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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침몰 이후 교회 설교 내용입니다.
게시물ID : sewol_2131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도도라
추천 : 4/5
조회수 : 756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4/04/28 17:44:09
교회에 다니지 않으시는 분들은 잘 모르시겠지만..세월호 침몰이 있었던 주말은 부활절 주간이었습니다.
교회에서는 성탄절과 함께 가장 중요시 되는 일이라 보통 크게 행사를 하는데
다른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저희 교회에서도 모든 행사가 급하게 취소되었습니다.
또한 목사님이 주일 설교도 내용을 바꾸셨는데, 그 내용을 함께 봤으면 해서 올립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노란리본이 귀신을 부르는 주술이니..무슨 침몰하는 배 그림 그려놓고 전도지 돌렸다 하는데
얼마나 가당치도 않은 일인지 꼭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슬픈 일 앞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구호만 외치는게 정답인줄 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행위로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아무래도 주일 설교 내용이다보니 불쾌해 하실 분들도 있으실텐데요.
그러신 분들은 세월호 관련된 내용은 진하게 처리해 두었으니 거기만 읽어보셔도 좋아요.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은
 
 
 세월호의 참상 앞에서, 복잡한 감정과 수많은 생각들이 뒤엉켜 무슨 말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달리신 십자가의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은 있을 수 업성, 인간이 당하는 그 어떤 고통도 담고도 남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담을 수 없는 것도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점의 빛도 없는 곳에 갇혀 점차 차오르는 차가운 바닷물에 서서히 질식해가는 그 어린 학생들의 공포와 고통은 예수님의 고통보다 훨씬 더 클 것입니다. 그 어린 학생들은 몰랐기에 확실히 그랬을 것입니다. 모르는 것처럼 두려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기적을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응답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살아 계실까? 살아 계시다면 이 상황을 보고 계실까? 그렇다면 왜 침묵하시는 것일까? 수많은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어떤 문제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그와 유사하거나 또는 더 힘든 상황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낸시 홀은 “광야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그러나 반드시 물어야 하는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을 가르쳐 준다.” 고 하였습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빅터 프랭글 박사가 그의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이 모든 일들이 한낱 악몽이었다고 말할 날이 언젠가는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은 세상 끝 날까지 남을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을 갖고 있는 한 어떤 일도 지나가며. 해결되며, 중요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일들에 대한 반응은 두 가지 방향이 있습니다. 하나는 밑에서부터 위로, 다른 하나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향하는 것입니다. 지옥과 같았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박사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자신과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옥과 같은 삶을 통해서 인간과 의미,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깊은 통찰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감당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위에서부터 아래로, 즉 하나님의 시각에서 모든 일을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온 국민이 기적을 기다렸습니다. 자연 세계를 압도하는 초자연적인 힘이라고 생각하여, 그 기적을 기다렸습니다. 이는 밑에서부터 위를 향하는 것입니다. 이 마음으로는 오늘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없습니다. 너무나 비통하고, 아프고, 무력하지만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이 사건을 통해서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원칙이 무너졌습니다. 지도자들부터 원칙을 지키지 않습니다. 조작하고, 은폐하고, 속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이 가장 심합니다. 당연히 아래 사람들도 원칙을 지키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눅19:40)
 
 생떼 같은 우리 청소년들이 죽어가며 어른들의 비리와 부정직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을 들으며, 얼마나 부끄럽고 가슴 아픈지 모릅니다. 어른들의 잘못을 대신해서 그들이 죽은 것입니다. 대속적인 죽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대속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합니다.”(사53:4-5)
 
 우리 자녀들이 다치고 죽는 이유는 바로 내 허물과 내 죄악을 인함입니다. 우리가 봐야 할 것은 바로 내 허물과 내 죄악입니다. 가장 먼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책임자들을 향한 분노와 처벌 요구가 아니라, 내 스스로를 찌르는 통회자복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는지, 죽은 그 아이들이 어떻게 되는지, 모두 하나님의 처사에 맡길 뿐입니다. 아는 것은 단지 성격에 기록된 말씀뿐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랑이나 생명이나(중략)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중략)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모두 다 하나님께서 그 사랑 안에 품어 주식 럯을 믿을 뿐입니다.
 
 살아남은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롬 8:20)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곧 우리들이 침묵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부정직과 비리에 동조하고 외면하고 침묵한 것입니다.
 
 우리들의 하나님의 기적을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의 무응답에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고 분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적은 위에서 아래를 향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기적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진정한 변화입니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롬 8:19) 진짜 기적은 내가 참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바오디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일입니다. 거룩한 성숙을 이루는 일입니다.
 
 제프리 롱의 ‘죽음. 그 이후’ 에 수록된 죽음의 체럼을 한 어떤 사람의 증언입니다. “나의 생각과 행동, 말, 미워한 것, 도운 것, 돕지 않은 것, 도왔어야 했던 것 등. 모든 것이 보였습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비열하고 잔인했는지, 너무나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 없었습니다. 내가 행한 것과 행하지 않은 것이 어떻게 실제로 다른 사람들의 삶에 물결을 만들어내는지 명확히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실망시켰다는 느낌이 너무 생생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자신에 대해서 끔찍하게 느끼고 있는 동안에도 하나님이 나를 동정하고 받아들여 준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내가 변한다고 세상이 변하겠느냐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내가 바뀌면 세상도 바뀝니다. 세상의 모든 변화는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하나님께서 약속하십니다.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습니라” (롬 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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