하는데 어려움이 있어도 끝까지 직접 너의 말을 알아듣고, 내 입으로 직접 대답해주고 싶어. 그게 바로 내가 원하는 관계야.]

    휘갈겨 쓰고 바로 아이폰을 꺼버렸다. 답장을 보기가 무서웠다. 쓰고 나니 미친 듯이 후회가 몰려왔다. 아 씨. 충동적인 감정 하나 제대로 조절 못해서 이게 무슨 짓이야.

 

 

    놀랍게도 현이는 곧장 미안하다는 답장을 전해왔다.

    [내 진짜 그렇게 생각하는 줄 몰랐다ㅠㅠ 니 민이가 말하는 걸 더 편해하는 것 같아서 그랬어. 그래서 민이가 대신 말하는 게 너한텐 더 좋은 배려라고 생각했어. 아니구나... 진짜 미안해......!! 말해줘서 고맙다. 앞으로 그렇게 불편한 게 있으면 꼭 이렇게 말해줬으면 좋겠어.]


    [앞으론 조금 더 또박또박하게 말해줄게. 근디 내 사투리 마이 심해서 잘 들리려나 모르겠다ㅋㅋㅋ]


  

    [아니야..! 얘는 뭐지?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게 바로 이해해주니까 오히려 내가 미안하고 고맙다ㅠㅠ 오늘 즐거웠다 레알루... 부산 짱이네. 자주 놀러갈께!]


    [응응, 내도 완존 잼썼다! 또 온나ㅋㅋ]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다. 아무 변명도 핑계도 없는, 정말로 나만 생각해준 소중하고 완전한 문장들. 현이는 편견을 가지고 있거나 나를 불편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을 뿐이었다. 우린 서로를 잘 몰랐다.

 

 

    현이와 자주 만났다. 그 시간만큼 우리는 더 가까워졌다. 오고 간 말만큼 수많은 감정이 같이 오고 갔다. 그리하여 현이는 내가 직접 표현하지 않는 것에 상처 입는다는 것을 알았다. 또 말하다가 끊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도 알았다.(“노웨어맨!... 아니다. 아무 것도 아니야.”같은 것.) 나는 현이 사투리가 심한 것에 스스로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는 걸 알았고, 흥분하면 말이 점점 빨라진다는 것도 알았다. 부산은 따뜻한 도시였고, 남포동은 매력적인 동네였고, 현이는 사려 깊은 아이였다

    기분은 계속해서 달라진다. 기분에 따라 같은 장소, 같은 사람도 항상 다르게 보인다. 민이와 현이를 만난 그 날 이후로, 나는 한 군데 카페만 가거나 같은 사람을 자주 만났다. 같은 장소나, 같은 사람에게 셀 수도 없이 많은 기분을 차곡차곡 쌓는 건 심신에 꽤 도움이 됐다. 쉬이 요동치지 않으며 휘둘리지 않는 기분의 무게를 느낀다. 매순간 변하는 기분을 내가 통제할 수 있게 되면 그 날 하루의 느낌은 오롯이 내가 결정할 수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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