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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200년
게시물ID : readers_911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릴케
추천 : 2
조회수 : 289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10/04 21:27:17
그해 동화는 문득 태어났다. 혁명도, 시민계급도 온전히 형성된 적 없는 땅에서 그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이야기”는 온전히 한 권 책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한 조각 후추과자처럼 아동 언어라는 새로운 맛을 품고 그 이야기들은 물질사회 문화진열장에 등장했다. 동화는 문자 텍스트 가운데 가장 늦게 출현한 장르였다. 1812년이었고 이야기를 채록하여 재구성한 이는 형제였다. 그림.

동화의 탄생은 비로소 노동에서 부분적으로나마 제외된 어린이가 나타난 조건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이는 주부의 발현과 동행하고 있었다. 임노동 형태와 더불어 주부, 어린이, 동화는 근대의 전형적인 발명품이었다. 절대빈곤이 일상인 사회에서 아동이나 여염집에서 가사노동에만 종사하는 여인네 부류는 따로 존재하기 어려웠다. 굳이 말하자면 모두가 ‘맞벌이’로 종일 일해도 생존 자체를 근본적으로 위협받고 있는 처지였다. 역사 이래 가장 심오하고 심각한 문제는 언제나 예외 없이 빈곤이었다.

동화의 가장 흔한 구조가 계모 아래서 길을 떠나 행운을 만나 귀환하는 순환적 패턴인 건 우연이 아니다. ‘백설(공주)’을 포함한 숱한 이야기가 여기에 속한다. 중세말 근대초 서구사회 아동들은 미처 열 살에 이르기 전에 거의 반 가까이 사망했다. 그 어린이의 부모 혼인지속기간은 대략 십오년을 헤아렸다. 이혼이 원칙적으로 어려운 사회에서 파경 원인은 대개 사별이었다. 아동이 다 자라기 전에 기혼자 다섯 중 하나는 빈곤과 그에 따른 질병으로 죽어갔던 것이다. 이들은 굶어죽지 않고자 다른 남자나 여자 짝을 찾아 ‘재혼 동업’을 해야 했다. 이야기에 계모가 많은 건 필연이었다. 그 집 아동들이 길 위에서 만나게 되는 귀인이나 좋은 운수란 실상 구걸이나 도둑질의 근사한 포장술에 지나지 않았다. 순환적이란 공주가 몇몇 일을 겪은 뒤 왕비가 되는 등 상황 변동뿐 인간해방적 관점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녀가 있었다. 배고픈 선의 저편에서 매부리코를 한 그네들은 아동살해를 포함한 사회악에 대한 거의 모든 혐의를 뒤집어쓴 채 숲에 숨어 살고 있었다. 어린이를 진짜 산 채로 잡아먹는 건 가난이었지만, 그 구조적 모순은 신비로운 성에 사는 공주 따위로 도리어 동경 어린 관점으로 굴절되었다. 디나르 알프스 지역에서 주로 찾아볼 수 있는 매부리코에 대한 골상학적, 관상학적 편견은 이 동화들이 가장 결정적으로 이바지한 바 있다. 죄 없는 사람의 피와 살에서 금을 캐내는 연금술, 저 마녀사냥에 대한 성찰은 없었다. 마녀재판에 들어가는 비용은 걸려든 사람이 죽기 전에 다 지불해야 했던 것이다. 애초부터 유대인 증오와 맞물려 있었던 마녀관은 그 뒤에도 때를 만나기만 하면 현실에서 맹렬히 부활하곤 했다. 아우슈비츠, 매카시즘, 종북놀음이 두루 그러하다.

언어는 족속의 운명을 벗어나기 어렵다. 독일어는 그 무렵 민족어로서 역할을 강요받고 있었다. 나폴레옹 침략(1806)과 그에 대응하는 응집적 집단기억으로 그림 동화는 출생했다. 지배층이 보기에 다분히 엽기적이었으나 사회 진실에 근접해 있던 ‘(의붓)어머니는 나를 죽이고 아버지는 나를 먹어대는’ 다수의 설화들은 문자계급의 취향과 그 자녀들에 맞게 개조되었다. 민족주의가 극에 달한 나치 체제에 이르러 ‘빨간 모자’에서 늑대 배를 가르는 건 친위대원으로, ‘백설’의 아버지는 폴란드 침략을 구상하는 존재로까지 왜곡되었다. 일제와 분단체제 한국 동화에서도 유사한 과정이 답습되었음은 아는 바와 같다.

순수함이란 순수라는 비정치성을 외연으로 무장한 또다른 이데올로기 규범이다. 이는 별도의 관념이 아니라 삶의 구체적 진정성 말고는 따로 없다. 동화 200년 역사는 아동 전용 이야기 지배체제 내부에 상존해온 여러 순수에 대한 질문을 비켜 가기 어렵다.

서해성 소설가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0581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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