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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바랜 사진 한 장
게시물ID : rivfishing_248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봄여름가을.
추천 : 10
조회수 : 1785회
댓글수 : 11개
등록시간 : 2015/10/12 15:32:37
영양은 결핍이었다. 애정도 결핍이었다. 비교적 유복했던 짧은 유년을 지나 아이 티를 벗어나는 시기부터의 날들은 몽땅 결핍이었다. 빈혈은 과잉이었다. 마주쳐야 하는 비정한 삶의 진상 때문에 어떻게 견뎌내야 할지 모르겠을 암담함으로 종종 비감했지만 비관하지 않았다. 나는 성장하는 중이라 낙관적이었고 세상은 영문 모를 희망으로 밝았다.
 
모진 절제와 괴로운 모색으로 고독한 사춘기가 지나고 있었다. 철거민 이주지인 송파 평화촌의 작은 단칸 셋방은 비좁았고, 여러해만에 재회한 아버지의 음주는 여전히 연일 가학과 피학을 오가며 암울함을 보탰지만, 파편처럼 흩어져 각자 외줄타기를 하던 가족이 다시 모인 것만으로도 서럽지 않았다. 결핍의 날들은 소급 청구된 구상권이라도 되는양 피차 보충의 나날들로 서서히 바뀌어갔다.
 
그때 이미 나는 애늙은이처럼 붕어 낚시에 단단히 길들여져 있었다. 집에서 도로를 건너 논길을 따라 15분 거리에 내 생애의 보물창고 같은 신비한 낚시터가 존재했다. 얼핏 보면 탄천에서 넘치는 하천 범람원의 배후늪지 같지만 바닥에서 샘이 솟는 소류지였다. 부들 말풀 갈대 같은 수생 식물이 흐드러졌고 숫자 8 모양으로 구불구불한 둑길을 따라 수양버들이 천연덕스럽게 늘어졌어서 안개라도 자욱한 날이면 그 은밀함에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다 저렸다.
 
낙조로 불그스름한 수면은 늘 고요하고 잔잔했다. 마디를 잇는 대낚시를 한 대 펼쳐 떡밥을 콩알만하게 달아 갈대 부근에서 집어를 하다가 날이 어두워지면 찌마디에 야광테이프를 감고 뽁, 소리가 나게 반사경을 부착한 칸델라에 점등을 했다. 곰실곰실 연신 찌가 솟아 올랐고, 살찐 가을 붕어들은 희붐한 새벽까지 초릿대가 반원이 되도록 물속에 쳐박히게해 낚시줄의 물을 튕기며 이리저리 핑핑 내달았다. 밤낚시를 마치고 등교하려고 귀가하는 길에 농로의 아침 이슬은 발목을 적셨으며 짙은 풀꽃 내음으로 어지러웠다. 무심코 돌아보니 소리 없이 풀숲으로 사라져 열일곱 살짜리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아, 지금까지도 섬뜩한 흑갈색 뱀의 꼬리.   
 
그 늪에서 월척급 최대어를 낚은 어느날, 둘째 형은 두 말 할 거 없다는 듯 사진관으로 날 데려갔다. 동생과 단 둘이 학생 시절의 몇 년을 고학으로 자취하며 고통스럽게 보낸 결핍의 나날을 치하하고 어두운 터널을 벗어나 건강히 생존하게 된 일을 자축하며 기념이라도 한다는 듯. 안타깝게도 그 몇 해 후에 내 신비스럽고 비장했던 늪은 염색공장이 들어서 황폐해졌고 아파트 개발로 아예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세월이 흘러 사진도 빛이 바랬고 내 기억의 필통도 가벼워가지만 굵직한 몇 가지 추억의 기둥을 이루는 이 한 장의 사진은 곧 시작될 靑春으로 가는 도약의 저변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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