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복잡하고 처리해야 되는 정보는 많으니, 우리는 자연스럽게 복잡한 사안들을 단순하게 정리해서 기억하길 좋아합니다.
이런 경향은 본능에 가깝다고 볼 수 있죠. 호랑이만 알던 사람이 표범을 처음 봤을 때,
"얘는 좀 다르게 생겼네, 행동도 다르려나?"하고 관찰하는 사람보다는
"호랑이랑 비슷하겠네, 도망가자!"하고 바로 도망가는 사람이 생존할 확률이 더 높을테니까요.
하지만 인류가 이렇게 본능에만 충실했다면, 우주로 로켓을 쏘아올리고 인공지능이 바둑을 두는 과학의 시대는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누군가 작은 디테일들을 관찰해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통해 이론으로 확립하면,
또 다른 누군가가 새로운 가설을 세우고, 기존의 이론을 뒤집는 과정 속에서 과학은 발전해왔습니다.
더플랜이 K값을 가지고 가설을 세우자, 이곳 과학게시판에서 합리적으로 K값과 개표조작은 연관이 없다는 결론을 도출해냈습니다.
여기까지는 아주 건강하고 바람직한 모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덕분에 많이 배웠구요.
그러나 그 뒤로부터는 이런 사고의 흐름을 보이는 글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K값이 틀렸다고? 그럼 개표조작은 없었던 거네. 더플랜은 사기다! 김어준은 사과해라!
그러나, 밝혀진 것은 "K값과 개표조작은 연관이 없다"는 것이지, "개표조작이 없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건 정말 중요한 차이인데, 이 대목에서 그냥 퉁치고 "개표조작이 없었다"라고 이해하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내 은행 잔고와 청주 홍수는 연관이 없다"는 말과 "청주에 홍수가 없었다"는 말이 같습니까?
"A와 B는 연관이 없다"는 팩트가 "B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으로 점프하는 이 현상이 저는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K값 논란으로 인해 너무 지친 나머지 "개표조작이 없었다"고 단순하게 정리해서 기억하고 싶어하는 본능의 작용은 아닌지 추측해볼 뿐입니다.
개표조작은 K값과 무관하게 제대로 조사해봐야 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는 수억원의 돈을 들여서 재검표를 하는 방법밖에 없어 보이긴 합니다만..
대선 전 박근혜-이명박 단독 회동, 김무성 버스가동 지시, 국정원과 사이버사령부의 댓글공작, 시간역전현상, 역누적미스테리, 분당 750매 계수기 사용, 박빙 선거에서 3시간만에 당선확실공표 등등
지난 18대에서 개표조작을 의심할 만한 정황이 너무나 많이 포착되었기 때문에 앞으로의 신뢰비용을 감안해서 정부와 선관위가 결단을 내려주면 좋겠습니다.
이런 글을 쓰면, 무슨 김어준을 옹호하네 어쩌구 하시는 분들이 계시던데,
K값만 가지고 개표조작이 있었다 없었다 판단할 수 없다는 게 왜 김어준을 옹호하게 되는 건지 저는 잘 모르겠구요.
더플랜에서 K값에 올인했던 건 저도 치명적인 실수였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근거없는 음모론이라는 비판을 의식하고
검증할 수 없는 이런저런 정황만 나열하는 것보다는 물증을 담고 싶은 마음에 K값에 올인하지 않았나 생각이 들긴 합니다만,
올인했던 K값이 반박되면서 다큐가 담았던 다른 합리적인 문제제기까지 묻히고
급기야 18대 대선 개표조작의혹까지 묻어버리는 역효과가 나고 말았네요.
언젠가 시간이 좀 지나면 파파이스나 기타 채널을 통해 해명 및 사과를 할 수도 있겠죠. 그래줬으면 좋겠습니다.
나아가서 쫄지 말고 재검표에 응했으면 좋겠네요.
재검표해서 혼표가 나오면 의혹제기가 정당해지는 거고, 저도 개인적으로 혼표가 많이 나올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만,
만약 혼표가 안나오면 우리나라의 선거관리 프로세스에 대한 신뢰가 회복되는 거고 그건 나라 전체를 봤을 땐 좋은 일이죠.
김어준을 비롯한 더플랜은 데미지를 좀 받겠지만 실수한 부분에 대해서 사과하고, 또 다른 좋은 컨텐츠로 신뢰를 회복하면 될거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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