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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의 목을 벤 다음날 - 0. 프롤로그
게시물ID : readers_3651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15번지
추천 : 1
조회수 : 41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1/12/07 10:5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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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0. 프롤로그

 

 

 

 

 

나는 까마득한 과거나 우리의 시선이 닿지 않는 다른 우주로 여행하는 걸 즐긴다.

 

아니, 좀 솔직해지자면, 원치 않아도 그런 터무니 없는 여행을 무리해서 떠나야만 하는 일이 잦은 편이다. , 그게 다 내 능력이 제법 썩 멋지게 타고난 것은 아니라서다. 소설가라는 직업이 원래 좀 그렇다. 일반인들이 당장 듣기에 터무니없고, 허무맹랑하기만 한 이야기들에 꽤 열정적이다. 아니, 그런 이야기들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편이다. 한 번쯤 누구나 해봤을 단편적인 상상의 조각부터 시작해서 모두의 뒤통수를 뜨겁게 해줄 낯설고 신선한 소재, 고전과 철학, 사회적 현상까지 샅샅이 긁어모아 하나로 연결하는 상상을 멈추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어렵게 틀이 잡힌 이야기가 있다면, 그걸 다시 반죽하여 활자로 남기는 게 일이다. 이 작업만 기계적으로 꾸준히 반복할 수 있어도 정말 좋은 소설가다. 적어도 그런 사람들은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생활이 되는 일류전문가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런 역량조차 되지 않으면서 그보다 조금 더 괜찮은, 아니, 아주 멋들어진, 초일류전문가의 아우라를 내뿜는 진짜 소설가를 꿈꾼다.

지금까지 세상에 쏟아진 이야기들과 전혀 새로운 이야기 사이의 경계에서 오로지 독자들의 재미를 위해 신중하게 고민해보는 것은 물론이고, 그 과정에서 우리 인간들의 욕망과 본성에 관한 나름의 고찰도 섞어 넣어서 제법 학자다운 풍모도 풍겼으면 하는 거다.

정말, 부끄럽지만, 솔직히 그렇다. 나의 역량이 손바닥 절반 정도의 단검 크기라면, 내가 바라는 건 거구의 장정이 양손으로 집어 올리기도 힘든 츠바이헨더(Zweihnder, Two hands sword. 두손잡이 대검. 길이 약 180cm 이상, 무게 약 2kg 이상의 거대한 칼.) 정도의 크기다.

 

그렇지만, 우리 인간이 원래 어떤 존재인가? 간절히 원하는 게 있으면, 어떻게든 닿고 싶어서 몸부림치게 되는 연약한 존재다. 끊임없이 열정을 태우면서 욕망의 실현을 위해 스트레스를 받는 존재들이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영혼의 일부를 날려버리기도 한다. 목적에 취해서 선을 넘어버리는 거다. 인류가 힘을 합쳐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쌓아 올린 도덕적 관습이나 법, 사회 유지 시스템들을 하나의 수단으로만 취급해버린다거나 마땅히 지켜야 할 최소한의 양심, 도덕성마저 철저히 무시하고 앞으로만 달려들 때가 있다.

나 역시도 그런 존재다. 그래서 감히 내 욕망에 함부로 맞서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욕망이 흐르는 대로 두고 내게 부족한 천재성을 대신할 무엇으로 거듭나길 바랐다.

 

덕분에 나는 영혼의 일부를 팔아 까마득한 과거나 우리의 시선이 닿지 않는 다른 우주로 여행하는 법을 익힐 수 있었다. 부족한 재능이라 무에서 유를 창조하지 못한다는 걸 인정하고 나니까 다른 방법이 보였다. 차원을 넘나들며 모든 생명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권능은 그때 찾아온 것이다.

그렇다, 지금까지 나의 펜은 내 권능에 기댄 채로 굴러왔다. 그리고 그건 오늘도 예외가 아니다.

 

단출하게 여행 가방을 꾸린 후 서재의 문을 열었고, 다음 순간 나는 이름도 모를 시대, 우리들의 역사서에는 기록조차 되어 있지 않은 나라에 도달해 있었다. 급작스러운 이동에 멀미나 다른 부작용이 없었던 것도 복이지만, 더욱 다행스러웠던 건 어디쯤의 우주에 속한 어떤 행성인지는 몰라도 다행히 이곳도 하늘은 푸른색이었고, 아름다운 선율의 리라와 멋진 리라 연주자가 존재한다는 거다.

난 홀린 듯이 리라의 선율을 따라 걸음을 재촉했다. 리라의 선율이 내 가슴에서 꽃을 피울 때쯤, 나는 마을 입구 거목의 그림자 아래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리라 연주자인 집시는 내 눈앞에 변주된 선율을 그림으로 그려내기 시작했다.

 

나는 무명(無名)의 예술가요, 노래하듯 들려주는 나의 이야기는 모두 하나 같이 귀부인과 아이들이 좋아할 로맨스(Romance). 그러니 용과 싸워 당당히 이겨낸 기사의 이야기를, 그 기사의 애절했던 사랑 이야기를, 하나의 모험이 끝날 때마다 새로운 모험을 향해 박차고 뛰쳐나갔던 기사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 분들은 모두 나의 리라 앞에 모여주세요. 감미로운 이 선율을 따라 나란히 앉아주세요.

물론, 그렇다고 어디서 들어본 듯한 뻔한 이야기를 되풀이하려는 건 아닙니다. 지금부터 제 리라의 운율을 타고 울려 퍼질 이야기는 태양과 바람만이 기억하고 있는 고대의 이야기, 우리의 대륙이 지금처럼 여러 왕국으로 갈라지기 전의 이야기. 마물(魔物)들이 우리들의 왕국을 넘보던 시절, 우리를 지켜주었던 영웅, 마왕(魔王)의 목을 베어 우리에게 평화를 안겨다 준 영웅, 그러나 우리 곁에 조금도 머물지 않고 떠나간 영웅, 용사 바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 기껏 시간을 들여 찾아왔는데, 중세시대 기사 영웅담인가?

 

리라의 선율은 멋졌지만, 이미 이런 이야기는 독자들에게 전혀 신선하지 못하다. 여러 소설과 영화, 드라마, 게임 등에서 확대 재생산이 된 소재다. 싫증이 날 대로 난 흔하디흔한 소재일 뿐이다. 순간 모든 것이 지루해졌고, 여행을 이어갈 마음이 조금도 남지 않게 되었다. 이대로 발걸음을 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던 찰나,

 

집시가 다시 리라에 손을 얹으려던 찰나,

내 옆자리에서 조용히 구경하던 꼬마가 잽싸게 손을 번쩍 들고서는 무겁고 예리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대체 왜 마물과 마왕들은 파괴만 일삼는 건가요? 우리 모두를 죽인 후에는 대체 이곳에서 무슨 짓을 벌이고 싶어서 그러는 건가요? 아무리 마왕이라지만, 모든 걸 부수고 나면 심심하지 않을까요? 모든 걸 부수고 다시 뭘 만든다고 해도 만드는 과정이 마냥 좋기만 할까요? 하나부터 열까지 다 새로 만들려면 꽤 지루하고 답답할 텐데, 그렇다면, 마왕은 사실 성격이 좋은 편이 아닐까요?”

 

당황한 집시를 순진한 눈망울로 바라보는 꼬마를 보면서 나는 그 자리에서 박장대소를 하고 말았다. 그래, 나의 여행이 단순히 시간 낭비로 그치는 날은 없지.

나는 당황하는 집시와 집시의 대답을 기다리는 꼬마, 그들을 내려다보던 거목을 뒤로하고 다시 서재의 문을 열었다. 좋은 글은 영감이 찾아들었을 때, 무작정 쏟아내야 거기서부터 싹을 틔울 수 있는 법이다.

 

그래서 지금부터 여러분들이 읽게 될 이야기는 집시가 차마 이어가지 못한 뒷이야기들이다.

마왕과 용사가 검을 나누는 무용담과 용사와 함께 싸운 동료들과 용사를 기다리는 공주, 그들 모두가 어디에도 남겨두지 않았던 속마음을 펼쳐보는 이야기, 그리고 공주에게조차 말하지 못할 비밀을 숨긴 채 왕국을 다스린 국왕의 이야기.

 

이름하여,

대서사시 마왕의 목을 벤 다음날.

출처 http://novel.naver.com/challenge/detail?novelId=1032652&volumeN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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