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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 여름은 불쾌해도 수박은 달콤하잖아. - 쿠폰, 양말, 선풍기
게시물ID : readers_3631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15번지
추천 : 2
조회수 : 356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21/10/18 13:3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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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폰, 양말, 선풍기

 

 

여름은 불쾌해도 수박은 달콤하잖아.

 

 

 

족발집 쿠폰이 벌써 열 장이나 모였구나. , 아닌가? 처음으로 배달시켜 먹었던 게 네가 세상에 나오기도 전이었으니 꽤 오래 걸린 건가?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닌데,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든다는 게 참 신기하구나.

우선 족발을 배달시켜 두고 그때의 이야길 해줄게. 네가 들어도 재미난 이야기일 거야.

 

여름은 모두에게 불쾌한 계절이지. 지구온난화 덕에 그렇지 않아도 무더운 여름이 더더욱 불쾌해졌어. 건장한 사람이 아니면, 함부로 낮에 돌아다니는 것조차 위험할 정도가 되었으니까 말이야.

그럼, 여름으로 들어서는 길목은 어떨까? 늦은 봄에서 초여름으로 접어드는 시기 말이야. 그 시간도 그저 불쾌하기만 할까? 사실 처음으로 족발을 시켜 먹었던 게 딱 그때쯤이었어. 사람마다 다 다르지만, 엄마나 아빠는 더위를 좀처럼 견디질 못하는 체질이라서 이미 여름의 문턱에 선 것만으로 기운이 빠진 채였어. 저녁을 차리기 위해 불 옆에 서는 것조차 꺼려져서 배달 음식을 먹자고 제안했던 게 아빠였지.

그때도 지금처럼 마찬가지였어. 족발을 배달시켜 두고 예전에 겪었던 이야길 엄마에게 들려줬지. ‘네가 들어도 재미난 이야기일 거야라고 엄마의 귓가에 속삭이면서 말이야.

 

스스로 여름은 좀처럼 견디질 못하는 체질이라고 믿었어. 굳게 믿으며 살아왔지.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학교 다닐 때도 여름만 되면 늘 졸았거든. 그렇게 힘들 수가 없었어. 덥고, 짜증만 나고, 땀은 또 계속 흘러서 책상을 흥건하게 만들 정도였으니까.

그렇지만 아빠가 엄마를 만나기 십여 년 전에는 이야기가 달랐어. 당시의 아빠는 장사를 잘해보려다가 실패해서 빚만 가득했거든. 당장 달마다 내는 전기세조차 아쉬울 때였지. 그러니 에어컨 같은 건 상상도 하지 못할 때였어. 선풍기 하나만으로 길고 긴 여름을 나야 했는데, 정말 신기하게도 그게 또 살아지더라는 거야.

물론, 지금 다시 그때처럼 지내라고 한다면, 아빠는 빚을 더 지더라도 에어컨을 장만하고 온종일 틀어놓을 테지만 말이야.

 

다시 생각을 해봐도 그땐 굉장히 암울한 시절이었어. 지금은 족발을 주문해두고 기다리는 입장이 되었지만, 그땐 아빠가 주문한 사람들의 음식을 배달해줘야 하는 처지였거든. 동네 배달부 신분으로 꼬박 이 년의 시간 동안 하루 열네 시간씩 오토바이를 탔어. 그래야만 빚도 갚고, 생활도 할 수 있을 때였거든.

 

그런 생활을 했으니 수박 한 덩어리조차 마음 편히 사서 먹질 못했어. 그저 시원한 생수나 떨어지지 않고 곁에 있으면 참 다행이었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렇다고 나쁜 점만 빼곡하게 쌓여있었던 시절도 아니야. 수박과 에어컨을 대신할 만한 달콤한 것들이 생활의 여기저기에 놓여 있었어.

 

당장 오토바이가 그랬지. 일하기 위한 수단으로 탔던 거지만, 일하는 과정에서 속도를 냈을 때, 가슴으로 들어오는 맞바람은 선풍기 따위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어. , 신호대기를 하는 동안에는 몰아쉬는 숨마저 사막의 기운을 내뿜었던 게 사실이지만, 달리는 동안은 정말 시원했지.

일을 마치고 나서 먹는 야식도 훌륭했어. 종일 배달만 하던 음식들을 일을 마치고 나서는 하나쯤 먹을 수가 있었어. 그리고 알게 되었지. 노동을 마치고 몸을 편히 눕혔을 때, 맛 좋은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면 어떤 변화가 찾아오는지도 말이야. 행복으로 가는 첫 단추가 먹거리에 있다는 진리를 몸소 깨닫게 되었던 시절이었어. , 덕분에 그때부터 몸매는 망가지긴 했지만.

 

그 외에도 자잘한 기쁨들이 당시의 아빠를 버티게 해주었어. 힘들 때 찾아와주는 옛 인연의 가치라든지, 친절에 아낌이 없는 이웃이라든지, 하루하루 바뀌는 하늘 같은 것들이 그랬어.

그런 것들이 매 순간 찾아왔던 것도 아니고, 어두웠던 시절을 전부 걷어낼 수 있을 만큼 굉장한 것들도 아니었지만, 확실히 당시의 아빠를 지탱시켜주던 것들이었어.

정말, , 무더운 날 베어먹는 수박 한 조각의 맛 같은 거였지. 여름을 걷어낼 수는 없지만, 한순간이나마 여름에 만족할 수 있게 해주는 힘.

 

여기까지 조용히 듣고 있던 엄마는 그게 대체 무슨 재미난 이야기냐고 아빠를 나무랐지. 아빠가 힘든 시절에 고생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엄마는 속상함을 숨기지 않았거든. 그날도 마찬가지였어. 그런 이야기는 재미없다고, 족발이 오기도 전에 맛이 달아나겠다고 했지.

 

아니야, 진짜 재미난 이야기는 그래서 지금부터야. 내가 그 이후로 지금까지 몇 켤레의 양말을 신다가 버렸을 것 같아?”

 

엄마는 아빠가 갑자기 양말 이야기를 꺼내서 생뚱맞게 들렸나 봐. 그 상황에서 양말 같은 걸 짐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아빠가 당황했겠지. 그만큼 터무니없는 순간에 던진, 터무니없는 이야기였어.

 

당신한테 장가가겠다고 결심하기 전까지 새로 산 양말은 있어도 버린 양말이 없었어. 다 어떻게든 신고 또 신었거든. 봐봐, 이쯤에 구멍이 난 양말은 요렇게 반대쪽 발로 옮겨서 돌려 신으면 구멍이 작아져. 그럼, 구멍이 더 커질 때까진 또 어떻게든 신을 수 있어. 그리고 여기가 헤지려는 건 외출용으로 신는 게 아니고 퇴근 후에 잠시 슈퍼 나갈 때나 신으면 좋고

 

구멍 난 양말을 돌려 신는 요령을 다 말하기도 전에 족발이 도착했어. 그 이후로는 엄마와 아빠만의 이야기니까 미안하지만, 네겐 들려주지 않을 거야. 다만, 그때 첫 젓가락질 후에 아빠가 했던 이야기는 분명 기억이 나.

 

그래서 정말 요즘이 꿈만 같은 거야. 우리 명의의 집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하철역 가까운 20평대 아파트에 당신과 살고 있잖아.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반지하에서 커피포트로 물을 끓여서 머리를 감던 녀석이 말이야.”

 

그 이후로 지금까지 우리 집 냉장고에 족발 쿠폰이 차곡차곡 쌓여온 거란다. 그러니까 이건 단순히 배달을 시켜서 먹었다는 게 아니야. 엄마와 아빠가 함께 보낸 시간이고, 너를 기다리고, 너를 안고, 너와 눈 마주치며 지금처럼 이야길 해주기까지의 시간이 기록된 거야.

 

그게 지금은 당장 족발 쿠폰이지만, 조금만 다르게 보면 우리가 함께 타는 차일 수도 있고, 매번 따뜻한 밥을 해주는 밥솥일 수도 있어.

그래, 이런 곳에 전부 다 깃들어있다는 거야. 사랑을 지탱시켜주는 작고 아름다운 것들은 말이야.

 

아빠도 그 사실을 시간이 흐른 뒤에나 알았어. 그 시절에는 그 덕분에 버티면서도 그런 줄도 몰랐지. 그만큼 주변을 둘러보지 못할 정도로 일상이 고생스러웠으니까. 그런데 당시에 아빠를 지탱시켜주던 소소한 것들이 있었기 때문에 아빠는 지금에서나마 말할 수 있는 거란다. 양말을 돌려 신는 방법이나 오토바이를 탈 때의 기분 같은 것들을 웃으면서 말이야.

 

아가, 그래서 이 이야길 네게 남겨두는 거란다. 앞으로 네게 내가 겪었던 깊이만큼의 어둠이 찾아올지도 모를 일이고, 내가 겪었던 것보다 훨씬 깊은 행복을 맛보게 될지도 모를 일이지.

어느 쪽이든 잊지 말고 기억하고 있길 바란다. 행복한 시간 속에서는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 어둠 속에서는 너를 잊지 않고 지탱하기 위해서.

 

네 마음을 지켜줄 작고 아름다운 것들에 집중하렴.

 

그게 아빠가 직접 세상의 어둠을 핥으며 알게 된 진리란다. 잊지 말아라.

여름은 불쾌해도 수박은 달콤한 법이란다.

 

 

 

- - - 

 

최근 한 동안 이런 글만 썼네요.

근래까지 쓴 글들 정리하고 이제 원래 쓰던 스타일 대로 단행본 한 권 분량의 장편을 쓰려고 합니다.

 

정리하는 동안 나온 글들 중 가장 리얼한 글이라서 가지고 와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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