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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의 목을 벤 다음날 - 1. 탄생
게시물ID : readers_3652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15번지
추천 : 2
조회수 : 29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1/12/08 13: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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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본격적인 이야기의 시작에 앞서 한동안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서재로 통하는 문을 완전히 닫기 전에 집시가 다시 다급히 리라를 켜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꼬마의 질문을 모른 척 애써 무시하며 이어갔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나는 무명이지만, 예술가. 이야기를 활자가 아닌 리라에 담는 음유시인. 어딘가에서 들어봤을 법한 이야기는 하지 않죠. 흔한 떠돌이 악사들처럼 용사의 운명적인 탄생부터 주저리주저리 읊어대다 말고, 모자란 머리를, 닳아버린 기억을, 부족한 임기응변을 탓하며 대충 웅얼거리며 넘어가지도 않죠. 모두 저의 입술의 끝을, 손가락의 끝을 따라오세요. 오늘의 이야기는 용사가 마왕과 결착을 짓는 장면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용사의 탄생이 아닌 마왕과의 결착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건 꽤 괜찮은 방법이다. 초반부터 지루한 설정을 늘어놓거나 등장인물을 향한 감정이입의 시간을 길게 두지 않고 속도감 있는 전개를 통해 독자를 단숨에 끌어오는 건 확실히 전문가의 솜씨다.

덕분에 고민이 되었다. 꽤 괜찮은 탐나는 방법이었으니까. 그렇지만, 그만큼 평소 내 스타일도 세련된 편이다. 아니, 내 고집이 매우 질긴 편이다. 고심 끝에, 귀에 머물러 지워지지 않는 리라의 소리를 완전히 씻어내기로 했다.

다소 고리타분하더라도 이야기의 시작은 용사의 탄생부터다. 그리고 태어나지도 않은 용사와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인물, 그 인물의 심장 소리에서부터 시작된다.

 

유성우가 떨어지는 날이면, 밤새 태어나는 모든 아기들을 파악해서 직접 보고하라.’

 

명령을 반드시 이행해야 한다는 긴장감에 소년의 심장 소리는 달리는 말의 말발굽 소리보다도 더 크게 요동쳤다. 소년의 귓가에는 어느새 심장 소리만 남아 어떤 소리도 뚫고 들어오질 못했다. 머릿속엔 오로지 명령에 관한 생각만이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긴장감으로 날뛰는 심장이 목구멍을 통해 거꾸로 튀어 오를 정도로 격하게 말을 몰았지만, 목적지는 여전히 멀게만 느껴졌다.

 

이제 고개를 하나만 더 넘으면 된다!’

 

하나만 더 넘으면 되는 고개. 그건 소년의 지난 십여 년의 시간과 절묘하게 닮아 있었다. 당장 눈앞의 과제, 하달된 명령만 충실히 이행하기만 하면 되었던 시간. 소년은 지난 십여 년간 유성우가 떨어질 때마다 꾸준히 말을 몰아 고개를 넘었다. 모든 게 다 전설 때문이다.

 

오래된 전설에 따르면, 유성우가 폭우처럼 쏟아지는 날에 불구덩이 속에서 태어나는 아기가 있을 것이라 했다. 부활한 마왕을 물리치고 세계에 평화를 안겨다 줄 운명을 쥐고 태어난다는 전설 속의 아기, ‘다이아라 반도(半島)’의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용사의 전설이었다.

소년의 직속상관은 소년에게 단 하나의 명령만을 내렸다.

 

전설의 용사가 될 아기가 정말 태어난다면, 그 사실을 우리가 가장 먼저 알아야 한다. 네게 이 지역을 맡기도록 하마. 항상 대기하거라. 언제든 유성우가 떨어지는 날이면 곧장 말을 달려야 한다.’

 

그렇게 소년은 지난 십여 년의 시간 동안 밤마다 대기하였고, 유성우가 떨어지기 시작하면 말을 달렸다. 덕분에 주변 마을의 임산부들 사정과 출생한 아기들 전부를 훤히 꿰게 되었다.

만삭으로 출산하는 게 아니라 예정보다 2, 3개월 빨리 출산하게 되는 경우들까지 모두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일대에서 떠오르는 산모는 단 한 명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제 고개 하나만 더 넘게 되면, 그 현장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오늘 밤이 파발꾼으로는 마지막 임무다. 지난 시간 동안 잘해주었다. 다만, 그동안 너의 키와 몸무게가 급격히 늘어 이제 파발꾼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내일부터는 네게 전혀 다른 임무가 주어질 거니 걱정하지 마라. 우리들의 신, 테누아스님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은 아직 많이 남아 있다. 신의 아이들인 우리가 열과 성을 다하여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더라도 일손은 늘 부족한 법이다.’

 

눈앞의 고개 너머로 유성우의 꼬리가 길게 떨어지는 게 보였다. 소년이 또래의 다른 아이들처럼 평범하게 자란 아이였다면, 분명 제자리에 멈추어 서서 소원을 빌었을 테지만, 소년은 날 때부터 고아였고, 조직의 명령을 교육으로 받으며 자란 몸이었다. 오직 마지막 임무를 완벽히 수행한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다행히 아직 아기는 세상에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가라, 갈라반. 가서 마지막 임무를 끝내고 복귀해라. 그리고 혹시라도 아기가 전설처럼 불구덩이 속에서 태어난다면지체하지 말고 바로 돌아와 내게 자세히 알려라. 모든 일이 테누아스님과 우리 테오나 왕국, 아니, 다이아라 반도 전체의 평화를 위해서다. 잊지 마라.’

 

소년은, 아니, 갈라반은 마을 입구에 닿기 전에 말에서 내려 어둠에 몸을 숨겼다. 유성우가 폭우처럼 쏟아지는 밤이라지만, 조용한 산골 마을답게 출산 중인 집을 제외하곤 모두 불이 꺼져 있었다. 갈라반은 몸을 숙인 채 빠르게 이동하여 불빛이 새어 나오는 창 밑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예상대로 산모가 악을 지르는 소리와 산파가 달래는 소리, 시중을 드는 아낙들의 분주한 발걸음과 초조함을 견디지 못하는 남편의 발걸음 소리가 섞여 창밖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테누아스님, 부디 산모와 아기 모두를 보살펴 주시옵소서.’

 

갈라반의 입장에서는 이대로 아기가 나오거나, 그렇지 않거나 어느 쪽이든 그만이었다. 사실 그대로 상관에게 보고만 하면 파발꾼으로는 마지막 임무까지 무사히 마치는 거였다. 그런 안도감 때문이었을까? 갈라반은 비록 창밖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지만, 진심으로 산모와 아기를 위한 기도를 올렸다. 갈라반의 맞잡은 두 손 위로 다시 한번 유성우가 길게 꼬리를 그리며 떨어졌다.

 

아니야, 아기가 완전히 거꾸로 돌아누웠어! 이대로는 아기가 살아나오기 힘들겠어. 어서 지금이라도 의사를 불러와야 해! 산모의 배를 갈라서 아이를 꺼내야 한다고!”

 

갑자기 늙은 산파의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가 날카롭게 귀를 찔러왔다. 곧이어 울부짖는 듯한 괴음과 탁자가 엎어지는 소리, 그릇들이 깨지는 소리도 연이어 들려왔다. 갈라반은 순간 말을 몰고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정말 의사를 데려올 사람이 필요하다면, 지금 당장 가장 날렵하게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갈라반 뿐이었다.

 

, 테누아스님. 왜 매번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이번에도 저는 누군가의 죽음을 보고도 모른 척하고만 있어야 하는 겁니까?’

 

사실 지난 십여 년간 갈라반은 여러 죽음을 묵과해야 했다. 당연히 그 대상들은 전부 산모나 태아들이었다. 어미의 목숨과 맞바꾼 아기들, 혹은 아기의 목숨과 맞바꿔 죽음의 문턱에서 겨우 살아 돌아온 산모들. 그렇게 둘 중 누구 하나라도 살아남으면 다행이었지만, 때로는 누구 하나조차 문턱을 넘지 못하는 날도 있었다. 산모와 태아가 함께 이 세상과 작별하는 날에는 갈라반의 마음이 어둠으로 가득찼다. 며칠간 음식을 입에 넣지도 못한 채 기도에만 열을 올려야 겨우 버틸 수가 있었다.

 

, 어째서 제게 마지막 날까지 이런 시련을 주시는 겁니까? 저는 그저 테누아스님의 뜻에 따라 충실했을 뿐인데, 어째서 오늘도 제게 고통을 주시는 겁니까? , 신이시여! 테누아스님, 당신은 정말 제가 침묵하길 바라시는 게 맞으십니까?’

 

, 이런! 아니야, 이젠 어쩔 수 없어. 정신 차려, 아리안! 덩치만 산처럼 큰 바보 녀석아! 이리 와, 이리 와서 이 늙은이의 눈을 똑바로 봐. , 시간이 없어! 선택해, 아기야? 아님, 아내야?”

 

늙은 산파의 날카로운 쇳소리는 연이어졌지만, 대꾸해야 할 남자의 목소리는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들리지 않았다. 갈라반의 두 눈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고, 맞잡은 두 손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아리안, 아기우리 아기를, 부탁해요.”

 

끊어질 듯한 숨소리는 분명 산모의 것이었다. 다시 한번 짐승의 울부짖음과 같은 괴성이 울려 퍼졌다. 산파를 돕던 일손들의 발걸음도 더욱 분주해졌다.

 

뜨거운 물, 천이 더 필요해요!”

 

갈라반은 어둠 속에서 허리를 폈다. 지난 십여 년 동안 유성우가 떨어지던 날 태어난 아기들은 많았지만, 그 어떤 아기들도 불구덩이 속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아마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아니, 오늘 불구덩이 속에서 태어나는 아기가 있다 하더라도 그게 지금 눈앞의 아기는 아닐 것이다. 다이아라 반도에는 수 십, 수 백개의 도시와 그만큼의 섬들도 있다. 갈라반이 맡은 구역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 따윈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할 가능성보다 훨씬 낮은 수치일지도 모른다.

 

테누아스님이시여! 부디 저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결심을 굳힌 갈라반이 어둠 속에서 빛으로 걸어 나왔다.

그건 그의 인생에서 최초의 탈선이었으며, 앞으로 그가 마주할 운명에 첫발을 내딛는 역사적인 행위의 순간이었다. 아니, 그 발걸음이야말로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들, 모든 인물들에게 시련을 안겨줄 첫발이었다.

 

갈라반이 잽싸게 휘파람을 불어 자신의 말을 불러낸 그 순간, 갈라반의 등 뒤, 맞은편 집의 대문이 열렸다. 그리고 누가 먼저라고 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그림이 그려졌다. 갈라반을 향해 빠르게 달려오는 검은 말의 그림자가 골목길에 들어선 것이 먼저였는지, 맞은편 집에서 걸어 나온 어린 여자아이가 먼저였는지는 여전히 명확히 말하기가 어렵다. 확실한 건 갈라반이 자신의 말에 올라타기 전에 여자아이가 먼저 비명을 내질렀단 거다.

 

엄마!”

 

그 소리에 놀란 갈라반은 자신의 말에 올라타야 할 찰나의 순간을 놓치고 말았고, 덩달아 놀란 말도 주인을 두고 저 멀리 달아나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건 다음 순간 벌어진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꺄아아악!”

 

여자아이의 비명이 다시 한번 울려 퍼졌고,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아기의 출산을 받아주던 곳에서 강렬한 폭발음과 함께 불기둥이 급작스럽게 치솟아 올랐다.

 

갈라반은 충격에 땅을 굴렀고, 여자아이는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늙은 산파의 쇠를 긁는 듯한 소리가 이어졌고, 거리는 순식간에 비명으로 가득 찼다.

갈라반은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면서 황급히 어둠 속으로 몸을 말아 넣어야만 했다. 순식간에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일 게 뻔했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은 갈라반의 예상대로 순식간에 모여들었다. 그것도 저마다 손에 양동이를 짊어진 채로. 그렇지만, 마을 사람들이 양동이의 물을 쓸 일은 없었다. 그건 갈라반 뿐만이 아니라, 그 자리에 모여든 모두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하늘까지 치솟았던 불길이 일순간에 사라지고 고요가 그 자리를 빠르게 채워나갔던 것이다. 놀란 마을 사람들이 앞다투어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모두의 상식을 뒤엎어버린 순간에 누구 하나 말 한마디 꺼내질 못했다. 마을이 만들어진 이후 처음으로 완전한 침묵이 모두에게 찾아온 순간이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보다 더욱 놀란 사람들은 문 뒤편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숯덩이가 되어도 모자랐을 화재의 현장이었지만, 누구도 불에 그을리거나 고열에 살이 녹지 않았다. 아니, 심지어 집안은 불기둥이 치솟아 오르기 전과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으에에애앵!”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침묵을 깼다. 갈라반은 반대편 어둠 속에서 그 모든 순간을 빠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의심의 여지 없이 명백했다.

다이아라 반도의 테오나 왕국에 용사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출처 http://novel.naver.com/challenge/detail?novelId=1032652&volumeNo=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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