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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ID : readers_3527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링구아프랑카
추천 : 2
조회수 : 30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0/12/23 10:2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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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어 떠올리는 어린 시절 기억은 미지근한 강바닥 모래같이 간지럽고 흐릿한 감촉만 남아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깨진 사이다병 유리처럼 선명한 색깔로 뇌리에 박힌 몇몇 사건들도 있다.



초등학교 5학년은 남녀의 격차가 심할 때다. 당시 여자애들의 평균키는 남자애들보다 5cm도 넘게 컸고 힘도 셌다. 신체뿐 아니라 생각도 많이 달라서 공통주제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남자애들은 여자애들의 드라마, 연예인, 이성친구 이야기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바벨탑같은 대화의 단절은 곧 갈등과 대립으로 이어졌다. 반에서는 허구헌날 남자 여자간에 싸우는 게 일이었다. 여자애들 중 많이 놀림 받던 아이가 있었는데 이름은 선아였다. 선아는 키가 크고 얼굴이 예뻤다. 사춘기도 일찍 와서 가슴이 불룩 나와 있었는데 그 때문에 늘 구부정하게 몸을 숙이고 다녔다. 



선아는 좀 특이 케이스였는데, 여자애들이 아무도 그 애 편이 돼주지 않았다. 보통 남자애들이 한 여자애한테 장난을 걸면 당장 다른 여자애들 서너명이 나와 지원사격을 해주는 게 룰이었으나, 선아는 남자애들의 괴롭힘과 여자애들의 무관심을 한번에 받는 왕따였다. 



표면적인 이유는 가난하고 공부도 못하는 주제에 잘난 체 한다는 것이었는데 내 기억에 선아는 조용하고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는 아이일 뿐이었다. 난 그게 모함이라고 확신했다. 왜냐하면 선아는 사실 남자애들에게 인기가 꽤 있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단지 남자애들은 호감을, 혹은 그것을 부정하는 자신의 마음을 그렇게 표출했던 것이다(물론 등신같은 짓이었고 나도 거기에서 예외가 아니었음을 부정하지 않겠다). 그녀는 또 선생님들에게도 얌전한 아이로 평판이 좋았는데, 특히 미술 선생님은 편애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 때 반 여자애들을 휘어잡고 있던 애(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의 눈에 그런 점들이 거슬렸고 선아는 질투의 희생양이 되었다. 학교 안에서 내 눈에 보였던 건 무관심이었지만 그 외 시간, 그 외 장소에서 어떤 일이 더 있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선아는 뒤틀린 동경과 불같은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있었다.



어느 날 갑작스런 장학사의 방문을 준비하기 위해 미화부였던 나는 방과 후 교실에 남아 환경미화를 하게 되었다. 애들을 감독해야 할 담임 선생님은 하라고 말만 해놓곤 교무실로 갔고 교실 뒤쪽 벽면 한 쪽을 맡은 녀석들은 전지에 유성매직으로 대충 몇 글자 채우고는 내게 검사 맡으라고 떠넘긴 후 도망가버렸다. 우리 조 애들도 눈치를 보더니 학원을 가야해서, 밖에 엄마가 차로 데리러 와서 등의 이유를 대며 하나 둘 가버렸고 결국 교실에는 선아와 나 둘만 남게 되었다.



나는 멍하니 책상 위를 보았다. 다른 조의 결과물은 누가 봐도 절망적이었고 우리 조의 전지는 텅 비어 있었다. 그 옆엔 아직 손도 안 댄 색종이, 가위, 풀, 스카치테이프, 크레파스가 흩어져 있었다. 다 내가 선생님 심부름으로 아까 사온 새 것이었다. 먼저 간 아이들에 대한 야속함, 버림받았다는 서러움, 해야할 작업에 대한 막막함, 아마도 들을 것이 확실한 선생님의 실망과 꾸지람 등이 파도처럼 나를 덮쳤다. 가슴이 먹먹해지고 목이 메이더니 곧 어찌할 겨를도 없이 눈물이 흘렀다.



갑자기 내가 울음을 터뜨리자 맞은편에 있던 선아는 깜짝 놀란 기색이었다. 반쯤 일어나 안절부절 못하던 선아가 조심스레 내게 말을 걸었다.



“왜... 울어?”



이미 울고 있었지만, 울고 싶던 차에 뺨 때려준 격으로 나는 아무 잘못도 없는 선아에게 화를 내며 억울함을 쏟아냈다.



“몰라서 물어? 하나도 못했는데 너하고 나빼고 애들 다 갔잖아! 이렇게 큰 걸 언제 다 해? 그리고 쟤네들 거 봐봐. 완전 엉망이잖아. 선생님한테 어떻게 검사맡아...”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한 난 다시 엉하고 울기 시작했다. 당황한 선아가 여러 가지 말로 위로하고 같이 해보자고 격려해줬지만 한번 터진 감정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콧물까지 흘리며 히끅거리고 있는 나를 물끄러미 보던 선아가 결국 내 옆으로 와 앉았다. 그리고는 내 어깨에 팔을 두르더니 날 살짝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울지마. 괜찮아. 다 괜찮으니까 울지마.”



부드럽고 좋은 냄새가 났다. 토닥이는 선아의 손길에 나는 얼굴을 묻고 얼마를 더 울었다. 눈물에 젖은 면티 아래 선아의 피부가 따뜻했다. 왠지 마음이 조금씩 진정되었다.



우리는 늦게까지 미화작업을 했다. 선아와, 아니 여자애와 그렇게 많이 이야기하고 웃어본 건 그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다행히도 담임 선생님이 퇴근 전에 교실에 들렀고, 셋이서 남은 작업을 마무리해 완성할 수 있었다. 나는 선생님이 우리 둘만 남은 까닭을 물어 부조리를 고발할 기회를 주길 간절히 바랬지만 역시나 담임은 그런 것에 아무 관심이 없었다. 



이후로 변한 것은 없었다. 나는 스스로 나설 용기가 없는 겁쟁이였고 선아는 계속 힘든 학교생활을 보내야 했다. 마치 그날 일이 없었던 것처럼 우린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았고 말도 나누지 않았다. 나는 선아에게 장난치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선아가 이런 내 호의를 눈치채줬으면 좋겠다는 비겁한 기대를 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6학년 때 선아는 전학을 갔다. 이미 반이 갈렸었기 때문에 간 다음에야 소식을 전해들었다. 그것 말고도 선아네 엄마가 학교에 찾아와 난리를 쳤다는 둥, 미술 선생님이 갑자기 전근가게 된 게 선아 때문이었다는 둥 하는 몇몇 뜬소문이 더 돌았지만 난 믿지 않았고 곧 잠잠해졌다. 



세월이 흘러 난 성인이 되었고 학교는 폐교되었다. 동창회에도 몇 번 나가봤지만 선아는 나오지 않았고 소식을 아는 사람도 없었다. 다만 미술 선생의 소식은 들을 수 있었는데 몇 해 전 심근경색으로 죽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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